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영필림
영화 <고래사냥>을 본 건 중학교 2학년 때 중간고사를 치른 후 단체관람에서다. 이날 영화가 끝나고 영화관을 나왔을 때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몇 걸음 걷지 않아 여름 소나기는 속옷까지 다 젖게 만들었다. 물방울 뚝뚝 떨어뜨리며 버스를 타면 다른 승객들한테 피해 주고, 이미 다 젖은 거 그냥 맞으며 걸어가자고 친구와 의견일치를 보았다. 네 시간이 넘는 긴 길을 쉬지도 않고 걸었지만 조금도 힘든 줄 몰랐다. 오히려 묘한 행복감에 빠져들었다. 그 기분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몸도 마음도 자유롭고 가벼웠다. 감옥에서 방금 빠져나온 사람이나 군에서 갓 제대한 사람이 아마도 내가 느낀 비슷한 종류의 자유를 경험할 것 같다. 여전히 내 처지는 중간고사가 끝나면 기말고사가 기다리고 있고, 크게는 고등학교 입학 관문인 연합고사의 지배를 받고 있는 꼼짝달싹할 수 없는 수험생의 신분이었지만, 적어도 영화관에서 나왔을 때만큼은 그런 내 처지를 다 잊어버리고 영화 속 병태와 민우가 돼 그들의 자유를 경험하고 있었다. 자유롭다는 것이 이토록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구나, 처음으로 그 자유의 맛을 봤다. 영화 속의 병태처럼 집을 나가 마음껏 돌아다니다보면 민우와 같은 그런 철저한 자유주의자에다 휴머니스트인 그런 사람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결국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해버렸다. “우리 가출할래?” 친구는 가출하더라도 연합고사는 끝나고 가출하자고 했다.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친 후 방학 동안 하자는 그런 뜻이었다. 병태가 실컷 돌아다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것처럼 가출은 하더라도 돌아올 곳은 정해놓고 가자는 그런 뜻이었다. 그래서 우리의 가출 계획은 연합고사가 끝나는 시점으로 미뤄졌다. 연합고사 치고 방학이 되면 영화 속 병태와 민우처럼 집을 나가 시장골목도 돌아다니고 낯선 지방을 향해 기차에도 오르고 이름 없는 들길도 걸어보고 집시나 보헤미안이 돼 산천을 떠도는 나를 상상해보면 정말 소름이 돋을 정도로 행복해졌다. 물론 친구와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영화의 두 주인공 병태(김수철 )와 민우(안성기)
ⓒ 삼영필림
<고래사냥>(1984)은 임권택, 이장호 감독과 함께 80년대를 대표하는 감독이라 할 수 있는 배창호 감독의 작품으로 당시의 톱스타였던 안성기씨와 이미숙씨가 '민우'와 '춘자' 역을 맡고, 가수였던 김수철씨가 '병태' 역을 맡아 열연했다. 원작은 소설가 최인호씨의 작품으로 훌륭한 원작에 뛰어난 배우와 연출로 당시에는 상당한 인기를 얻었었다. 영화에서 보면 병태가 가출한 이유는 고래를 찾기 위해서다. 고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영화에서는 정확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줄거리를 통해 나름대로 감을 잡을 뿐이다. 병태와 민우가 불쌍한 벙어리 창녀인 춘자를 사창가에서 탈출시켜 고향으로 데려다 준다는 데서 군부시대인 당시의 사정을 고려해 억압받는 민중을 해방시켜 자유가 보장되는 민주주의를 실현한다는 식의 정치적 해석도 가능하고, 불우한 이웃에 대한 관심과 사랑의 실천이라고 의미를 두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영화에서 얻은 감정은 자유가 안겨주는 기쁨을 맛보는 것이었다. 이 '자유'가 주는 행복을 <고래사냥> 만큼 잘 표현해낸 영화도 없다고 생각한다. 병태는 집을 나오고 학교로부터도 벗어나 거리를 방황한다. 그는 어느 곳에도 소속돼 있지 않다. 그러나 그에게서는 무소속에서 오는 두려움이나 외로움을 찾아볼 수가 없다. 왜냐면 그에게는 든든하고 신뢰할 만한 안내자가 있기 때문이다. 안내자가 있는 방황은 두려울 것도 외로울 것도 없는 그야말로 마음을 탁 놓고 즐기면 되는 그런 자유다. 내 친구가 제안한 것처럼 돌아올 곳을 미리 정해놓고 하는 가출처럼, 출구를 미리 만들어놓은 감금처럼 '방황'이라는 것을 즐기는 차원의 그런 방황인 것이다. 그리고 병태의 안내자인 민우는 '자유'를 몸소 실천하는 그런 인물이다. 그래서 이 영화 <고래사냥>은 <빠삐용>처럼 '자유'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빠삐용> 이상으로 자유의 소중함을 가르쳐주고, 자유의지를 일깨운 영화가 됐다. 16살의 난 이런 병태가 누리는 자유가 현실적이라고 생각했었다. 민우와 같은 인물은 집과 학교만 벗어나면 어디서든 만날 수가 있고, 세상은 이런 인물들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래사냥>을 보면서 작가나 연출가 의도와 관계없이 난 엉뚱하게도 학교의 억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병태처럼 어느 날 홀연히 학교를 벗어나면 해방된 노예처럼 자유로워지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착각에 빠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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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내면의 문제 <고래사냥>이 좋은 또 한 가지 이유는 고래사냥에는 굉장히 매력적인 인물 '민우'가 나온다는 것이다. 아직까지 영화에서건 소설에서건 현실에서건 민우 이상 가는 훌륭한 사람은 보지를 못했다. 그는 내가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적인 인물이다. 거지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는 조금도 초라해 보이지 않는다. 왜냐면 거지의 삶을 선택당한 게 아니라 선택했기에 걸인이지만 그에게는 당당함이 느껴진다. 다른 삶을 선택할 수도 있지만 무소유를 실현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고 철저하게 자유로울 수 있는 거지의 삶을 선택한 그는 실제 그런 모양세로 살아간다. 자유를 실현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에게는 이중의 감정이 느껴진다. 무소유의 삶을 실현한다는 데서 성자와 같은 초연한 감정이 느껴지지만 성자 보다는 인간적인 냄새가 나는 그런 인물이다. <만다라>에 나오는 중생에 대한 연민 때문에 아파하는 '지산스님' 캐릭터와 닮은 것 같은데, 그 보다는 훨씬 밝고 가벼운 캐릭터다. 밝다는 것은 좋은 의미의 가벼움이다. 그야말로 자유로움을 표현하는데 가장 적절한 캐릭터였다. 이 인물은 거지가 아니라 다른 옷을 입어도 여전히 자유롭고 여유 있고 인간미 넘치고 따뜻하고 유머러스한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인물이다. 안성기씨 특유의 인간미와 종교적 느낌이 '민우'라는 인물과 굉장히 잘 어울리면서 내 안에 거부할 수 없는 이상형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학창시절 난 안성기씨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에 대한 나의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을 시로 만들어 교내 시화전에 응모하기도 했다. '아저씨에게'라는 좀 낯간지러운 제목의 시였는데 문학 깨나 한다는 애들이 '참신한 시'니 '독특한 시'니 하면서 치켜세우자 우쭐해져서 감히 시화전에 내보냈는데 아쉽게도 탈락했던 경험이 있다. <고래사냥>이 개봉하고 산천이 두 번이나 바뀌었다. 가출만 하면 자유의 몸이 되리라 꿈꾸던 철없던 소녀는 이제 아줌마가 됐다. 어른이 된 지금도 '자유 의지'는 그때나 다름없이 강하다. 그러나 방향은 좀 달라졌다. 그때는 내가 처한 현실인 집과 학교를 벗어나면 금방 자유로워지고 제대로 숨을 좀 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이 바뀌어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됐다.

덧붙이는 글 영화, 내게는 불후의 명작? 공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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