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빈이의 방

이 방은 성빈이에게는 낯설 것이다. 성빈이가 지내던 방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빈이네 가족은 성빈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살았던 고잔동 집에서 연고가 없는 화성으로 이사를 왔다. 성빈이와 성빈이 아빠가 함께 있는 화성 효원공원과 가까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말이다. 성빈이 아빠는 세월호 참사 당시 폐암으로 투병 중이셨는데 이듬해 성빈이 곁으로 떠나게 되었다. 이사를 오면서 어떤 것들은 남고 어떤 것들은 정리되었겠지만 책상 위에 놓은 성빈이의 사진들 속에서 성빈이를 향한 그리운 마음과 애틋한 사랑은 가족과 늘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빈이에게는 두 살 많은 형이 있다. 성빈이는 형을 잘 따르고 좋아했다. 둘은 주말이 되어도 각자의 친구들과 밖에 나가 놀기보다는 집에서 같이 시간을 보내곤 했다. 엄마가 일하러 가면 집 청소와 설거지는 물론이고 빨래를 해서 널어놓기도 하는 두 아들이었다. 물론, 형이 성빈이를 많이 시키기도 했지만 말이다. 성빈이는 정이 많고 애교도 많은 성격이라 부모님께도 살가웠고 아빠가 병원에 계실 때도 자주 아빠를 보러 갔다. 수학여행을 가기 전, 4월 13일에도 성빈이는 수술을 마친 아빠를 만났는데, 그때 아빠는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하셨다. 그것이 함께 찍은 마지막 사진이 될 줄은 누구도 몰랐다. 이렇게 사진들로 성빈이를 떠올려야만 하는 현실이 가족들은 여전히 낯설게 느껴진다.
옷장 안에는 성빈이의 태권도 품증이 있다. 성빈이는 4.4kg의 우량아로 엄마에게 왔는데 돌 때까지만 통통하고 점점 젖살이 빠졌다. 어렸을 때부터 체격이 작은 편이라 태권도를 배우며 스스로를 지킬 힘을 길러갔던 성빈이였다. 엄마는 성빈이가 4살 때 자전거 사고로 다리 수술을 하게 되어 ‘키가 많이 크지 않으면 어떡하지?’하는 걱정이 있었지만 성빈이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부쩍 크기 시작해 고등학교 2학년 때는 173cm가 되었다. 조금만 더 크면 178cm인 형을 따라잡는다고 좋아하기도 했다.
집이 단원고등학교와 가까웠기 때문에 성빈이는 야간자율학습이 끝나면 10시 5분도 안 돼서 집에 도착했다. 체격이 큰 형을 놀리느라고 “돼지야, 애기 배고프다. 뭐든 먹자!”며 문을 열고 들어오는 성빈이 모습과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는 성빈이 엄마는, ‘별 성(星)’자에 ‘빛날 빈(彬)’자를 쓰는 성빈이 이름대로 성빈이가 언제나 하늘에서 빛나고 있고 아빠와 함께 엄마와 형을 지켜보고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참고문헌 <416 단원고 약전> 7권 中 ‘가족과 함께했던 행복 발자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