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원이의 방

룸메를 기다리는 곰돌이

아빠가 어릴 때 사준 커다란 곰 인형이 제일 먼저 반겨주는 채원이 방. 푹신하고 보송보송한 곰 인형의 압도적인 이미지 때문인지 이 방의 주인은 금방이라도 아무렇지 않게 들어와 침대 위에 벌렁 누울 것만 같다. 오랫동안 채원이의 룸메이트였던 분홍색 조끼를 입은 하얀 곰은 갑자기 이 방에 나타나지 않는 주인의 빈자리가 낯설기만 하다. 엄마 아빠도 이 방에 앉아 하염없이 딸의 빈자리를 바라본다. 항암치료 받던 엄마를 열심히 도우며 식구들한테 뭐든 양보만 하던 채원이. 아빠 옆에서 서로 의지가 되는 친구처럼 재잘재잘 떠들며 손잡아주던 딸. 처음에 엄마는 채원이와 자주 다니던 동네, 맛있는 거 먹고 싶을 때 딸과 손잡고 함께 가던 공간에 다시 가는 것이 너무 어색해 힘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젠 채원이와 나누던 소중한 추억들이 깃든 공간을 떠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다.

디즈니 만화를 좋아하는 4차원 소녀

채원이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순수하고 맑은 아이였다. 특히 어릴 적부터 ‘인어공주’를 너무 좋아해서, 수학여행 가기 전까지도 엄마에게 새로 나온 인어공주 만화영화 다운로드를 부탁할 정도였다. ‘겨울왕국’도 꽤 좋아했는지 책상 위 가장 좋은 자리에는 엘사 인형이 당당히 자리 잡고 있다. 물론 이 영화들의 주제가였던 ‘언더더씨’와 ‘렛잇고’도 채원이의 최애 노래였다. 특히 웃기는 상황을 만들고 싶을 때면 ‘렛잇고’ 노래를 틀고 주인공처럼 립싱크하곤 했다. 엘사가 손짓으로 얼음을 만들고 문을 짠 열고 나가는 하이라이트 장면을 표현하며 친구들을 웃게 만들기도 했다. 청순하고 얌전한 첫인상과 달리, 알고 보면 4차원 같은 면모를 품고 있던 채원이. 왜 친구들이 평소에 “병맛 같은 모습을 더 많이 보고 싶다”는 메시지를 남겼는지, 성당 동생들이 채원이를 “장난도 잘 치고 주변 사람들한테 웃음을 주는 분위기 메이커였다”고 표현했는지 알 것 같다.

예쁜 걸 좋아해

예쁘게 꾸미는 걸 좋아했던 채원이 방에는 아기자기한 장신구와 소품, 화장품이 잘 정리돼 있다. 평소 옷을 좋아했던 채원이가 특별한 날 입고 놀았을 것 같은 레이스 카라가 달린 잔꽃 무늬 쉬폰 원피스도 눈에 띈다. 무늬 ‘채(彩)’자에 으뜸 ‘원(元)’. 이름 뜻대로 예쁘게 돋보이는 것을 좋아했던 채원이는 어린이집 행사 때도 무대에서 부모님과 눈이 마주치면 오히려 기운이 솟아서 더 날아다니던 아이였다. 어린 시절부터 그런 끼가 잠재돼 있었기 때문일까. 채원이의 진짜 꿈은 배우가 되는 것이었다. 공식적으론 장래희망을 초등 선생님이나 유치원 선생님이라고 말했지만, 문채원 같은 배우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초기 비용 300만 원이 넘게 드는 이 교정도 채원이 스스로 오랫동안 돈을 모아서 했다고 한다. 채원이 책상 앞에 붙은 포스트잇만 봐도 채원이가 얼마나 철저하게 스스로 외모 관리를 잘했는지 알 수 있다. 식이요법과 생활 습관으로 주근깨와 피부를 관리할 수 다양한 팁이 꼼꼼하게 적혀있다. 역시 채원이의 투명한 피부와 돋보이는 패션 감각이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었던 거다.
<단짝 친구 민지가 채원이 생일날 보낸 편지>

왜 우린 남친이 없을까?

채원이는 중학교 때 친해져서 고등학교 때까지 같이 어울리던 네 명의 친구들이 있었다. 넷은 정말 친해서 나중에 어른이 돼도 계속 연락하며 지낼 거라고 당연히 생각했다고 한다. 그 넷 중에는 단원고로 채원이와 함께 별이 된 우영이도 있고, 다른 학교였지만 채원이와 단짝처럼 붙어 다녔던 민지도 있었다. 민지는 채원이를 갑자기 잃은 후 마음 앓이를 심하게 했는데, 어느 날 채원이 부모님께 친구들이 기억하는 길채(채원 별명) 이야기를 담은 긴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 편지 속에서 채원이는 낯을 가리지만 친해지면 쾌활한 아이였고, 웃을 땐 돌고래 소리를 내며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던 명랑한 소녀였다. 둘은 취향이나 성격이 잘 맞아 자주 붙어 다녔다. 주말이면 불러서 치킨을 먹었고, 옷 사러 갈 땐 서로 봐주고, 처음으로 지하철 타고 놀이동산에도 함께 갔다. 영화를 좋아해서 한 달에 두세 번은 꼭 영화를 보러 다녔고, 맛집 탐방을 정말 좋아하는 길채(채원 별명)와 함께 맛있는 음식을 항상 같이 먹으러 다녔다. 또, 채원이와 친구들이 장난스럽게 말하던 최대 과제는 ‘모솔(모태솔로) 탈출’이었다. 친구들이 쓴 편지마다 ‘왜 우린 남친이 없을까?’, ‘언제쯤 남친과 롯데월드 갈 수 있을까’란 귀여운 고민이 보인다. 대학교에 희망을 걸어보자던 바람. 대학 가서 술도 같이 먹고, 알바해서 여행도 가자던 친구들과 나누던 약속이 긴 손편지 속에서 먹먹하게 눈에 밟힌다.

가장 크고 반짝이는 별

채원이 엄마는 눈에 띄게 크고 반짝거리는 별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저 별은 내 거’라는 기도를 하는 꿈을 꿨는데, 그 후 채원이를 가지게 됐다고 한다. 별과 특별한 인연이 닿았는지, 채원이의 천주교 세례명도 별을 뜻하는 ‘에스텔’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엄마는 채원이를 볼 때마다 항상 우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아픈 엄마를 대신해 심부름도 자주 하고, 늘 옆에서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어주던 채원이는 외모만큼 마음도 반짝이던 아이였다. 친구들은 채원이를 “힘들 때 옆에서 위로와 격려가 되어주는 친구”로, “기분 나쁜 일 있을 때 만나면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는 햇살 같은 친구”로 기억한다. 또 성당 동생들은 “계속 챙겨주고 먼저 말 걸어주던 언니”로, 교사들은 “선생님 입장과 기분까지 배려하던 따뜻한 아이”로 채원이를 기억한다. 반짝이는 별로 세상에 왔던 채원이가 다시 밤하늘을 비추는 별이 되어 누구보다 따뜻하게 사람들을 비춘다. 예쁜 옷을 입고 팔짝팔짝 친구들과 뛰어놀고 있을 채원이의 춤을 은하수 끝에서 오랫동안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