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현이의 방

사랑을 듬뿍 받던 늦둥이 막내

세 자매 중 늦둥이 막내로 태어난 지현이는 가족들의 사랑을 넘치도록 받는 아이였다. 엄마가 갓난아기를 처음으로 집에 데려왔을 때, 두 언니는 지현이를 한 번만 안아보고 싶다고 서로 조를 정도였다. 귀여운 막내가 너무 보고 싶어서 언니들은 학교 끝나면 놀지도 않고 바로 집에 쏜살같이 달려오곤 했다. 알 수 없는 노랫말을 흥얼거리며 몸을 흔드는 세 살배기 지현이를 보면 가족들은 너무 재밌어서 손뼉을 쳤고, 그때마다 지현이는 짱구춤을 더 신나게 췄다. 엄마는 돌까지 품에 안고 모유를 먹였던 지현이가 막상 젖을 끊으니 허전하고 아쉬울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가끔 학교 다녀온 지현이를 젖먹이 아기 자세로 품에 안고 키를 재보곤 했다고. 항상 피아노 아래 쏙 들어가 놀던 작은 아기는 쑥쑥 자랐다. 엄마 배꼽 아래 있던 아이가 엄마 가슴까지 오더니 어느새 엄마 키를 뛰어넘었다. 엄마는 지현이가 커가는 것이 아쉬웠지만 그 순간의 아이를 오래 기억했다. 화목한 가정에서 넘치는 사랑을 받았던 지현이는 청소년기가 됐을 때도 집에 있는 것이 행복했다. 집 나가는 아이들이 이해가 안 간다고 말할 정도였다. 낙천적인 지현이는 친구 집에 다녀오면 항상 엄마에게 고마운 마음을 흥겹게 표현하곤 했다. “엄마, 우리 집같이 행복한 집이 없어. 엄마 아빠처럼 사이좋은 집이 없어. 난 행복한 거야.”

잘 웃고 잘 웃기는 아이

지현이는 크고 호탕하게 잘 웃는 아이였다. 가족들이 집에 들어올 때면 건물 밖에서부터 지현이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친구들과 집에 놀러 오면 방이 들썩일 정도로 시끄럽게 웃어서, 둘째 언니는 입막음용으로 과자 한 봉지를 사서 지현이 방에 넣어주곤 했다고 한다. 집안에는 늘 지현이 웃음소리가 배경음악처럼 흘렀다. 창문을 너머서 들려오는 막내의 호탕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가족들은 왠지 신나게 계단을 오르곤 했다. 어느 순간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집이 가족들은 낯설다. 그래서 때론 집안에서 지현이의 웃음소리가 계속 들리는 것만 같은 환청을 듣곤 한다. 평소 잘 웃던 지현이는 남들을 잘 웃기는 소녀이기도 했다. 아이디어도 풍부해서 부모님에게 깜찍한 효도쿠폰과 특별한 상장을 만들어 선물 드리곤 했다. 하트뽕뽕상. “위 어른은 막내 지현에게 항상 사랑을 듬뿍 주었으므로 이 상을 수여합니다 - 지현교장” 곁에 있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유머가 몸에 자연스럽게 베여있던 아이. 행복을 만들어 가는 재능을 타고난 아이. 이상하게 뭘 하든 지현이 옆에만 있으면 사람들은 사는 게 더 재미있었다.

‘언니’ 소리를 오래 기억할래

지현이는 언니들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났다. 큰언니와 둘째 언니가 연년생이었던 반면, 지현이는 둘째 언니와 여섯 살 차이가 났다. 그래서 언니들 보기에 지현이는 만화 캐릭터처럼 귀여워 보였다. 앞뒤 짱구에 귀는 쫑긋하고, 그린 듯한 눈썹을 가진 털털한 막내가 뭘 하든 예뻤다. 큰언니는 같이 껴안고 뽀뽀할 정도로 지현이를 예뻐했고, 둘째 언니는 때론 싸우고 툴툴거리면서도 비슷한 성격의 지현이를 잘 챙겨주곤 했다. 세 자매는 지현이가 졸업하면 같이 놀러도 다니고 술도 먹자고 계획했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런 약속을 미룬 게 후회로만 남는다. 큰언니는 더는 세 자매로 함께 살 수 없다는 사실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분노로 다가왔다고 했다. 지현이를 안았을 때의 느낌이 너무 생생하게 남아있는데 더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고 했다. 그저 눈앞에 있는 지현이를 아무 말 없이 안아보고 싶다는 큰언니의 오랜 속울음을 그저 상상만 할 뿐이다. 사진 속에서 수영복 입고 지현이와 같이 모래놀이를 하는 둘째 언니는 집에서 더는 ‘언니’ 소리를 못 듣게 됐다. 지현이는 소파에 누워서도 방에 누워서도 집에 들어오면서도, 늘 언니 소리를 입에 달고 살았다. “언니! 어디 갔다 와?” “언니, 어디가?” 둘째 언니는 이제 그 목소리를 까먹을까 봐 잠이 들 때까지 집안에서 울리던 “언니, 언니, 언니” 소리를 상상하며 잠이 든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동생과 하늘에서 만나게 될 날까지 이 땅에서 꼭 지키고 싶은 약속을 굳게 가슴에 담는다. “엄마아빠의 동료가 되어 진실에 다가가겠다”라고. “부모세대에 밝혀내지 못하면 우리 세대에서라도 꼭 밝혀내겠다”라고.

사람을 끄는 매력

사랑을 많이 받았던 지현이는 밖에서도 활발했고 사람을 좋아했다. 워낙 성격이 온화하고 밝다 보니 사람도 잘 사귀었고,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어 어디를 가든 친구들이 모였다. 어릴 적부터 다니던 교회 친구부터, 중학교‧고등학교 친구 등 학교나 학년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친구들이 생겼고, 그 친구들과 깊은 우정을 유지했다. 지현이는 말도 개그맨처럼 재미있게 했고, 워낙 호탕하게 잘 웃어서 옆에 있는 사람들을 행복감에 휩싸이게 했다. 지현이가 말해주는 드라마 이야기는 TV 드라마를 보는 것보다 더 재미있었고, 지현이와 함께 하는 놀이는 이상하게 똑같은 걸 해도 질리지 않았다. 새로운 생각을 덧붙이고 장난 거리를 찾고, 건전하게 새로운 이벤트와 게임을 만들어내며 지현이는 친구들과 참 흥겹게 놀았다. 친구들은 고민이 생겼을 때도 입이 무거운 지현이에게 제일 먼저 마음을 털어놓으러 왔다. 지현이는 밤을 새우면서 친구 이야기를 공감하며 들어줬고, 수업 시작하기 직전 시간이 없을 때도 학교 뒤편으로 친구를 데려가 정성껏 위로해주곤 했다. 친구들은 지현이와 마음을 나눌 수 있었고, 오래 함께할 수 있는 좋은 사람으로 신뢰할 수 있었다.

막내가 잠이 들던 침대에 남아

집안 곳곳 가족들 눈이 닿는 어디든 지현이의 흔적은 남아있다. 엄마는 도저히 잠이 오지 않는 밤 앨범이 놓인 탁자 주변을 서성이며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지현이를 바라본다. 사무친 그리움이 밀려온다. 지현이 교복, 침대, 책이 그대로 남아있는 방. 막내가 잠이 들던 침대에 누우면 지현이의 모든 것들이 생생히 떠오른다. 집 앞 골목길을 보면 가방을 메고 흥얼거리며 집에 오던 지현이, 집에 돌아오면 학교와 친구들 이야기를 쉴 새 없이 떠들던 아이, 김밥을 싸거나 삼계탕을 끓일 때면 엄마 음식이 최고라며 엄지 척 해주던 딸. 집 앞 골목길에도, 길모퉁이 떡볶이집에도, 화단에 핀 예쁜 튤립을 봐도, 먹음직한 딸기를 봐도 지현이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지현이와 엄마는 친구처럼 다정한 시간을 보냈고, 언젠가 어버이날 지현이는 편지에 ‘엄마가 없으면 저는 단 하루도 행복할 수 없어요’라는 글을 썼다고 한다. 그 말을 나중에 다시 발견하곤 엄마는 과거로 돌아간다면 딱 하나 하고 싶은 일이 생각났다. 지현이가 태어났을 때로 돌아가서 더 좋은 엄마가 되어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