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협이의 방

힙합 모자에 소니 헤드셋, 좋아하던 랩퍼 아웃사이더. 어렸을 때부터 동협이는 노래를 좋아했다. 특히 랩퍼들을 좋아해서 한때는 랩퍼를 꿈꾸기도 했다. 운동보다는 예술 쪽으로 재능이 있던 아이였다. 그러다 고1 때 단원고 연극부에 들어온 이후 동협이는 자신에게 딱 맞는 적성을 찾았다. 타고난 재능이었는지, 어느새 동협이는 연극부에서 연기를 제일 잘하는 학생이 돼 있었다. 학교 동아리에서 주연도 아닌 조연으로 출연한 경기도 청소년 연극제에서 최우수상을 탈 정도였다. 그날 상장을 받은 동협이가 사진 속에서 활짝 웃고 있다. 고등학생이 된 동협이는 이제 뭔가를 찾은 것만 같다. 연기에 재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된 동협이는 진로를 정하면서 오디션 볼 계획도 세웠지만 어쩐지 연기학원 다니는 것은 망설였다. 아빠가 학원을 한번 알아보라고 했지만, 학원비가 거품이 너무 심하다며, 자기는 학원 안 다녀도 충분히 가능하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철근을 메고 건축 현장에서 힘들게 일하는 아빠에게 부담을 주기 싫었기 때문이다. 동협이는 그렇게 가족에 대한 마음이 깊은 아이였다. 세 남매 중에서도 아빠를 가장 많이 생각하는 아들이었다. 고등학교를 정할 때도 빨리 취업해 집안에 도움이 되고 싶다며 공고를 선택하려고 했다. 아빠는 “연극 해서 잘 되면 아빠 소원이던 전원주택을 꼭 사주겠다”고 말하던 동협이의 호언장담이 떠올라 마음이 아프다. 유독 마음이 쓰였던 막내아들에겐 왜 이렇게 해주지 못한 것들만 자꾸 떠오를까.



동협이는 부모님이 이혼한 이후 세 살 때부터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젖도 못 뗀 상태에서 엄마 품에서 떨어져서였을까. 동협이는 가족들과 떨어져 있을 때 불안한 마음이 커졌다. 할머니와 헤어지기 싫어서 수학여행도 안 가려고 할 때도 있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함께 살게 된 할머니도 어릴 때부터 자신을 많이 의지하고 따르는 동협이가 유독 더 정이 갔다. 어려서부터 거의 끼고 살았던 동협이는 유일한 손자처럼 느껴졌다. “나한테 진지한 사랑을 많이 줬어요” 할머니에게 동협이는 그런 손자였다. 조금 늦게 들어갈 때도 할머니가 기다릴까 봐 수시로 전화를 걸어주던 다정한 아이였다. 할머니는 지금도 밤 10시가 되면 자신을 부르면서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던 동협이를 습관처럼 기다리게 된다. 동협이가 없는 일상이 도저히 실감 나지 않는다. 혼자 있을 때면 하염없이 계속 흐르는 눈물을 어떻게 멈춰야 할지 몰라 안 먹던 술까지 꺼내기도 했다. 집을 이사했어도 가족 중 유난히 마음 깊던 막내 손자를 보고 싶은 마음은 도저히 엷어지지 않는다.

동협이는 세월호에서 올라왔을 때 손에 핸드폰을 꼭 쥐고 올라왔다. 그 안에는 동협이가 참사 당일 세월호 선내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총 9분 30초 정도의 영상이 들어있었다. 배가 침몰하던 9시 10분경 촬영된 영상에서 동협이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고 거침없이 표현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상황을 차분하게 설명한다. 동협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아, 나 살고싶어…”라고 비명에 가까운 말을 읊조릴 때면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연기에 재능이 있던 동협이는 자신의 감정을 언어로 정확하고 분명하게 표현한다. “나는 꿈이 있는데… 나는 진짜 하고 싶은 게 많은데” “나 진짜 무서워요. 지금… 나 진짜 울 거 같아요.” 소리 지르고 울먹이는 동협이의 목소리를 통해서 우리는 아이들이 느꼈을 엄청난 공포심과 두려움을 실감하게 된다. 그 순간 동협이는 배 안에서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던 다양한 아이들의 대변자가 된 것만 같다. 냉철한 기자처럼 배가 기울어진 각도부터 전기가 끊긴 상황까지 구체적으로 설명하다가, 어느 순간 겁에 질리고, 마지막에는 랩으로 이런 상황을 만든 사람들을 비난하고 분노한다. 동협이는 알았을까. 이 목소리와 떨림에 많은 사람이 깊은 고통과 아픔을 함께 느꼈다는 것을.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았던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쌓이고 쌓였던 죄책감이 결국 많은 사람을 움직이게 했고 역사를 바꿨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