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우리 연배에 한대수의 음악을 그 자체로 알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공동경비구역 JSA'라는 영화를 경유해서 알게 된 이가 대부분이겠지요. 32년 전, 우리 부모님들이 우리 나이였을 무렵 음반 두 장 남기고 미국으로 떠나버린 그였기에 우리가 아는 한대수는 노래 몇 곡일 뿐이었습니다. 그 시대의 정치적인 상황과 연계되어 이상하게도 저항적인 색채를 띠게 된 몇 곡의 노래, <물 좀 주소>와 <행복의 나라로>.

스물 여섯 먹은 영화를 전공하던 어떤 청년이 2000년 내한한 그룹 '스매싱 펌킨즈'의 공연 리뷰를 보려고 인터넷 서핑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는 정말 우연히도 한대수의 홈페이지를 발견합니다(www.hahndeasoo.co.kr).

그 홈페이지의 내용을 읽다가 고민중이던 영화과 졸업작품으로 한대수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떠올렸지요. 그리곤 거의 기대를 하지 않고 메일을 보냈습니다. 그 다음날 바로 전화가 왔지요. 한대수 씨에게서. "바로 와서 찍어." 이 영화의 탄생설화인 셈입니다.

2000년 8집 작업을 위해 한국에 머무르게 된 한대수 씨의 한국생활 1년 반을 조용히 좇는 카메라는 그의 친구와 아내, 음악 동료들이 모습을 담고 때론 그들의 인터뷰를 삽입합니다.

부산에서 태어난 한대수는 중학교 동창을 만나 해운대 바닷가를 걷고 부산 곳곳을 돌아다니며 옛날을 회상합니다. 그의 옆에는 전처 김명신 씨도 함께입니다.

홍익대 미대 출신으로 개방적이고 전위적이었던 그녀는 한대수를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현재는 이혼하여 각자 다른 사람과 결혼한 상태지만 여전히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인 두 사람.

김명신 씨는 "난 언제까지 대수 씨 사람이야. 대수 씨 옆에 여자가 백 명이 있어도 상관없어. 대수 씨가 옆에 있는 사람들한테 싫증나면 내가 감싸줄 거야"라고 합니다. 한대수도 김명신 씨를 '봄(Bohm) 여사'라고 부르며 여전한 우정을 과시하지요.(김명신 씨는 '뵘'이라는 성을 가진 독일인과 재혼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한대수의 부인 옥사나. 러시아계 몽골인으로 한대수가 어려웠던 시절 만난 "호탕하고 직선적이고 몸도 예쁜 여자"인 그녀는 한대수와 함께 공항으로 마중나온 김명신 씨와 키스로 인사하고 자매처럼 붙어 앉아 이야기를 나눕니다. 보편적인 기준으로 가늠하기 힘든 이들의 우정을 지켜보는 친구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대수 씨와 옥사나는 물고기자리라 만날 때마다 뽀뽀하느라 바쁘고 명신 씨는 물병자리라 두 사람을 다 거두어 담는 거야. 물고기가 놀 수 있게."

70년대의 한대수는 군사정권의 압박으로 미국으로 도망치듯 떠났습니다. 하지만 2000년 돌아온 한국도 한대수를 압박하긴 마찬가집니다. 독재정권은 무너졌지만 오래 전부터 음악계에서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상업적 논리는 더욱 힘든 적이기 때문이죠.

작곡가이자 한대수의 8집을 프로듀스한 손무현은 현재 한대수가 처한 상황에 분노합니다.

"왜 그를 저항가수에만 묶어두는가. 왜 그의 음악을 그 자체로 보지 못하는가. 우리는 왜 그에게 다시 노래부를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지 못하는가."

선배음악인으로서 그가 가진 여러 가지 영감과 음악적 재능이 후배에게 전해지지 못하고 그냥 박제화되어 간다는데 대한 안타까움이 가득 담긴 그의 말 앞에서 한대수는 그 특유의 말투로 이야기하지요.
"화폐문제 때문이지."

영화 곳곳에는 인간 한대수의 모습이 진하게 배어있습니다. 어릴적 실종되었던 아버지와 7년을 기다리다 재혼한 어머니 이야기, 신학과 수의학을 전공할 뻔하다가 음악과 사진을 찾게 된 이야기, 다시 한국에 돌아왔을 때 자신을 동물 보듯 하던 사람들 이야기, 그리고 '한국 최초의 히피니 모던락의 아버지니 하지만 난 그냥 할아버지 작곡자'일 뿐이라는 이야기, '애 둘쯤 낳아 현대차 한 대 뽑고 미사리로 점심이나 먹으러 다니는' 삶이 꿈이었다는 이야기.

크게 웃고 궁금한 건 못참고 사람에게 말 걸기 좋아하는 그의 모습은 쉰이 훌쩍 넘은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게 하지만 그의 주변에서도 노쇠와 죽음의 그림자가 느껴집니다. "벌써 많은 친구들이 병으로, 알콜로, 사고로 죽었어. 나도 노후의 대문을 두드리고 있고. 즐거운 웃음으로 미래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구요. 벌써 팔도 아프고. 고장나기 시작하는 거지."

그래도 그는 사진찍기와 작곡하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영화 속에서 녹음할 스폰서를 잡지 못하자 음악인들끼리 방에 모여 연주하는 곡도 미발표곡입니다. "There's nothing that can last as forever"(미발표곡 'As forever' 중에서)라고 노래하면서도 그는 창작을 놓지 못합니다. 음반제작 계획이 무산되어 쓸쓸하게 혼자 돌아서면서도 그가 웃을 수 있는 이유는 음악이 있기 때문이겠죠.

다큐는 전반적으로 한대수 개인에게 기울어져 있습니다. 오랜 팬이었던 사람이 애정을 담뿍 담아 찍은 홈비디오 같다고 할까요? 마치 아들이 아버지를 찍듯, 인간적인 애정을 듬뿍 담아 그의 일상을 좇아 그와 함께 웃고 노래하고 술 마시며 그리 유별나지만은 않은 인간 '한대수'를 비추는 거지요.

'이게 다큐냐'고 물으신다면 꼭 사회적 이슈만이 다큐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느냐고 되물어보고 싶습니다. '사람 사는 이야기'가 다큐 아니었나요.
2001-11-14 13:25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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