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이의 방

아무리 채워도 채울 수 없는 것

짧은 시간이었지만 참 열정적으로 살았던 수정이 성격처럼 방안에는 많은 것들이 담겨있다. 엄마 아빠는 둘째 딸의 모든 것들을 잘 모아서 보관하고 전시했다. 평소 어릴 때 만들었던 작은 소품까지 버리지 않고 잘 간직했던 수정이 습관처럼 부모님도 수정이가 떠난 후 많은 것들을 찾고 이 방에 모았다. 수정이 얼굴을 그린 그림, 생일날 친구들이 보낸 편지들, 엄마의 애타는 마음이 담긴 노란 리본과 목도리, 나중에 친구들이 전해준 수정이 사진들…. 그 아래 작은 탁자 위에는 참 열심히 살았던 수정이가 어쩐지 갖고 싶어 했을 법한 물건과 옷들이 놓여있다. 렌즈가 큰 캐논 카메라를 봤다면 수정이가 얼마나 좋아했을까. 펭귄이 그려진 귀여운 티를 입은 수정이가 서울예대 교정에서 이 카메라를 들고 친구들과 촬영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참 밝고 야무지면서도 사람들을 아꼈던 둘째 딸의 빈자리는 아무리 수정이의 흔적들로 채우고 채워도 더 커져 있다. 엄마 아빠는 곱디고운 딸의 사진을 어루만지며 복받치는 설움을 삼키다 꺽꺽 숨처럼 새어 나오는 눈물을 터뜨린다.

믿음직하고 든든한 딸

수정이는 아기 때부터 배만 부르면 혼자 뒹굴뒹굴 놀다가 잠이 드는 세상 순한 아이였다. 엄마 아빠는 ‘수정이 같은 아이라면 열도 더 키울 거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 한다. 이 순둥이 아기는 커가면서도 부모님이 참 믿고 의지하게 되는 든든한 딸이었다. 뭘 사달라거나 뭐 먹고 싶다는 투정 한번 없이 누구보다 엄마를 챙기고 걱정했다. 몸이 약한 엄마를 생각하며 시장갈 때 무거운 짐을 들거나 쓰레기를 버리는 일도 거뜬히 하고, 늦은 시간에 퇴근하는 엄마가 걱정돼 야간자율학습이 끝나면 꼭 엄마를 버스정류장까지 마중 나오던 딸이었다. 용돈을 넉넉하게 받으면 그중 일부를 꼭 도로 돌려놓던 아이. 대학까지만 가르쳐 달라며, 졸업하면 자기가 용돈을 많이 드릴 거라고 말하던 아이. 엄마 아빠는 너무 철이 일찍 들고 성숙했던 수정이를 생각하면 더더욱 마음이 아프다.

누구보다 참 열심히 살았던 수정

수정이는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바쁘게 살았다. 매일 이 책가방을 메고 새벽 일찍 나가서 밤 10시가 넘어 들어오는 게 수정이의 일상이었다. 학교를 좋아하고 뭐든 열심히 참여했던 수정이는 학급 임원도 연달아 맡았고, 방송부 활동도 주도적으로 했다. 친구들은 아침·점심 방송과 교내 촬영으로 종일 학교 계단을 바쁘게 오르내리는 수정이를 자주 볼 수 있었다. 학원에 다니지 않아도 성적이 좋았던 수정이는 학교 수업과 야간자율학습에도 성실히 참여했고, 동아리 활동으로 휴일과 방학에도 바빴다. 반 친구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아, 생일파티나 수련회, 학교 축제 때 이벤트도 같이 준비하고 춤 연습까지 하는 등, 어떻게 한 사람이 이 많은 걸 다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살았다. 집에서 학교 가는 버스 기다리는 시간도 아까워 다섯 정거장 거리를 아무렇지 않게 걸어 다녔다던 수정이. 1인분 삶의 시간을 단 1초도 허투루 쓰지 않았던 이 소녀의 가방 속에는 어떤 꿈들이 들어있었을까.

카메라를 메고 달리다

수정이는 하고 싶은 것을 일찍 정했고, 그 꿈을 향해 부지런히 달려가고 있었다. 비디오 저널리스트.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방송부를 경험했던 수정이는 카메라를 다루고 촬영하며 편집하는 즐거움을 알게 됐고, 한번 시작한 일은 끝까지 파고들었다. 단원고 방송부를 하며 행사도 진행하고, 축제 때 상영하는 영상도 직접 제작하는 것을 시작으로 계속 더 큰 세상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안산과 경기 영상제작 동아리에서 활동했을 뿐 아니라, 전국 규모 영상제작 동아리 MFS에도 가입해 운영진까지 맡을 정도였다. 수정이는 전국 규모 동아리 활동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더 많은 것을 배우며 시야도 넓혔고, 학교 대표로 활동하며 자부심도 느끼게 됐다고 한다. 아마 누가 시키지 않아도 맡은 일을 끝까지 책임 있게 하던 수정이의 성격이 어디에서든 빛을 발했을 것 같다. 밤을 새워 1학년 반 친구들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편집해서 신나게 나눠주던 수정이. 친구들이 신나게 놀던 노래방 구석에서도 노트북을 붙들고 영상편집에 골몰하던 수정이. 수학여행 가던 날 출발 장면을 촬영하겠다며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길을 나섰던 수정이의 단단한 얼굴이 그려진다.

참 좋은 사람

밝고 배려심도 깊었던 수정이는 유난히 정도 많았다. 학교에서 자폐증세가 있는 친구와 짝꿍이 되는 것도 전혀 마다하지 않았고, 짝이 된 후에도 친구를 잘 돌보곤 했다. 그렇게 약한 친구를 더 배려하는 성품의 수정이를 친구들은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자아이 여자아이 상관없이 모두 수정이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상담하러 오곤 했다. 친구들은 항상 수정이만 찾게 됐다고 한다. 수정이 방 벽에 붙은 친구들이 보내준 많은 편지를 보면 수정이가 친구들 뿐 아니라 선후배 관계에서조차 얼마나 깊은 신뢰감과 친밀감을 쌓아왔던 좋은 사람인지 느껴진다. “너랑 있다 보면 너랑 진짜 친한 친구가 되고 싶다는 생각 들 때가 많아. 진짜 나 이런 생각 많이 안 해.ㅜㅜ 넌 정말 친한 친구처럼 너무 편하고 좋아. 네가 남자친구가 생긴다면 당당히 말해줄 수 있어. 김수정은 완벽한 굔듀(공주)라규. 진짜 좋은 애라고!!” 부모님은 수정이가 떠난 후 장례를 치르는 3일 내내 전국에 있는 많은 학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것을 목격했다. 광주, 대구, 목포, 홍천 등 전국에 살던 MFS방송부 선후배들, 수정이와 인연이 닿았던 많은 친구들이 하늘로 떠나는 수정이에게 눈물로 마지막 인사를 건네러 왔다. 부모님은 북적이는 장례식장에서 짧은 시간 좋은 것들만 남겨주고 간 수정이의 너무 커다란 빈자리를 오래 바라봤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