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지의 방

천왕성보다 더, 해왕성보다 더

민지는 아빠에게 애교가 넘치던 딸이었다. 아빠는 콩처럼 작고 귀여운 딸을 ‘콩민지’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민지는 아빠에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쫑알쫑알 들려주고, 어버이날이나 생일 때는 마음이 담긴 긴 편지를 보내곤 했다. 편지를 읽다 보면 민지와 아빠가 얼마나 친밀한 사이였는지 느낄 수 있다. 홀로 두 남매를 키우던 아빠에게 막내 민지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생각해보면 아득해진다.
<2009.5.8. 초6 어버이날 민지가 아빠에게 쓴 편지>

“아빠한테 화를 내서 진짜 마음이 아파요. 아빠를 사랑하는 게 진짜 제 마음이에요. 아빠가 매일 힘들게 일하는데 그것도 모르고 화를 냈어요. 아빠 미안하고 진짜 사랑해요.” (초6 어버이날 민지가 아빠에게 쓴 편지) 사춘기가 한창 시작될 무렵인 초6 때도 민지는 아빠에게 화냈던 걸 못내 마음에 품고 있던 아이였다. 그리고 아빠를 사랑하는 마음이 진짜 마음이라고 따뜻하게 표현할 수 있는 성숙한 아이였다. 발랄한 겉모습과 달리 너무 빨리 철이 들어버렸던 아이. 그래서 더 많이 사랑하는 편을 선택했던 아이.
<민지가 아빠 생일날 보낸 편지>
“근데 나랑 데이트 좀 합시다. 영화도 보고 밥도 먹고. 내가 맛있는 초밥 뷔페를 알아! 9,900원짜리” “울 아빠 하늘만큼, 땅만큼, 태양만큼, 우주만큼, 태양에서 우주 끝까지 (중략) 미래보다 더, 바다보다 더, 우주인보다 더, 목성보다 더, 화성보다 더, 수성보다 더, 금성보다 더, 천왕성보다 더, 해왕성보다 더, 산보다 더, 비보다 더, 구름보다 더 사랑합니다. - 아빠를 무지무지 사랑하는 딸내미가” 아빠 생일날 민지는 뭔가 거창한 계획을 세웠다. 단짝 친구들과 함께 직접 케이크도 만들고, 아빠가 좋아할 것 같은 양말도 골랐다. 그리고 뭘 줘도 성에 차지 않아, 손글씨로 빼곡히 채운 대왕 편지도 준비했다. 편지엔 민지의 밝고 낙관적인 성격이 고스란히 들어가 있다. 씩씩하게 아빠한테 데이트하러 가자고 말하는 민지의 해사한 얼굴이 그려진다. 민지와 아빠는 그 초밥뷔페 집에 함께 갔을까… ‘울 아빠를 태양에서 우주 끝까지 사랑한다’는 콩민지의 편지를 읽고 또 읽으며 아빠는 몇 번이나 무릎이 꺾였을까… 도저히 상상이 안 된다.
<민지 생일날 혜원, 윤정, 혜선, 재은이 선물로 만들어준 전지편지>

나는 오늘 친구들을 찾아서 너무 행복하다

“소중한 우리의 친구 민지야. 우리가 너에게 이런 진짜 친구가 되어줄게.” “너가 내 친구라는 게 너무 좋고 행복해. 쭈~욱 프렌드” 민지는 처음 만나는 친구에게 먼저 말을 거는 아이였다. 중학교 1학년 때 5총사 친구들이 함께 뭉치게 된 이유도 민지를 통해서였다. 이 다섯 친구는 같은 영화동아리에 들기도 하고, 민지의 오디션 준비를 돕기도 하면서 소소한 추억을 나누며 우정을 단단히 쌓아갔다. 친구들 생일이 오면 힘을 합쳐 즐거운 이벤트도 부지런히 챙겼다. 민쥐(민지 별명) 생일날, 친구들은 민지가 좋아하는 아이돌 비스트 사진으로 장식한 큰 팝업 카드를 직접 만들어 선물했다. 친구와 관련된 명언을 모은 글귀 아래에는 서로를 굳게 붙들어주는 친구들의 다정한 메시지가 담겨있다. 좋아하는 사람들을 꽉 끌어 안아주던 민지의 마음처럼….
<2015.09.11. 민지 19번째 생일날 친구 혜선이 쓴 편지>

“이렇게 좋은, 최고의 친구를 만나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언제나 밝은 미소로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는 민지는 아버님을 참 많이 닮은 것 같아요. 이렇게 예쁜 딸을 낳아주시고 길러주셔서 너무너무 감사드리는 마음에 편지를 씁니다.” (2015.09.11. 민지 19번째 생일날 친구 혜선이 쓴 편지)
<2015.09.11. 민지 19번째 생일날 친구 윤정이 쓴 편지>
“제가 써드리는 편지가 민지가 아버님께 하고 싶은 말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민지를 잘 키워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해주셔서 민지 같은 착하고 좋은 최고의 친구를 만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민지랑 친구로 지낸 5년이라는 짧고도 긴 시간 동안 민지 친구여서 좋았고 즐거운 시간과 추억들뿐이었어요. 절대 잊지 못할 거예요.” (2015.09.11. 민지 19번째 생일날 친구 윤정이 쓴 편지) 이제 더는 민지는 아빠에게 긴 편지를 보낼 수 없다. 민지가 이 땅에서 보낼 수 없는 편지를 이젠 민지의 친구들이 대신 보내준다. 친구들은 슬픔에 빠져있을 아빠에게 민지가 있었다면 하고 싶었을 말들을 민지를 대신해 편지로 전한다. ‘이렇게 예쁜 딸을 낳고 길러주셔서 감사하다’고, ‘아빠 덕분에 절대 잊지 못할 즐겁고 좋은 추억들을 가질 수 있었다’라고… 민지가 평소처럼 팔락팔락 걸어와 환하게 웃으며 아빠 팔짱을 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