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hsen MAKHMALBAF 모흐센 마흐말바프
- Iran, 2001, 85min, 35mm , Color

아프간 출신의 캐나다 여성 저널리스트 나파스는 `일식에 맞춰 자살하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아프간에 남아 있는 동생으로부터 받고 칸다하르로 동생을 찾아 떠난다. 자 이것이 이 영화의 시작이고 끝이다. 첫 장면과 끝 장면은 똑같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바로 그 앞과 끝 사이만을 바라보라는 감독의 암시일 것이다.

로드무비, 길, 다큐멘터리

이 영화도 마흐말바프가 추구해오고 이란 영화에서 즐겨 볼 수 있는 로드무비다. 로드무비가 현실을 파헤치는(?) 영화에서 사용하기 적합한 방법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고 흔히 보아온 로드무비는 버디 무비에 가까운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친구나 연인 관계의 두 명이나 여럿이서 길을 떠나며 그 과정 속에서 관계의 발전이 이루어진다. 혼자서 여행을 떠나더라도 영화의 핵심은 그 여정 속에서의 에피소드나 그로 인해 자아를 찾게되는 등의 주인공이 중심에 서있는 것이다. 그리고 일반적인 로드무비에서의 '길'은 영화내에서 단순히 배경장면으로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길' 그 자신이 갖고 있는 꿈과 같은 속성과 이미지를 통해 등장인물들의 정서와 교감을 빚어내는 빛과 어둠의 풍경화인 것이다.

그러나 칸다하르에서 사용한 로드무비식의 '길'의 의미는 주인공과의 교감이 목적이 아니다. 이 길을 따라가는 여행에는 관계의 발전으로 이어질 친구가 없다. 게다가 자아의 완성 역시 목적은 아니다. 그저 담담하게 현실을 보여준다. 주인공 나파스는 현실을 비추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영화의 제작 시부터 픽션과 다큐를 섞어 찍었지만 그러한 관점으로 이 영화를 바라본다면 이 영화는 100% 다큐멘터리다. 단순히 사실을 그대로 프레임 속에 담는다고 다큐멘터리는 아니다. 그 안에는 개인의 신념이 사회적 차원의 의미로 담겨져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 보다 오히려 더 다큐멘터리답다.

물론 그러한 것이 진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드리지 못하게 만들 수는 있다. 주제의 부각이나 극적 구성을 위하여 현실을 지나칠 정도로 과장되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직접 아프가니스탄의 처참한 현실을 체험한 적이 없어 그것이 과장됐는지 아닌지의 진위 여부는 가리기 힘들지만 <칸다하르>는 틀림 없이 지나침 없는 진짜 현실의 극적 구성을 해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영화는 2001년 2월에 제작되었고 아프간전쟁은 2001년 9월에 발발했다. 작품의 수준을 벗어나 중동 이외의 세계에서 전혀 관심을 두지 않던 아프가니스탄 내전을 비롯하여 중동의 처참한 현실들이(기존부터 있어온) 9.11 미테러를 계기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기존부터 있어오지 않은)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길의 영화이자 다큐멘터리 보다 더욱더 관객들로 하여금 아프가니스탄의 비통함을 느끼고 이해하게끔 하는 이 영화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중동의 문제를 바라 보는 시각

2001년 9월 11일 세계 무역 센터를 향해 항공기를 돌진시키는 테러리즘 사상 최악의 사태가 발생했다. 무고한 수천 수만 명의 인명에 무차별한 테러를 가한 행위는 현실적 경험은 물론 영화적 상상력까지 뛰어넘는 극악무도한 것이었다. 헐리우드 영화의 익숙한 스펙터클을 떠올렸던 사람들도 100층 높이에서 뛰어 내리는 생명들 앞에서 얼마나 치를 떨어야 했던가.

하지만 서방 세계 언론들이 최악의 테러라고 규정한 이번 사태에 대해 모든 지구촌 주민들이 가슴 아파한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자치지구에서는 애도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기쁨에 겨운 수많은 팔레스타인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허공에 테러를 축하하는 총을 쏘고 춤을 추며 환호하는 모습이 외신을 타고 전해졌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그들을 이해하고 객관적으로 연구하는 풍토와 시각적 대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계화라는 절대절명의 명제를 강조하면서 언제까지나 서구 언론들이 자기들 구미에 맞게 양념한 정보만을 취하면서 우리 바깥의 문제들과 때로는 우리 자신의 문제까지 그들의 입장에서 평가하고 수용하는 무지와 위협상태를 계속할 순 없다.

우리에게 이슬람은 아직도 생소하고 그들은 '미래', '후진성', '호전성', '전근대성', '시대착오적인 독선'을 가진 이미지로 다가온다. 이슬람은 위험하고 무슬림들은 테러리스트처럼 호전적인 사람들이라는 이미지 조작은 우리의 입장에서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문화적 본질에 접근하는 자세가 아니다. 원유의 70%를 그곳에서 들여오고 해외 건설시장의 최대 외화 획득 가득원이며 1970년대 중동 특수로 우리 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 식으로 경제적 논리만을 따지지는 말자.

13억 명의 인구에 55개국에 달하는 아랍, 이슬람권을 끌어안지 못하는 세계화란 결국 허구이고 반쪽 세계화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왜 그들은 미국의 심장부에 일침을 가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해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시기인 것이다.

<칸다하르>에는 제한 시간이 설정되어 있다. 일식이 일어나기 전에 동생을 구해야 한다. 이것은 바로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한 아랍권 국가들에 대한 시각의 대전환이 '일식이 일어나기 전까지'라는 제한처럼 빠른 시간 안에 이뤄져야 한다는 마흐말바프의 절규다. 그리고 나파스는 동생을 찾아가는 여정 사이 사이, 녹음기에 동생에게 전해줄 희망의 메시지를 녹음한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절규가 세상에 먹힐 수 있으며 그로 인해 동생을 구출해 내듯(영화에서 결말은 알 수 없다) 평화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이다.
2001-11-22 03:35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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