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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시작과 마지막의 10여 분을 잡아먹고 내러티브의 군데 군데 섞여 있는 채팅 화면. 보여지는 것은 새까만 화면에 무언지 알지 못할 하얀색 글씨체가 알아 볼 수 있는 글씨(일본어-이 영화는 일본 영화니깐)로 변하는 것 뿐. 효과음 역시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를 빼고 나면 고요하다. 순전히 관객을 채팅 속의 세계, 즉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는 또 다른 세계에 몰입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미 우리는 온라인의 세상에 익숙하다. 그것은 아바타로 대표되는 또 다른 자아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미 내 삶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아니 일부라기 보다는 또 다른 나의 삶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두 다리를 땅에 버티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키보드 위에 내 열 손가락을 접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의 세계는 현실과 온라인의 가상 공간을 두 축으로 달린다. 온라인의 공간도 현실만큼(아니면 그 이상) 중요한 공간으로서 말이다.

에테르의 구현자

에:테르[ether]ⓝ 호이헨스에 의하여 전우주에 꽉차서, 빛이나 전자파를 전하는 매질로 가정된 가상적 물질.

사전적 의미의 에테르는 그렇지만 영화 전체에 걸쳐 계속 되는 에테르는 바로 릴리 슈슈다. 릴리 슈슈야말로 어둠으로 가득차 더 이상 빛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유일하게 빛을 전해주는 매개체다. 그들은 발을 붙일 곳이 없다. 릴리 슈슈의 음악만이 그리고 그녀의 리듬을 탄 가사만이 그들의 마음의 안식이며 구원이다.

그네들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는다. 릴리 슈슈를‘에테르의 구현자’라고 부르는 열성팬들이 모이는 팬사이트도 있다. 릴리의 팬들은 그녀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한다. 중학교 2학년인 유이치도 그중 하나다. 필리아란 아이디로 그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다. 그곳의 아이들의 모습은 순수하고 고결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현실은 그러하지 못하다.

영화는 시간의 순을 약간 섞어 놓았다. 비춰지는 플롯 시간은 그 방황하는 젊은이들의 중학교 1학년에서 3학년 사이의 기간이다. 유이치는 세속적인 표현으로 왕따에 꼬붕이다. 1학년 때 친했던 호시노란 친구가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폭력을 앞세워 남을 괴롭히는 자가 되어 버리고 유이치는 그 밑에서 겨우 겨우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그것이 전부다. 바로 영화의 전부인 것이다. 그 속에서 젊음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등장하고 자살과 윤간이 나오며 청소년 성매매가 등장한다. 그것은 소재일 뿐이다.

이미 그러한 영화들은 현실에 넘쳐난다.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 의미도 없다. 감독의 시선이 문제인 것이다. 젊은 생명들의 방황, 그 속에서의 고뇌와 비극. 물론 대다수는 그렇게 성장한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 버린다. 정상적으로 성장한 어른들도 그 에테르만은 느낄 수 없다. 영화가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절망과 희망은 언제나 함께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섣불리 희망은 무엇이라 이야기하지 않고, 그렇다고 섣불리 절망의 끝은 무엇이라 규정짓지도 않는다. 절망을 그대로 보여주고 그 안에 함께 있는 그네들의 희망을 그대로 이야기한다.

이와이 슌지

이와이 슌지의 영화는 크게 두 범주로 구분되어 진다. 4월의 이야기(1998)와 러브 레터(1995)로 규정되는 따뜻한 멜로풍의 영화와 스와로우테일(1996), 피크닉(1996), 언두(1994)의 일그러진 현실들을 드러내는 영화들이 그것이다. 이 영화는 이 두 가지 범주를 아우르고 있다.

마치 4월의 이야기를 연상하는 들판 장면에서 유이치와 호시노는 번갈아 가며 등장한다. 호시노는 가해자고 유이치는 피해자다. 그러나 그 구분은 없다. 그들도 인터넷 상에서는 필리아(유이치)와 푸른 고양이(호시노)로 불리우는 다른 존재일 뿐이다. 그들은 릴리 슈슈 팬 사이트에서 릴리 슈슈를 에테르로 하여 매개된 자들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고 그들의 에테르를 공유한다. 새로운 세상에선 그들은 서로를 위로해 주는 멋진 동지다.

영화의 결말로 결국은 희망이 내려 앉은 유이치가 호시노를 죽여버리고 영화는 끝이 나버리지만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그 누구도 피해자는 없다. 없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피해자다. 그것 뿐이다. 담담하게 겪어 나가야 되겠지..그것이 현실이니깐.

릴리 슈슈의 애잔한 음악이 흐르는 동안 현실은 미화되어 있는 두 젊은이의 모습을 보여준다. 한없이 아름답기만 하다. 다양한 각도와 조명과 노을의 영향으로 그 영상미는 극에 달한다. 그러나 영화의 중반 디지털 장면이 등장하면서 이와이 슌지 특유의 멀미 날 듯한 핸드 헬드의 잔치가 벌어진다. 물론 관객들을 마음 편히 놔두지 않는 스타일이지만 그 안에서 방황하는 젊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바로 그것이 슌지만의 매력이다. 간만에 내 감성을 자극하는 영화를 보았다. 나도 에테르를 느끼고 싶다.
2001-11-22 03:31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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