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보다 더 재미있는 게 야사입니다. 정사는 다분히 힘의 논리와 강자의 시각으로 쓰인데다 웬만해서는 상상의 여백을 주지도 않습니다. 그에 비해 야사는 백성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며 재미있게 윤색되었을 뿐 아니라 정사가 허락하지 않는 여러 각도의 시선을 적극적으로 수용합니다. 야담집이 중요하게 대우받는 것도 아마 이런 이유가 아닐까요.

<천년호>는 신라의 야사에서 두 가지 모티브를 따왔습니다. 진성여왕이 음란했다는 이야기와 태종무열왕이 천년 묵은 여우를 신궁으로 쏘아 죽였다는 이야기이지요. 이 전혀 다른 이야기가 신상옥 감독의 머리속에서 절묘하게 섞여 권력과 성, 지순한 사랑에 관한 영화로 탄생하게 되는겁니다.

신라 진성여왕시대. 변방에서 외적들을 물리치고 돌아온 김원랑이 보고를 올리러 입궐합니다. 보위에 오르기 전부터 원랑을 사랑했던 진성여왕은 그를 유혹하지만 원랑은 아내와 아기에게 가야한다며 한사코 퇴궐할 기회만 봅니다. 이에 질투를 느낀 여왕은 원랑 몰래 원랑의 아내 여화를 도성 밖으로 쫓아내라고 명하고 쫓겨난 여화 일행은 도적떼를 만납니다. 몸종 둘과 아기를 도적의 손에 잃은 여화는 연못으로 몸을 날립니다.

그런데 이 연못에는 오랜 전설이 있습니다. 태종무열왕이 처녀를 재물로 잡아먹던 천년묵은 여우를 잡아죽인 뒤 이 연못에 버렸다는 전설이었지요. 여우는 여화의 몸을 빌려 무열왕의 자손인 진성여왕을 죽이고 신라를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이를 모르는 원랑은 연못에서 부인을 구하고 그때부터 여우가 출몰해 아기를 죽인 도적떼들을 죽이고, 궁으로 들어가 여왕의 목숨까지 노립니다. 아내가 여우의 혼에 씌었다는 사실을 안 원랑은 신라사직과 왕족을 지켜야하는 자신의 임무와 아내를 사랑하는 평범한 남자로서의 마음 둘 사이를 오가며 고민합니다.

눈치채셨다시피 이 영화는 시련 속의 연인들 이야기입니다. 두 사람은 정말 사랑하고, 서로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시간만큼을 더해서 사랑하며 살고싶은 것인데 세속의 권력이, 다른 사람의 질투가, 주위 인간들의 두려움이, 거기다 초현실적인 존재의 침범이 그 작은 소망마저 깨버리고 마는거지요.

흔하게 보고 들어왔던 이야기이라고 하시겠지만, 이 영화가 가지는 의미는 따로 있습니다. 영화가 유일한 볼거리였던 시절, 이 정도 수준의 볼거리는 대단한 것이었을 겁니다. 신라라는 국호도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많았을 69년에 신라여왕이 걸친 독특한 옷과 장신구, 원랑이 펼치는 검술, 여화가 여우의 혼이 씌어 지붕 위를 넘나드는 장면 등이 관객의 눈엔 얼마나 신기하게 비쳤을까요.

영화를 보는 대부분의 관객들은 30여 년 세월의 흐름 속에 이제는 놀라움의 대상에서 우스개의 대상으로 변질된 화면을 보며 실소를 터뜨렸지만, 제 옆에 앉은 아주머니 두 분만은 정확하게 반응하셨답니다.

"어머, 나쁜 년! 남에 남편을 꼬셔서 어쩌겠다는기고!"
"엄마야, 쟈들 눈에는 쟈가 여우로 보이는갑다."
"저 나쁜 놈, 저거 고대로 일러바치재!"
"엄마야, 저 여자 죽겠네, 우짜노."

예, 맞습니다. 집에서 드라마를 보듯, 영화 속에 빨려 들어가서 마치 옆에서 일어나는 일인 듯, 사신의 반응이 영화에 큰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며 보는 게 이 영화의 제대로 된 감상법이었습니다. 저렇게 실실 웃거나, 저처럼 수첩을 들고 필기해가며 보는 것은 절대적으로 잘못된 감상법이란 겁니다.

대부분이 옛날이야기와 달리, 이 영화는 그래서 둘은 행복하게 살았단다, 로 끝나지 않습니다. 원랑은 사랑하는 아내의 팔을 베고 가슴을 찔러 피투성이로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새벽이 되어 여우의 혼에서 놓여난 여화가 자신과의 대결에서 부상을 당해 정신을 잃은 남편의 모습을 보고 자살하려 칼을 들지만, 깨어난 원랑은 칼 든 여화를 여우로 오인해 아내의 가슴을 찌릅니다.

죽어가면서 사랑을 고백하는 여화와 사랑하는 사람을 제 손으로 죽인 사실에 통곡하는 원랑의 모습은 비극적 연인의 최후 중 가장 나쁜 결말이지요.

원랑은 이후 왕좌를 노리던 상대등의 세력에 밀려 곧바로 투옥되어 오랜 시간 수감됩니다. 겨우 옥에서 풀려나자 바로 여화의 무덤을 찾지요. 요물이 묻혔다고 무거운 돌로 눌러놓은 무덤 앞에 앉아 원랑은 밤이고 낮이고 움직이지 않습니다. 실각한 진성여왕이 찾아와 자신의 죄를 빌며 함께 살자고 해도 그는 거절합니다.

눈이 오고, 비가 오고, 낙엽이 떨어지고, 다시 눈이 내려 쌓이도록 원랑은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습니다. 원랑을 돕던 대사가 그 무덤을 찾아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있는 원랑의 어깨에 손을 올리자 원랑은 먼지로 무너져 내립니다.

이번 영화제에서 본 마지막 신상옥 영화였습니다. 아무래도 신상옥 감독은 비극적인 연인들을 편애하시는 듯 싶군요. 아니면 프로그래밍이 그렇게 된 것뿐일까요?
2001-11-17 13:57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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