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선이의 방

작은 방 이불속에서

친구 같던 자매는 같이 쇼핑도 자주 다녔고, 수다 떨다 편의점에서 맛있는 음식도 사다 먹으며 놀았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이 침대에 누워 깔깔거리며 웃을 일이 많았다. 옆 방에 있던 아빠가 “그만 자라”고 하면 조금 조용한 듯싶다가 어느새 이불 뒤집어쓰고 낄낄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연년생이었지만 언니는 혜선이를 엄마처럼 ‘우리 애기’라고 부르곤 했다. 평소 아무것도 할 줄 몰라서 하나부터 열까지 돌봐줄 게 많았던 막내를 장난처럼 부르던 애칭이었다. 나이 차이가 얼마 안났지만 언니는 동생을 많이 아꼈다. 동생이 “언니, 뭐 해줘!”라는 말만 하면 다 해줬다. 혜선이는 가족에게 알뜰살뜰 보호받는 막내처럼 자랐고, 엄마와 언니는 항상 무수리처럼 부려먹는다는 투정을 해도 코알라 같은 혜선이가 귀엽게 느껴졌다.

안경을 낀 아이

혜선이는 태어날 때부터 눈이 안 좋았다. 거꾸로 태어나 태변까지 먹고 인큐베이터에 들어갔기 때문인지, 여섯 살 때부터는 두꺼운 안경을 껴야 했다. 엄마는 선천적으로 눈이 나빠 라식도 라섹도 할 수 없던 혜선이에게 늘 마음이 쓰였다. 6개월에 한 번씩 정기검진도 받고 눈에 좋은 음식도 먹이려고 노력했지만, 안경이 없으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딸을 보면 괜히 미안하기만 했다. 세월호가 기울던 아침에 혜선이한테 “배가 흔들린다”라는 전화가 왔을 때도, 혹여 딸이 안경을 잃어버려 출구를 못 찾을까 봐 걱정돼 “친구 손 잡고, 선생님 곁에 있어”라고 당부하며 애를 태우던 엄마였다. 엄마는 전날 아침 분홍색 캐리어를 끌고 신이 나서 학교로 향하던 혜선이의 뒷모습이 마지막이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내성적인 겉모습 속 무장해제 성격

혜선이는 선생님이나 친하지 않은 아이들이 보기에는 얌전하고 말이 없는 학생이었지만, 친한 친구들에겐 흥이 많고 활달한 장난꾸러기였던 것 같다. 겉으로 보기에 내성적인 아이처럼 보이지만, 친구들 앞에서는 완전히 무장해제 된 혜선이가 나왔다. 실제로 ‘이상형’을 외모와 성격까지 구체적으로 적어놓은 혜선이 수첩을 보거나, 친구 생일 때 보낸 ‘평생친구인증서’ 같은 편지를 보면 얼마나 혜선이가 가까운 사람들에게 통통 튀는 성격이었을지 알 것 같다. 집에서도 혜선이는 노래도 잘 부르고 춤도 꽤 잘 추던 명랑한 아이였다. 그래서 엄마는 혜선이가 국어 교사를 꿈꾼다고 말했지만, 하늘에서라도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하면서 자유롭게 지내길 바란다. 이 땅에서 자기 성격을 숨기고 살았던 혜선이가 그곳에서는 자기 소신대로 강하고 담대하게 살 수 있길 기도하고 있다. “눈도 밝고 마음도 밝게, 그곳에서는 자기 성격대로 명랑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딸의 사춘기, 남산의 추억

중학교 3학년 때 혜선이는 반에서 조금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 같다. 당시 친구가 보낸 편지를 보면, 반에서 한 무리 아이들이 친구들 사이를 이간질하면서 분위기가 이상해졌고, 단짝 친구와 혜선이는 거기에 껴서 곤란한 상황에 처했던 것 같다. 그래도 둘이 서로에게 의지해 갑자기 닥친 시련을 잘 버텨낼 수 있었지만, 당시에는 많이 울기도 하며 한창 힘든 사춘기를 보냈던 것 같다. 그런 시절 자신의 속사정을 이해하지 못했던 엄마와의 관계도 어려웠겠지. 괜히 “엄마 목소리도 듣기 싫어요”라는 마음에도 없던 소리만 튀어나오고, 외롭고 힘든 마음을 떼쓰고 화를 내는 것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었겠지. 그런 딸의 마음을 어떻게 눈치챘는지 엄마는 그해 눈이 많이 내리던 날, 학교 가기 싫다던 혜선이를 데리고 남산에 갔다. 함께 놀면서 어느새 혜선이는 마음이 풀렸고, 사랑의 열쇠탑 자물쇠에 ‘엄마 말씀 잘 들을께요’라는 문구를 남기고 왔다. 나중에 혜선이를 하늘로 보낸 후, 엄마는 다시 남산에 가서 그 자물쇠를 찾아봤지만 결국 못 찾고, 대신 다른 것을 채워 놓고 왔다고 한다. 거기에는 이런 글귀를 적어놓았다. “우리는 네 식구다.“ (416 단원고 약전 2권 ‘엄마 가끔 하늘을 봐주세요’中)

매일 밥을 차리는 엄마의 기도

엄마처럼 양식보다 한식을 더 좋아하던 혜선이는 특히 엄마가 해주는 닭볶음밥과 불고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꼭 방금 만든 따뜻한 밥을 먹고 싶어 했다. 그런데 혜선이는 그렇게 식은 밥을 싫어하면서도 가스불 하나 제대로 못 켜고 라면도 잘 끓이지 못하는 반전 면모를 갖고 있었다. 그렇게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던 딸을 갑자기 보낸 것이 엄마는 늘 마음에 가시처럼 걸린다. ‘하늘도 여기랑 똑같다는데, 딸이 밥도 못 해서 굶어 죽지는 않을까’ 괜히 걱정된다. 그래서 엄마는 혜선이 장례를 치른 후 매일 아침저녁 혜선이가 쓰던 책상 위에 정성스럽게 밥과 국을 차려놓곤 했다. 엄마는 혜선이를 천국에서 다시 만나게 될 날을 기도로 기다린다. 엄마 밥을 가장 좋아하던 딸을 위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