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창이의 방

TV를 보는 일상적인 행동을 하면서도 영창이를 볼 수 있다. 무심결에 달력을 보다가도 영창이 생일을 축하해 주었던 리본을 발견한다. 이렇게 영창이는, 집 안에서 언제나 가족과 함께이다. 영창이는 부모님에게는 순하고 속 깊은 아들이었다. 하지만 과묵하고 조용한 아들이라기보다는 애교가 많고 서글서글해 모든 이야기를 터놓고 지낼 수 있었다. 또한 손재주가 좋아 설명서를 보지 않고도 물건을 조립하고 해체하고 수리하는 일들을 뚝딱 해냈다. 엄마는 영창이를 ‘영’이라고 부를 때도 있고, ‘아둘’이라고 부를 때도 있고, ‘오빠’라고 부를 때도 있었다. 이렇게 엄마가 친근하게 굴 때면 영창이도 능청스럽게 엄마의 애교를 받아주었다. 영창이는 안양에서 태어나 7살이 될 무렵 안산으로 이사 와 초, 중, 고등학교를 모두 다녔는데 이 시기 즈음부터 집안 사정이 어려워져 가족들이 함께 힘든 시기를 견딜 수밖에 없었다. 영창이는 부모님을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 언제나 집안에 부담을 주지 않는 선택들을 하거나 힘들어도 혼자 감내하고 속으로 삭이는 아이이기도 했다.
네 살 터울의 여동생에게 영창이는 ‘항상 져 주는’ 넉넉한 오빠로 기억된다. 남매는 가끔 티격태격 싸울 때도 있었지만 결국에는 영창이가 여동생의 말을 들어주고 해 달라는 대로 해 주었다. 그런 든든한 오빠가 더 이상 곁에 없다는 것을 아는 여동생은 그리운 마음에 영창이 사진과 다 같이 찍은 가족사진, 영창이가 좋아하던 것들을 모아 작은 공간에 소중히 가져다 놓으며 오빠를 생각했다.
엄마의 마음속에는 두고두고 안타까운 것이 하나 있다. 이번 수학여행을 보낼 만한 여력이 안 되어 영창이에게 3학년 때 가면 어떻겠냐고 물었더니, 3학년 때는 수학여행을 가지 않는다고 해 노력해서 수학여행비를 마련했던 일이다. 영창이 학년 아이들은 유행병 같은 것들로 인해 학창시절에 제대로 수학여행을 가 본 적이 없다. 엄마는 마지막이다 싶어서 영창이를 수학여행 보내주고 용돈도 10만 원이나 주었다. 이전에는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큰돈에 영창이는 미안해하고 고마워하면서 남겨오겠다는 말을 했다. 엄마는 수학여행 가기 전에 영창이 손톱, 발톱과 수염도 깎아주고 짐도 싸 주며 네 돈이니 다 쓰고, 추억이 될 사진 많이 찍어오라는 당부를 했다. 그렇게 영창이는 제주도로 떠났다. 4월 15일 저녁, 9시 넘어서 엄마에게 전화가 한 통 왔다. 영창이였다. “늦게 출발해서 밥 먹고 불꽃놀이 하고 노래하고 있는데 너무 재미있다”며 설렘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이 영창이 목소리를 들은 마지막 순간이 되어버리고야 말았다. (참고문헌 <416 단원고 약전> 8권 中 ‘가슴 시린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