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정이의 방

집으로 돌아올 거 같아

창문 옆 선반에는 현정이의 유년기 사진부터 고등학교 때 사진이 컬렉션처럼 전시돼 있다. 엄마는 매일 아침 눈을 떠서 딸 사진을 바라보며 손을 흔든다. “현정이 잘 잤어?” 어쩐지 활짝 웃지 못하고 희미하게 웃는 표정의 현정이 사진을 볼 때마다 엄마는 마음이 아려온다. 현정이 침대, 책상, 교복 모든 게 그대로인데 현정이만 보이지 않는다. 엄마는 현정이가 어느 날 갑자기 “짠!” 하고 집으로 들어올 것만 같다. 학교 다녀오면 엄마가 듣든 말든 계속 옆에서 쫑알거리던 막내딸, 좋은 음악 있다며 엄마 귀에 이어폰을 꽂아주던 애교 많던 딸, 나중에 나이 들면 자기가 언니를 돌보겠다고 걱정하지 말라며 엄마를 든든히 위로해주던 속 깊은 딸…. 엄마는 친구처럼 함께했던 현정이가 몹시도 보고 싶다. 구석에 핀 작은 들꽃 속에서도, 살랑 부는 바람 속에서도 옆에 있을 것만 같은 현정이를 느껴본다. 그러다가도 잠을 자고, 밥을 먹고, 햇살을 받는 모든 순간이 문득문득 미안해지고 만다. “오늘은 어떤 모습으로 엄마한테 올까. 오늘은 무슨 말을 엄마 귓가에 속삭여 줄까. 가만히 엄마 어깨를 안아주는 것 같다.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내 딸이 우리 현정이가, 많이 많이 보고싶다…” (‘그리운 너에게’中)

진솔한 자기소개서

현정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성장 과정과 가족 환경에 관해 쓴 자기소개서. 현정이는 이 글에서 장애가 있는 언니와 함께 살아가며 느끼는 마음을 참 진솔하게 털어놓는다. 언니처럼 조금 불편한 사람들을 보면 안쓰럽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서도, 어릴 때 학교에서 친구들과 장애가 있는 아이를 놀렸던 자신을 돌아보며 참 바보 같았다고 후회한다. 어릴 땐 부모님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것 같은 언니가 무작정 미웠던 마음, 크면서는 언니를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혹시 언니가 학교에서 왕따라도 당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동생의 마음이 그대로 담겨있다. 현정이는 언니가 다니던 학교 사회복지사 선생님의 선하고 열정적인 모습을 지켜보며 사회복지사를 꿈꿔보기도 했다. 그 선생님이 졸업 후에도 언니와 통화도 자주 하고 가끔 만나서 밥도 사주고 게임 하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며, 동생으로 자신을 돌아보기도 했다. 아마도 언니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늘 현정이 마음 한편에 남아 사회복지사라는 직업도 생각해보게 된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언니를 떠올리는 습관들이 늘 교실에서 소외된 친구들을 유독 현정이 눈과 마음에 크게 떠오르게 했을 것 같다.

만화 콘티 노트 20권

고2가 됐을 때 현정이는 너무나 좋아했던 담임 유니나 선생님을 지켜보며 일본어 교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리고 나중에 현정이 방 서랍 속에서 발견된 것은 노트 20권을 꽉 채운 카툰 콘티들. 다양한 캐릭터를 만들고, 인물들에게 서사를 부여하고, 그림을 그리는 과정 자체를 현정이는 즐겼던 것 같다. 연습장을 꽉 채운 다양한 그림과 이야기들 속에서 현정이의 열정이 느껴진다. 아마도 현정이 마음속에는 직업과 꿈이 분리돼 있었을 것 같다. 현실적으로 가족들에게 도움이 되는 안정적인 직업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마음 깊은 곳에는 현정이만이 꿈꾸던 예술적 열망이 꿈틀꿈틀 기지개를 켜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믿을 수 있는 친구

현정이의 중2 생일날, 유독 고마웠던 한 친구는 현정이에게 커다란 판넬 편지를 선물한다. 큰 하드보드지 3장에 깨알 같은 글씨로 친구는 솔직하게 현재 자신의 심경과 친구 현정이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표현한다. 15살, 항상 친구들 사이에서 언제라도 낙오될까 봐 스트레스까지 받게 되는 시기, 그 불안한 상황 속에서 언제나 변함없이 내 곁에 있어 주는 친구의 존재는 순식간에 지옥을 천국으로 만든다. 현정이는 홀로 외롭게 찾아오는 친구들의 든든한 안식처였다. “나 진짜 그때 너한테 정말 고마웠어. 내가 점심·쉬는 시간에 놀 애 없다고 너희 반에 갔는데 니가 다른 친구들이랑 놀고 있었는데도 나랑 같이 있어 줬잖아. 진짜 고마웠어.” 현정이는 한없이 외로웠던 친구의 눈빛을 읽고, 손해가 나더라도 기꺼이 그 곁에 함께 머물러 주던 아이였다. 편지를 쓴 친구는 현정이처럼 믿을 수 있는 친구를 사귀게 된 것을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것 같다’라고 표현했다.

잘 놀고 있어. 내 친구…

“어이, 김현정~ 잘 놀고 있었어?”, “장미꽃 처음 받아보는 거려나?”로 시작하는 2014년 4월 이후 친구들의 편지를 읽다 보면 마치 현정이가 잠시 순간이동 했다가 금방 돌아올 것처럼 느껴진다. 친구는 8년 동안 매일 봐온 현정이의 걸음걸이, 제스처 등 베프의 모든 것들이 눈을 감아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18년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 세상에서 완벽한 내 편이 갑자기 한순간 사라졌는데,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는다. 다신 현정이를 볼 수 없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지도 못하겠고, 그저 답답할 뿐이다. “그냥 전처럼 너랑 통화하면서 너희 엄마께 전화 끊으라고 혼나고 싶고, 열쇠 없을 때 너희 집 가서 라면 먹고 테일즈런너 게임도 하고 싶고, 집 갈 때 중간까지만 데려다 달라고 조르고 싶어.” 매일 같이 아무렇지 않게 친구와 어울리던 사소하고 평범한 일상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너무나 특별한 기억으로 그립고 그리울 뿐이다. 함께 그 배에 탔다가 간신히 살아 돌아온 반 친구는 현정이의 꺼진 핸드폰으로 전화를 건다. “집에 갈 때 항상 내 옆에 있던 니가 없어서 너무 슬프다”고, “그때 너를 불러서 데리고 나오지 못한 게 너무 후회돼”라고 고백한다. “네가 눈물도 흘리지 않고 용감하게 방안에 왔을 때 난 엉엉 울었잖아. 기억나? 난 진짜 겁쟁이야.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너를 잡고 나와서 정말 둘이서 한 쌍의 바퀴벌레처럼 붙어 다닐 거야.” 위기가 닥칠 때 의외로 대범해지던 현정이가 그 배에서도 얼마나 씩씩하게 친구들을 안심시켰을지 상상이 된다. 현정이는 베프의 깊은 소망처럼 친구들 꿈속에 놀러 갔을까. 천국에서 친구들과 누구보다 더 행복하게 놀고 있을까. “잘 지내고 있어. 앞으로 8년이고 80년이고 항상 그리울 거야. 못 잊어. 나 또 올게. 기다리고 있어. 사랑해.” 친구들의 애달픈 목소리가 하늘의 현정이 귀에까지 닿을 수 있겠지. 언젠가 시간이 흘러, 못다 한 길고 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날이 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