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석이의 방

아기였던 원석이가 어린이가 되고 청소년이 되기까지의 나날들이 원석이 방 한쪽 벽에 자리하고 있다. 5남매 중 막내인 원석이의 열여덟 해를 기억하고 있는 가족들은 가끔 이 벽 앞에 서서 그때 그 순간의 공기와 원석이의 목소리, 함께 했던 마음들을 떠올리고 있을 것만 같다. 원석이는 가족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사랑하는 아이였다. 세상이 험하니 이런 걸 배워둬야 한다며 엄마와 누나들에게 호신술을 가르쳐 주기도 했고, 엄마의 퇴근길에 마중 나와서는 찻길은 위험하다며 엄마를 길 안쪽으로 걷게끔 했다. 또한 보쌈집에서 아르바이트 해 번 돈으로 누나에게 부츠를 선물한 적도 있었다. 늦둥이로 태어나 형, 누나들과는 열 살 이상 차이가 났지만 서로가 애틋한 남매지간이었다. 원석이가 입던 교복과 메던 가방에는 원석이를 향한 그리움과 진상규명의 염원이 담긴 노란 리본과 꽃이 달려 있다. 어쩌면 원석이 없는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가족들의 간절한 마음이 노란 리본이 되고, 노란 꽃이 되어 그 자리에 피어난 것처럼 보인다.



원석이 엄마는 원석이를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 가장 크다. 원석이는 친구들과 잘 지내고 학교에서도 스스로 공부를 열심히 해 엄마를 속상하게 만드는 일이 없었던 아들이었다. 평소에는 수련회를 갈 때에도 새벽부터 일어나서 서둘렀던 원석이었지만 그 해 수학여행을 떠나던 4월 15일에는 느긋하게 준비를 하기에 엄마는 원석이에게 “얼른 학교 가야지”하고 잔소리를 했다. 원석이는 엄마를 꼭 안아주며 “사랑한다”는 말과 “제주도에 가서 귤이랑 초코렛이랑 사다 주고 용돈도 절약해서 엄마 가져다 드리겠다”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섰다. 4월 16일 아침, 원석이는 침몰하는 세월호에서 다른 친구들과 함께 갑판으로 빠져나왔지만 잠든 친구를 데리고 나오겠다며 다시 선실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사흘 후에나 엄마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가족과 나라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싶어 국군장교를 꿈꾸었던 원석이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비 오는 날 파지 줍던 할머니를 도와주었던 원석이, 친구에게 자신의 차비를 빌려주고 걸어서 집에 오기도 했던 원석이가 세상에 남긴 따뜻하고 순수한 마음들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질문이 되어 돌아온다. (참고문헌 한겨레신문 <잊지 않겠습니다> 中 ‘다른 사람이 입관하고 장례했다니…한없이 기다리기만 했던 엄마를 용서해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