정슬이의 방.

‘맑은 이슬.’ 정슬이란 이름의 뜻이다. 할아버지가 지었다. 정슬이가 태어났을 때 눈이 정말 예뻐서 붙인 이름이라고 했다. 아이 생각은 달랐다. 아침이면 늘 쌍꺼풀을 만드느라 바쁘던 정슬이는 대학에 가면 수술을 해달라고 졸랐다. 그런 정슬이에게 이모가 한턱 쏘기로 했다. 돌아오는 생일에 쌍꺼풀 수술을 시켜주기로 한 것. 하지만 18살 생일, 이모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참사 98일째이던 2014년 7월 22일, 친구들은 정슬이를 위해 분향소 한쪽에 생일상을 차렸다.
하도 여기저기 돌아다닌다고, 할아버지는 정슬이를 ‘마당발’이라고 불렀다. 마당발은 정신없이 친구들과 놀다가도 꼭 할아버지에게 전화했다. “할아버지, 나 데리고 가~”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와 할머니 손에 자란 터라 정슬이는 두 분을 잘 따랐다. 여행도 많이 다녔고, 고등학교 입학 전까지는 잠도 같이 잤다. 언젠가 정슬이는 “나 결혼 안 해! 할머니랑 할아버지 책임질 거야!”고 했다. 가족들은 정슬이가 이토록 빨리 약속을 깰 줄 몰랐다.
어른들에게 싹싹하고, 밝고 어른스러운 손녀를 할아버지는 무척 예뻐했다. 늘 정슬이에게 “네가 1등”이라고 할 정도였다. 정슬이는 외출을 하면 빈손으로 돌아오는 법이 없었다. 겨울에는 할머니를 위해 붕어빵도 자주 사 왔고, 휴대전화 사용법도 하나하나 알려드렸다. 자기가 담당하던 설거지도 야무지게 잘했다. 이제 설거지는 할아버지 담당이다. 드디어 자기 방이 생긴다고 손수 벽지까지 골랐던 정슬이 방도 주인 없는 물건들로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