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적 호기심이 왕성했던 그 때 섹스신은 고사하고 키스신 하나 없는 <미술관 옆 동물원>이 재미있을리 없었다.
ⓒ 씨네2000
"섹스 없는 영화를 누가 보냐?"

1999년 겨울 수능시험을 끝마치고서 해방감이 온 몸을 감쌌다. 마땅히 즐길 만한 문화 생활이 없었던 지라 종종 친구들과 극장에 가 영화를 보곤 했다. 그 중 지금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이성재, 심은하 주연의 <미술관 옆 동물원>이었다.

여자들 앞에서 어떻게 폼 잡을까 고민만 했지, 정작 여자애들에게 말 한 마디 못 붙였던 나였기에 그 당시 같이 영화를 보러 간 녀석도 당연히 남자 친구였다.

"야, 이거 우리 누나가 재미있다고 하더라. 이거 보자."

같이 간 친구가 <미술관 옆 동물원>이 재미있다며 같이 보자고 해서 별 생각 없이 따라가긴 했지만 들어가는 순간부터 후회가 되었다. 영화 내용이 남녀간의 사랑을 다룬 것이다 보니 영화를 보러온 관객들은 거의 다 다정히 손을 잡고 들어오는 남녀 커플들이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면 그야말로 '생뚱맞아'보였다. 그런 따가운 시선을 극복하고 자리에 들어가 앉았다. 친구 누나가 했다는 '재미있다!'라는 말 한마디만 굳건히 믿고서. 그러나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에는 '재미있다'며 웃는 친구 녀석에게 주먹을 날리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아야만 했다.

영화 속 주인공 철수(이성재)의 말처럼 섹스 없는 사랑 영화가 재미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땐 그랬다. 성에 대한 호기심이 가장 왕성했고 남자와 여자가 만나면 섹스를 해야 사랑이 완성되는 것이라는 허무맹랑한 생각을 했던 때였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영화 다 끝날 때쯤 가서 키스도 아닌 뽀뽀 한 번 달랑하는 <미술관 옆 동물원>이 그 당시 내게 재미있을 리 없었다.

그렇게 10대의 마지막 겨울을 장식한 그 영화가 결국은 내게 특이한 경험을 하게 해주었다. 대학교 입학 전에는 졸작, 다닐 때는 범작, 졸업 후에는 불후의 명작으로 기억하게 했기 때문이다. <미술관 옆 동물원>은 내게 10대 후반엔 낙제점을 받았다. 그러나 대학교에 들어가 잠시 시나리오 연구 관련 소모임 활동을 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대학교 새내기 시절 <미술관 옆 동몰원> 작업용으로 그만이잖아~!

▲ '사랑이 이렇게 서서히 물들어버릴 수 있는 것인줄은 정말 몰랐어'라는 심은하가 읊었던 이 대사는 작업용으로 수십번을 외워 잊혀지지 않는다.
ⓒ 씨네2000
그 모임에서 첫 번째로 다루어진 것이 묘하게도 <미술관 옆 동물원>이었다. 물론 영화를 봐야 했지만 시나리오 연구반이었기에 영화보다도 시나리오를 더 많이 봐야 했다. 그래서 난 <미술관 옆 동물원>의 시나리오를 적어도 4번 넘게 읽어보았다. 그런데 묘한 것이 영화로 볼 때는 별다른 감흥이 없던 것이 시나리오로 바라보니 보석같은 문장들이 눈에 들어와 쏙쏙 박히는 것이었다.

다소 부끄러운 얘기이긴 하지만 대학교 입학 후 들어와 가장 해보고 싶었던 것이 여자친구를 사귀는 일이었고 그러다보니 어떻게 하면 여자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최대 관심사였다. 어떤 말을 해야 멋있어 보일까라는 다소 엉뚱한 상상을 하던 그 시절, <미술관 옆 동물원>의 대사들은 그야말로 주옥같은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 대사들은 내게 완벽한 사랑의 시나리오를 하나 만들어주었다.

영화 속 대사를 갖고서 갖가지 상상의 나래를 편 것이다. 가장 좋은 상상의 대상은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여자 아이거나 채인 여자 아이였다. 그런 아이라면 평상시부터 오래도록 보아 왔을 것이고 그렇다면 영화 속 이런 대사부터 시작해 그녀에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이라는 게 처음부터 풍덩 빠져버리는 것인 줄만 알았지 이렇게 서서히 물들어 버릴 수 있는 것인 줄은 정말 몰랐어."

은근 슬쩍 이렇게 고백했는데 그 아이가 내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을 경우 그 아이 말을 흔들기 충분한 말도 있었다.

"우주가 깜깜한 건 별들이 짝사랑을 해서래. 아무도 받아주지 않으니까."

만약 그 아이가 눈치 빠르게 왜 자신을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또 넌 왜 그 사람을 좋아하는데 라고 물으면 거기에 대한 답도 물론 있었다.

"사랑은 처음부터 사랑으로 오는 거야."

그 아이가 실연의 상처로 인해 아파할 때 위로해줄 말도 <미술관 옆 동물원>에는 넘쳐났다. 원래 이 때 새로운 사랑이 가장 태어나기 쉽다고 하지 않던가. 철수가 원래 여자친구인 다혜에게 반지를 되돌려 받아 강에 반지를 던지는 장면이 있다. 그 때 춘희(심은하)가 철수에게 이렇게 말한다.

"후회되면 니꺼도 마저 던져. 그러면 둘이 영원히 같이 있게 되잖아."

이 말은 상황에 따라 조금만 바꾸어 응용하면 얼마든지 사용 가능한 대사였다. 꼭 반지가 아니라 시계여도 되고, 버리러 가자는 핑계를 대고 바람 쐬러 가자고 해도 되고 이 얼마나 멋진 대사란 말인가. 바람을 쐬러 교외로 나간 후 둘이서 강이나 바다를 바라보며 앉아 있을 때 그녀에게 이런 대사를 읊어주자.

"마음 속의 아픔은 어찌 하지 못합니다. 계절이 옮겨가듯 제 마음도 옮겨 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어 기분 전환용으로 두 손을 이용해 사각형을 만든 다음 여기 저기 바라보자고 말한다.

"이렇게 하면 세상 사물이 달라 보인다. 한 번 해봐."

그리고 마지막 마무리.

"해보고서 후회하는 게 안 해보고 아쉬운 것보다 낫데. "

종종 이런 상상을 하면서 난 혼자서 키득거리며 좋아했다.(물론 이걸 직접 실험해봤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은 걸 보아서 해보지 않았거나 처참한 실패였던 것 같다) 어쨌든 이런 대사들 덕분에 <미술관 옆 동물원>은 나에게 좋은 영화로 자리 매김하기는 했지만 명작의 위치에까지 올라온 것은 아니었다.

▲ 결혼하고 나서도 연애 시절 간절했던 마음을 지속해 나갈 수 있을까?
ⓒ 씨네2000
20살보다 30살이 가까워지자 사랑이 아닌 다른 것을 말하는 영화로도 느껴져

<미술관 옆 동물원>에 대해 더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건 얼마 전 여자친구가 심은하 컬렉션을 사서 <미술관 옆 동물원>을 다시 보게 되면서이다. 성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한 것도 아니고 여자를 꼬시고 싶어서 안달 난 채로 본 영화가 아닌 그냥 관객으로서 영화를 바라보자 영화는 새롭게 가슴 속을 후벼 파고 들었다.

"나이를 헛먹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아."
"나이를 한 살 더 먹어도 담담할 수 있는 건 한 살 한 살씩 먹어서 그런가봐"

예전 같으면 전혀 귀에 들리지 않을 대사들이 더 귀에 들어와 박혔고 예전처럼 둘이 언제 섹스 하나를 기다리기보다 그 둘의 감정을 쫓아가는 게 더 재미있었다. 지금처럼 막대한 제작비를 들이지도 않았을 테고 영화 속 대부분을 이성재와 심은하 둘의 대사가 중심이 되어 전개되는데도 영화 상영 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인 것 같았다.

그런 시나리오를 쓴 작가도, 또 그 시나리오를 아무 의미 없게 하지 않은 감독도 또 그 이야기를 잘 담아낸 두 주연 배우들까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어떤 이가 <데미안>에 대해 했던 이야기가 <미술관 옆 동물원>을 보면서 떠올랐다는 것이다.

"20대에 <데미안>을 보는 것과 50대에 <데미안>을 보는 건 같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책을 읽는 것과 같다."

10년도 안되는 사이에 2번씩이나 내게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 <미술관 옆 동물원>, 이제 회사원이 되면 또 다른 모습으로 내게 나타날까? 10대 후반에는 졸작, 20대 초반에는 범작, 20대 후반에는 걸작 그렇다면 30대 초반에 <미술관 옆 동물원>은 어떤 모습으로 변해있을지 정말 궁금하다. 적어도 이런 생각만 안 들었으면 좋겠다.

▲ 지금 생각해보면 <미술관 옆 동물원>은 사실 사랑만을 이야기하는 영화는 아니었다.
ⓒ 씨네2000
"얼씨구, 좋기도 하겠다. 결혼해봐라. 니들 또 만날 싸운다."

이런 생각이 들면 어렵게 내게 명작의 위치까지 올라온 <미술관 옆 동물원>인데 너무 불쌍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런 인생을 살고 있을 내 모습도 말이다. 그런 생각 들지 않게 내 곁에 있는 사람 열심히 사랑하고 살아보련다.

덧붙이는 글 | <남들에겐 졸작, 내게는 불후의 명작> 응모글 입니다.

2006-01-21 19:35 ⓒ 2007 OhmyNews
덧붙이는 글 <남들에겐 졸작, 내게는 불후의 명작> 응모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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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넓게 보고 싶어 시민기자 활동 하고 있습니다. 영화와 여행 책 등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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