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년작인 이 영화는 월탄 박종화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합니다. 신상옥 감독은 같은 소설가의 작품 '금삼의 피'를 가지고 <연산군>이란 작품을 만들기도 했지요.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이야기거든요. 노국공주를 사랑했던 공민왕은 공주가 아이를 낳다가 죽자 정사를 신돈에게 맡기고 그녀의 초상만 바라보며 세월을 보내다 나라는 망하고 그 스스로도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는 이야기.

신상옥 감독은 이 잘 알려진 이야기를 자기식으로 비틉니다(월탄의 원작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그 비틀림이 월탄의 것인지 감독의 것인지 정확하지 않네요).

고려 왕실은 원에 공물을 바치며 왕실 사람을 원의 수도로 보내 볼모살이를 시켜야 하는 처지입니다. 보위 전의 공민왕도 원에서 볼모를 살며 노국공주와 정략결혼을 합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단순한 정치적 이해관계로 맺어진 정략혼의 희생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둘은 정말 서로 사랑했으니까요.

고려출신인 원의 기왕후를 등에 업은 황후의 동생 기철은 고려의 장수를 지내며 고려 국정에 깊숙히 관여합니다. 어린 정종을 폐위시킨 후 공민왕을 보위에 올리는 일이 벌어지자 기철은 누이 기황후에게 자신의 안위를 지켜달라고 합니다.

고려의 왕이 된 공민왕은 함부로 걷어들인 세금으로 국민의 삶이 피폐해진 것을 보고 교정도감을 설치해 부패한 관리를 제거하려고 합니다. 위기감을 느낀 기철은 도감 설치를 폐해 달라는 건의를 하지만 공민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이에 격분한 기철은 원나라로 가서 군사를 끌고 고려를 치려고 합니다.

처음부터 기철을 탐탁찮아 했던 노국공주는 기철이 왕에게 무례하게 굴자 그를 칼로 위협해 쫓아내고, 기철이 군사를 끌고 쳐들어오자 자신의 패물로 군자금을 만들어 공민왕에게 내주는 등 왕에게 헌신적입니다(사실, 따지고보면 공주는 자신의 조국에 칼을 들이대는 셈이지요).

그렇게 강하고 왕에게 헌신적인 공주가 출산을 하다 그만 아기와 함께 죽고 맙니다. 왕은 반 미치광이가 되어 공주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고, 그녀의 초상을 그리며 침식을 잊고 슬퍼할 뿐입니다.

영화는 볼거리가 풍부합니다. 일단 잘 알지 못했던 고려의 역사에서 이야기를 차용했다는 의의가 있지만 원나라의 복색과 건축, 정원모양 등을 재현해 놓은 것도 훌륭합니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결혼식 피로연에 벌어지는 공연, 두 사람이 다시 고려로 돌아오는 길에 등장하는 요동벌 장면이나 돌아온 두 사람을 환영하는 고려인들의 모습, 또 기철과의 전투장면 등은 상당히 사실적이고 스펙터클합니다. 30여년 전에 만든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지금 만든 '태조 왕건'과 비교해서 꿀리지 않을 정도지요.

다만, 고려의 복색은 고증을 거치지 않아서인지 조선중후기의 복색으로 보입니다. 모두 흰 옷을 입은 고려인들, 갓에 도포를 입은 왕의 모습, 인조섬유로 만든 회장저고리를 입은 노국공주의 모습 등등.

사료나 복식사가 미처 정리되지 않았을 때인 점을 고려하고 보면 그렇게 불평할 일도 아니군요. 감독은 상상력을 동원해서 고려를 만들어낸 것 뿐일테니까.

아까 이야기가 뒤틀렸다고 말씀드렸지요? 그건 이 영화 속에 알게 모르게 숨어 있는 변태성욕적인 분위기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공민왕이 죽은 노국공주의 옷을 벗기고 그 시체 구석구석에 입을 맞추는 장면의 분위기라든지, 나중에 신돈이 불러낸 노국공주의 혼령과 섹스하는 장면 등이 그렇지요.

시체와 사랑을 나눈다. '시체애호증', 혹은 '네크로필리아'라고 부르는 이 상태는 변태성욕으로 분리되는 몇몇 행위 중 가장 심한 것에 속한다고 하는군요.

감독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남자의 정신적 착란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 듯합니다.

왕은 나중에 신돈의 고백으로 노국공주의 혼령이, 실은 공주와 닮은 반야라는 여자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녀에게서 아들을 얻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왕은 아이만 데려오게 하고, 공주를 위한 명전 공사에 들어갑니다. 신돈은 왕에게 '공주를 위한다면 백성을 괴롭히는 명전 공사를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직언하다 왕의 노여움을 삽니다. 왕은 신돈의 목을 베게 하고(여기서부터 우리가 아는 이야기와 차이가 납니다. 우리는 신돈이 괴승으로 정사를 좌우하다가 나중에 혁명세력에 의해 죽게 된다고 알고 있지요. 그런데 여기 나오는 신돈은 충직하고 생각 깊은 우국충정지사입니다) 공주의 명전 공사를 강행합니다.

명전 완공날, 완공 기념잔치가 벌어지는 궁으로 아이를 뺏기고 미쳐버린 반야가 숨어들어옵니다. 몰래 노국공주의 초상화가 놓인 방으로 들어간 반야는 그림 속의 공주처럼 입고는 그림을 불태워버립니다. 불은 곧 명전 전체로 번지고, 반야를 구하려고 불길로 뛰어든 왕마저 죽고 맙니다.

고려의 역사는 그렇게 끝났다는 내레이션과 함께 영화는 끝납니다.

신상옥 감독은 6, 70년대 흥행감독으로 이름 높았습니다. 이 영화는 그의 그런 면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2001-11-14 19:06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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