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진이의 방

속 깊은 눈망울

커다란 눈망울에 또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수진이는 유치원 졸업사진 속에서도 생각이 많아 보인다. 딸 부잣집 셋째 딸이었지만, 누구보다 속 깊은 아이로 자랐던 시간이 우물 속처럼 까만 눈동자에 어려있다. 눈이 커서 잠잘 때도 눈 뜨고 잔다고 놀림 받던 막내딸은 엄마 아빠가 부탁한 일을 묵묵히 해내던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딸이었다. 어릴 때부터 사진 찍는 일을 부끄러워해서 늘 꽉 다문 입술로 어색하게 카메라를 바라보던 수진이의 눈빛은 투명하고 정직하게 빛난다. 조용한 목소리로 소곤소곤 대답하던 이 책임감 강하고 사려 깊은 소녀의 속내가 궁금해진다. 수진이는 부모님께 뭘 해달라고 말하는 모습을 거의 보기 힘든 아이였다. 두 언니가 입던 옷을 그대로 물려 입어도 불평 한마디 없었다. 그런 수진이가 처음으로 뭘 해달라고 말했던 때가 제주도 수학여행 가기 전 사고 싶은 옷이 있다고 말했던 순간. 수진이는 그때 샀던 아디다스 트레이닝복을 입었을까. 친구들과 패션쇼를 하며 신나게 웃고 떠드는 밤을 보냈을까. 8살 수진이 사진 옆에는 유달리 마르게 태어났던 갓난아기 때 수진이가 손을 빨고 있다. 가족들은 이렇게 작은 아기가 어느덧 키 170cm가 넘는 롱다리 소녀로 자랄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스르륵 우렁각시

성격만큼 방도 깔끔했던 수진이 방 창문으로 눈부시게 햇볕이 비춘다. 이렇게 밝은 빛이 수진이의 아침잠을 깨웠겠지. 수진이는 아침마다 누가 챙기지 않아도 혼자 준비해서 학교에 갈 정도로 자기 일을 잘 해내는 아이였다. 다른 친구들보다 이른 시간에 학교에 와야 하는 바른생활부 부원으로 활동했지만, 지각 한번을 안 할 정도였고, 친구들과 약속 시간에도 거의 늦은 적이 없다고 한다. 늘 알아서 자기 일을 차분하게 잘 해내는 수진이는 든든한 딸이자, 믿을 수 있는 친구였다. 수진이는 때론 가족들이 필요한 일을 스르륵 해 놓던 우렁각시였다. 가족들과 캠핑 가서도 어느새 텐트 안을 깨끗하게 정리해 놓는 것도 수진이었고, 빨래를 다 게고선 언니들이 해야하는 빨래 넣는 정리까지 다 해 놓는 경우가 많았다. 나를 기다릴 사람을 미리 생각하고, 내가 먼저 하지 않으면 누군가 겪게 될 불편함을 세심하게 신경 쓰고 배려하던 수진이의 마음이 느껴진다.

엑소를 좋아했던 이유

수진이는 아이돌 중에서 엑소를 특히 좋아했다. 책장 진열대에는 엑소 멤버 카이와 찬열의 작은 등신대가 눈에 띈다. 수진이도 로드샵 화장품 가게에서 사은품으로 주던 작은 등신대 사진을 멤버 별로 모았겠지. 엑소 멤버 중 가장 좋아했다던 디오의 사진은 미처 못 뽑았나 보다. 그 당시 가장 인기 있던 아이돌 엑소에 대한 수다로 수진이와 반 친구들의 쉬는 시간은 꽉 채워졌다. 수진이처럼 엑소를 좋아했던 언니는 종종 퇴근 후에 엑소 콘서트에 직접 다녀왔고, 수진이는 그 얘기를 친구들에게 전해주려고 더 꼼꼼히 새겨들었다. 언니 따라 콘서트 못 갔던 걸 아쉬워하지도 않고, 친구들에게 어떻게든 콘서트 후기를 잘 들려주고 싶었던 수진이 선한 마음이 전해진다. 그러고 보니 수진이가 왜 엑소 멤버 중에서 유독 디오를 좋아했는지도 알 것 같다. 큰 눈망울에 차분하고 선한 성격, 장난기 있는 눈빛으로 엉뚱한 개인기를 방송에서 보여주던 4차원 같은 모습이 어딘지 수진이를 닮았다. 심지어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맛있는 음식을 직접 만들어주던 취미까지. 좋아하면 닮는 걸까. 나와 닮은 사람을 좋아하는 걸까.

셔틀콕처럼 날아볼까

수진이는 어른들 앞에서는 쑥스러워 얌전해지곤 했지만, 친구들 앞에서는 개그맨처럼 활달한 아이였다. 친구들한테 랩으로 쪽지 메시지를 흥겹게 보내고, 몸으로 하는 운동도 꽤 좋아했던 것 같다. 친구들과 제대로 운동 한번 해보자며 진지하게 배드민턴 동아리도 만들고, 용돈을 쪼개서 배드민턴 채와 셔틀콕도 장만했다. 기다란 수진이가 배드민턴 채를 휘두르고 친구들과 깔깔거리며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단순하게 몸을 움직이고 달리다 보면 에너지도 솟아나고 가슴도 뻥 뚫렸겠지. 친구들과 함께 땀 흘리고 몸을 부대끼며 별거 아닌 일로 바닥을 구르고 넘어지면서 얼마나 신나게 웃으며 뛰어다녔을까.

수진이의 사랑 표현법

작은 스프링 수첩 첫 장을 넘기면 엄마에게 생일 축하 메시지를 전하는 수진이의 단정하고 동글한 글씨체가 보인다. 다음 장을 넘기면 수진이 친구들이 엄마에게 보내는 생일 축하 메시지가 계속 이어진다. 수진이가 교실을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친구들에게 부탁해서 받은 메시지들이다. 더 많은 사람이 시끌벅적하게 부모님의 생일을 축하 해주었으면 하는 마음. 거창한 파티나 선물을 해드릴 순 없지만, 지금 교실에서 수진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표현이다. 좋은 친구였던 수진이 부탁에 친구들도 기쁘게 수첩에 메시지를 적었고, 부모님께 생일 축하 문자 메시지까지 보내드리기도 했다. 사랑을 전하는 마음마저 전염시키는 수진이였다. 엄마의 2014년 4월 생일은 수진이와 친구들 덕분에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