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범이의 방

하얗고 부드러운 얼굴빛, 내려간 눈꼬리, 사진 속 순범이를 보고 있으면 이름처럼 참 순해 보인다. 실제로 순범이는 온유하고 평화로운 성격이었다. 투정 한번, 반항 한번 한 적 없이 컸고, 누나와 말싸움을 하다가도 금방 풀어졌다. 장난도 잘 치고 웃음도 많았다. 친구들은 뭘 하자고 해도 언제든 같이 놀아주고 장난도 순하게 다 받아주던 순범이를 기억했다. 순범이는 사람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서 주변을 조화롭게 만드는 친구였다. 나이 차이 많이 나는 두 누나와 함께 자라서인지, 순범이는 섬세하고 배려 깊은 아이로 자랐다. 바쁜 엄마와 누나를 대신해 설거지, 빨래도 알아서 해놓고, 투잡을 뛰는 엄마가 잠시 집에 들어와 쉴 때면, 샌드위치와 김치볶음밥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가족들 눈에 막내는 그렇게 예쁜 짓만 하던 아이였다. 엄마에게 순범이는 때론 남편 같은 든든한 버팀목이었고, 누나에게 순범이는 아들과 같은 존재였다. 엄마는 순범이를 하루라도 안 보면 힘들었고, 누나는 뭘 해주든 맛있게 먹는 순범이를 보는 게 좋아서 요리를 자주 했다. 순범이는 존재 자체로 주변을 안온한 행복에 휩싸이게 했다.

순범이는 남몰래 모델이 되는 꿈을 품고 있었다. 평소 패션에 관심이 많던 누나와 패션쇼 영상을 보다가 모델이란 직업에 관심이 생기면서, 패션 화보도 즐겨 보게 됐다. 큰 키에 마른 몸, 좋은 비율까지 타고나서 주변에서 ‘모델 하면 좋겠다’는 말을 종종 듣다 보니, 자신감도 생겼다. 순범이가 남긴 노트를 보면 그 꿈이 그냥 막연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순범이는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운다. 체형교정을 위해 잘못된 자세와 습관들을 고치려고 했고, 유튜브를 보면서 워킹법과 스타일링, 패션쇼 연출법 등도 공부하고 있었다. 학교 끝나면 워킹 연습도 꾸준히 했고, 운동계획도 전문가처럼 구체적으로 세워서 실천하고 있었다. 방학 동안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 모델아카데미에 다닐 생각도 해놓고 있었다. 열여덟 순범이는 이제 차분히 자신을 찾아가고 있었다. 좋아하고 잘하는 것 앞에서 골똘했다. 가족들은 너무 일찍 철이 들어서 이제 조금씩 좋아하는 것을 찾아 배우고 싶어 하던 순범이를 지원해 주려고 했는데… 더 많이 해주지 못했던 것들, 더 자주 해주지 못한 말들만 계속 마음에 아프게 고여있다.

그날 순범이를 잃은 이후, 엄마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 수 있는 방. 이곳은 순범이의 작은 박물관이자, 세월호 진상규명 활동의 박물관처럼 보인다. 크고 작은 순범이 사진과 그림, 세월호 집회 현수막, 손재주 좋은 엄마가 순범이를 그리며 쉴 새 없이 만들었을 수많은 수공예품. 하루라도 안 보면 미칠 것 같던 막내를 떠올리며 엄마는 공방에서 끝없이 바느질하고, 뜨개질하고, 글씨를 썼다. 일하느라 마지막까지 아들 밥 한 끼 못 해주고, 품에 꼭 안아보지 못했던 모든 순간이 깊은 한처럼 남아있다. 순범이에게 사랑한다는 말도 자주 못 한 것이 깊은 후회로 남은 시간, 지금도 엄마는 순범이 방에서 사랑한다는 말을 노트에 쓰고 쓰며 버티고 있다. 그날 이후 엄마의 삶은 완전히 180도 바뀌었다. 낮에는 미용실을 하면서 밤에 식당 일까지 나가며 악착같이 살던 엄마는 이젠 세월호 진상규명 현장의 한가운데 서 있다. 집회 맨 앞자리에서 구호를 외치고, 청운동과 국회 앞에서 노숙을 하며, 주저 없이 삭발도 하고, 간담회와 연극으로 전국을 돌며 시민들을 만난다. 진상규명이 될 때까지 머리를 노란색으로 계속 유지할 생각이다. 순범이는 엄마가 사는 것이 버거워 몇 번이나 다 내려놓고 싶을 때마다 버틸 수 있게 해준 아이였다. 그날 이후 하루하루 지날수록 숨이 막혀왔다. 그렇게 숨쉬기 힘들 때마다 엄마는 순범이와 세월호 아이들을 생각한다. 수학여행 갔던 아이들이 왜 그렇게 됐는지, 왜 아무도 구하지 않았는지 알아내야만, 최소한 다시는 그런 참사가 일어나지 않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 꼭 진실을 밝혀내야만 하늘에 있는 아들을 만났을 때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이 방에서 아들을 만나며 엄마는 더 강해지려고 한다. “사랑하는 아들, 하늘에서 엄마 지켜보며 항상 응원해줘. 지치지 않고 너희를 위해 끝까지 뚜벅뚜벅 걸어갈게.” (‘그리운 너에게’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