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프리어즈 감독은 헐리우드 장르영화와 영국 영화의 전통 사이를 오가는 감독입니다. 필모그래피도 상당히 독특하다 못해 들쭉날쭉합니다. 찬사를 받는 쪽도(<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위험한 관계>, <그리프터스>), 혹평을 받은 쪽도(<리틀 빅 히어로>, <메리 라일리>) 비슷한 이야기를 한 것은 없지요. 온갖 이야기를 두루 섭렵한 스펙트럼 넓은 감독인 겁니다. 그런 그가 고향으로 돌아와 영국 영화 본류에 서서 찍은 영화가 <리엄>입니다.

1930년대. 7살인 리엄은 리버풀 머시강 건너 아이리시 천주교구 내에서 살고 있습니다. 생활에 찌들어 억척스럽긴 하지만 사랑이 넘치는 엄마와 무뚝뚝하지만 열심히 일하는 아빠, 모범적인 형과 누나를 둔 평범한 가정이죠. 리엄은 말을 더듬는 게 문제이긴 합니다만 누나 테레사와 함께 아는 작은 비밀들로 충분히 행복한 시절을 보냅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실직하면서 하루 벌어 먹고 사는 이 집은 어려움에 시달리게 됩니다.

영화의 전반적인 시선은 리엄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습니다. 경제의 침체로 점차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이 일어나고, 민족주의라기 보다는 인종차별주의("내 나라에서 나가. 더러운 아일랜드 놈아.", "유태놈들이 우리를 착취하는 거야.")라고 불러야 할 위험한 사상이 득세하던 시절에 유년을 보내는 아이가 보는 세상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유치합니다.

같은 동네에 사는 이웃들은 어려운 동료를 돕기 보다 자신이 살기 위해 남들을 밟고 오르려 하고, 사소한 문제로 가족같던 사람들과 평생 보지 않을 것처럼 할 말 못할 말 모두 내쏘며 싸워댑니다. 똑같이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외국인(아일랜드인이 영국에서 과연 외국인이긴 한 겁니까?) 가족에게 당장 내 나라를 떠나라는 엄포나 놓고, 가장의 권위를 잃지 않으려고 손찌검을 해댑니다.

리엄이 다니는 천주교계 학교의 선생과 신부는요? 하루 먹고 살기에도 빠듯한 사람들에게 꼬박꼬박 헌금을 걷으러 다니며 적은 액수에 눈치를 주는 신부는 항상 근엄한 목소리로 신의 사도 노릇을 하지요. 선생은 일곱 살짜리 아이들에게 "절대 움직이면 안 돼! 아무 소리도 내지 마!"하고 고함을 지르고 불지옥과 죄지은 자의 추악한 영혼을 벌하는 영원한 고통에 대해서만 이야기합니다. 지각하거나 대답을 못한 아이의 손에는 짧고 두툼한 가죽채찍이 떨어지지요.

하느님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는 당장에 지옥에 떨어지리라고 가르치는 그들의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멍청해 보이는지요. 복종을 위해서는 존경을, 존경을 위해서는 모범과 선행이 앞서야 한다는 사실을 모른 채 저런 위협으로 가르치는 종교가 과연 어떤 것일지, 저같은 무종교인은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가 없습니다.

리엄의 눈에 보이는 성상들은 친근하고 성스러운 것이기보다 그저 공포의 대상일 뿐입니다. 공포와 죄의식이 돈독한 믿음의 이유라면 그게 과연 종교인 것이냐고 묻고 싶어지는 장면입니다.

감독은 사회적인 상황에 따라 변화하지 못하는 종교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던 것 같습니다. 어려운 살림에 빚을 내어 아이들의 첫 영성체에 입힐 옷을 장만하여 성당에 앉은 부모들 사이에서 리엄의 아버지가 소리칩니다. 종교는 우리를 더 가난하게 할 뿐이다. 저 아이들이 입은 옷은 내일이면 전당포에 들어가 동전 몇 푼과 바뀔 것이다. 왜 그래야 하는가.

그러나 아버지의 분노는 방향을 잘못 잡았습니다. 유태인 사장집에 던진 화염병은 사장 가족이 아닌 자신의 딸 테레사를 다치게 할 뿐입니다. 리엄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위로로서 빗을 들어 다친 누나의 머리를 빗겨줍니다.

가난한 사람의 유일한 자산이던 명예와 자존심이 사라지고 난 자리에는 증오뿐이지만 그 증오는 되돌아와 자신의 어깨를 내리찍을 뿐입니다. 생존과 자존심. 무엇을 택할 것인가는 실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어린 리엄은 그런 것까지는 알지 못했겠지만 누나의 머리를 빗겨주는 리엄의 모습 위로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을 바라보는 어른들이 심정은 어떤 것일까요.
2001-11-17 14:02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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