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이의 방

재능이 방에 있는 커다란 지구본과 책장에 꽂혀있는 두꺼운 영어사전들. 외교관이 되고 싶었던 재능이의 꿈과 열정을 어렴풋하게 엿볼 수 있는 방이다. 재능이는 한국외대 스페인어과에 들어가고 싶다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 대학에서 체코어와 에스파냐어를 전공해서 꼭 외교관이 되고 싶었다. 컴퓨터 바탕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던 파일들은 모두 한국외대 입학전형과 영문법과 관련된 문서였다. 재능이의 꿈이 얼마나 구체적이고 간절했는지 알 수 있다. 고잔역 근처에 살았던 재능이는 오가면서 다양한 나라에서 온 외국인노동자들과 마주쳤다. 그러다 가끔 길을 물어보는 외국인들이 있었고, 그때마다 최대한 친절하게 지하철노선이나 버스노선을 안내했다. 아마도 그때의 경험들이 재능이를 외교관이란 꿈으로 인도했는지도 모른다. 목표가 생긴 재능이는 고등학교에 와서 무서울 정도로 변했다. 하교하면 바로 책상에 앉아 헤드셋 끼고 인터넷 강의를 들으며 공부했다. 독학이 편하고 경제적으로 이득이라는 이유였다. 그렇게 국어나 영어는 상위권으로 자연스럽게 올라왔지만, 수학은 혼자 하기 어려웠다. 수학을 잘하던 엄마가 모르는 것을 공부하면서 재능이와 문제를 풀었다. 그렇게 재능이와 함께하던 시간이 엄마는 꿈결처럼 아득하게 그립고 그립다. 엄마 아빠가 재능이를 떠올리며 가장 많이 떠오르는 것은 운동을 하던 모습이다. 재능이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체력이 중요하다’는 담임 선생님의 말을 듣고, 매일 아침 옥상에 올라가 운동을 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에 줄넘기를 천 개씩 했고, 아령도 들고 팔굽혀펴기도 했다. 재능이는 자기만의 루틴과 시간 안에서 성실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영어 전치사 연구>, <체코어 첫걸음>, <손자병법> 등 학생들이 전혀 읽지 않을 것 같은 장식용처럼 보이는 이 책들은 모두 재능이가 산본 중고서점에 가서 직접 사 온 책들이다. 재능이는 가족들이 이미 읽었거나 들춰보지 않을 책들을 모아 중고서점에 가서 팔고 자기가 필요한 책들을 그 돈으로 사 왔다. 공부한다고 유세를 좀 부려도 괜찮을 외동아들인데도, 재능이는 검소하고 알뜰하게 사는 게 몸에 뱄던 아이였다. 다른 아이들처럼 유명브랜드의 옷을 사달라고 한 번도 조른 적도 없었다. 오히려 엄마가 노스페이스 점퍼를 사자고 해도 “비싸고 개성이 없다”며 거절하던 아이였다. 재능이는 남의 눈을 의식하며 살지 않았다. 분명하게 자기가 가고 싶은 길이 있었고, 자기만의 원칙과 소신이 있던 아이였다. 좋은 신발과 좋은 옷으로 겉을 포장한 사람이 아니라, 건강한 몸과 마음을 가진 고유한 한 인간으로 자기다운 인생을 충실하게 살아내고 싶어 했다. 그래도 엄마 아빠는 그렇게 허무하게 떠난 아들에게 좋은 옷과 신발 한번 사주지 못했던 것이 그렇게 마음에 한처럼 남았다.

재능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제주도 용두암에서 찍은 가족사진은 영원히 머무르고 싶은 기억으로 부모님에게 남아있다. 그동안 여러 사정으로 자주 여행을 가지 못했지만, 이제 경제적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가족들은 해외여행을 가볼 계획을 세웠다. 아빠가 해외여행으로 어디를 가고 싶냐고 물었을 때, 재능이는 한 치 망설임 없이 유럽을 꼽았다. 책에서만 동경하던 곳, 외교관이 되면 가고 싶던 나라들을 이렇게 일찍 가볼 수 있다는 상상만으로 재능이는 행복했다. 가족들이 함께 기대하던 유럽여행의 꿈은 수학여행에서 벌어진 참사로 멈춰 버렸다. “재능이는 나에게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다. 소식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다. 그 이후에 매일 눈뜨는 것조차 힘들었다.” 재능이는 엄마의 엔돌핀이자 때론 의지가 되는 산 같은 존재였다. 엄마 아빠는 집에 가만히 있으면 언제라도 재능이가 자기 방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다. 아빠 꿈에 나타난 재능이는 182㎝의 큰 키로 팬티차림을 하고 천진난만하게 집안 여기저기를 뛰어다녔다. 거울에 몸매를 비춰보고 호탕하게 웃는 재능이는 생전 모습 그대로였다. 그 모습을 생각하며 엄마는 ‘그곳’을 상상해 본다. 그곳에서 재능이가 선생님과 친구들과 재밌게 놀고 있길, 못다 이룬 꿈을 꾸며 행복하게 살고 있길 바라고 바라본다. (참고문헌 <416 단원고 약전> 6권 中 '큰 소리로 꿈을 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