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실리2km>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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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가을, 나는 한 아이의 엄마이자 직장주부으로서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직장에서 고된 업무에 시달리다가 퇴근하여 집에 돌아오면 또 엄마이자 며느리, 아내로서의 역할이 기다리고 있었다. 집과 직장을 시계추처럼 왔다갔다하는 나날의 연속. 고달프긴 했지만 견딜 만했다. 어차피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 것이라며 스스로 위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커져가는 허전함은 어떻게 메울 수가 없었다. 안락한 가정과 좋은 직장, 이쁜 딸아이. 모든 것이 다 훌륭했다. 그러나 그것 말고도 내 가슴을 채워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러나 힘겹게 아이를 키워주시는 시어머니를 생각할 때 내 나름대로의 여유를 찾는다는 것도 사치라는 기분이 들었다. 시부모님의 양육 하에 직장을 다닐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복이었다. 영화관, 서점, 커피숍, 술자리, 친구와의 약속, 혼자만의 여행…. 그런 것은 애써 포기한 지 오래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마침 시댁식구들이 모인 자리였다. 집에 놀러온 시누이가 뜻밖에 제안을 했다. “올케, 극장 가본 지 오래되었지? 마침 나한테 영화표가 생겼거든? 가서 모처럼 영화보고 놀다 와. 의진이는 내가 봐줄게. 어때?” 생각지도 않았던 제의에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다행히 딸아이는 시누이를 잘 따랐다. “무슨 영환데요?” “시실리2km." 사실, 그 영화는 평소 내가 좋아하는 성격의 영화가 아니었다. 한마디로 나와는 코드가 맞지 않는 영화였다. 잠시 실망했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이런 좋은 기회가 어디 있으랴. 그리하여 나는 시부모님과 시아주버님 내외를 모시고 함께 극장을 찾았다. 극장에서의 영화관람이라, 도대체 몇 년만이었던가. 옛날 시골사람들이 극장 구경을 온 듯이 신기해하며 극장을 두리번거리며 황홀해했다. 태어나서 극장에 처음 왔을 때도 이렇듯 좋아하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정해진 좌석에 앉고 난 후 주위를 둘러보니 주위는 온통 푸릇푸릇한 학생들과 젊은 연인들뿐이었다. 시아주버님 내외도 상당한 노년(?)층에 속했다. 그럴진대 시부모님을 바라보는 주위 사람들의 의아한 시선이란. "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여기 왜 왔지? 혹시 상영관을 잘못 찾은 거 아냐?"라는 표정들이었다. <시실리2km>는 형님의 추천 아니었으면 내 생애 절대로 빛을 볼 수 없는 영화가 됐을지 모른다. 펑키호러라는 조금은 색다른 장르를 표방한 이 영화는 기괴하면서도 스산한 분위기에 우스꽝스럽고 다소 황당한 설정과 대사로 보는 동안 마음을 졸였다, 풀었다하게 했다. 작품의 줄거리는 이렇다. 조직의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도주하던 석태(권오중분)가 '시실리'라는, 낯설지만 아름다운 시골마을에 불시착하게 된다. 그곳에는 한 순박한 가족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석태를 환대한다. 그러나 뜻밖의 사고로 석태가 갑자기 죽으면서 다이아몬드의 존재를 알게 되는데…. 이후 이 가족들은 돌연 본색을 드러내며 무섭게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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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석태를 쫓아 온 조직의 우두머리 양이(임창정분)는 다이아몬드를 찾기 위해 가족들과 한판 실랑이를 벌인다. 이 과정에서 양이는 소녀 귀신 송이(임은경분)를 통해 이 마을에서 억울한 살인사건이 발생했음을 알게 되고 순박해 보이던 그 가족들이 그 살인사건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음도 알게 된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귀신이나 원혼과 같은 존재가 아닌 물질에 어두운 인간들의 이기심, 욕심임을 차차 깨닫게 된다. 잠시라도 긴장을 늦추지 않게 만드는 사건의 발생, 어딘가 모르게 풍기는 기괴한 분위기, 갑작스런 반전으로 인해 영화의 초반부는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러나 양이 일당이 소녀 귀신을 만나면서부터는 이 영화가 코미디인지, 호러물, 멜로인지 잠시 혼돈스럽게 했다. 급기야 가족들과 양이 일당이 싸우게 되는 후반부에 가서는 뒷심이 많이 딸리는 영화라는 생각마저 들게 만들었다. 귀신이 무섭다고? 우리는 인간들이 더 무서워 그러나 임창정의 탄탄한 연기력과 변희봉, 우현, 권오중 등 조연급들의 맛깔스러운 연기는 영화를 한결 돋보이게 했다. 양이 일당들의 어설픈 몸짓과 우스꽝스런 대화도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무엇보다 펑키호러라는 낯선 장르가 주는 매력이 한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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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덜미가 싸늘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무섭지도 않고 또한 무겁지도 않다. 이 영화의 간간이 등장하는 귀신과 원혼들의 등장은 작품을 더 재미있게 만드는 양념 구실을 한다. 정작 무서운 건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들의 무서운 욕심, 무의식에 잠재해있는 잔인함이다. 그것을 깨닫게 느낀 후에야 '쏴~' 밀려드는 공포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 멍함을 안겨준다. 이것이 이 영화를 비로소 '호러물'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이 드신 분들이나 공포영화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영화가 별 매력 없어 보일 수도 있을 터. 영화관람 내내 배꼽을 잡고 웃어대는 관객들 사이에서 무표정으로 앉아 계셔야만 했던 시부모님에게는 '최악의 영화'일 수밖에 없었다. 영화가 끝난 후 극장에서 나오시며 시아버님은 물으셨다. “너희들은 저 영화가 뭐가 그렇게 재밌다고 웃냐? 난 무슨 말인지도 도통 모르겠더구먼.” “재밌잖아요.” “하이고. 이런 영화인 줄 알았다면 안 봤을 거다.” 곁에 계신 시어머님이 거드셨다. “그러기에 젊은 애들 보는 영화에 왜 늙은이가 가서 본다고 그래요. 그러길.” “새아가. 너도 재밌든?” “네. 뭐 그럭저럭.” “아버님. 동서는 지금 극장에 온 것만으로도 좋다는데요.” 깊은 감동이 없으면 어때? 한바탕 웃으면 되지 그간 나에게 불후의 명작이란 깊은 감동을 주거나 울림을 주는 영화를 의미했다. 물론 이 영화는 깊은 감동을 준다기 보다는 한바탕 웃음을 주는 영화에 가깝다. 그럼에도 나에게 이 영화는 불후의 명작이 되었다. <시실리2km>를 보고 온 날 나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단지 영화를 보아서 기뻤던 것은 아니다. 마치 오랜 시간 물속에 잠수해 있다가 수면으로 올랐을 때 숨통이 트이는 듯 한 그런 시원함, 유쾌함, 또는 일상탈출의 짜릿함에 기뻤다. 사람에게 여가가 왜 필요한지, 휴식이 왜 필요한지 온몸으로 절절이 느낀 하루다. 단 3시간만의 외출만으로도 이렇게 에너지가 샘솟을 수 있다니…….오늘 본 시실리2km는 아마 평생 잊지 못할 영화가 될 것 같다.

덧붙이는 글 <시실리2km> 감독: 신정원 출연:임창정, 권오중, 변희봉, 우 현 등

<남들에게는 졸작, 내게는 불후의 명작?>에 응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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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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