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의 중심 인물인 칼(스티브 부세미)와 게어( 피터스토메어)
ⓒ 폴리그램필름 엔터테인먼트,
고등학교 때 문학반 애들은 모두들 어려운 시를 쓰려고 애썼었다. '대지가 담배를 피운다' 이런 식으로 최대한 연관성이 희박한 단어들을 끼워 맞춰 암호를 다루듯 어렵게 시를 만들어냈었다.

코엔형제의 영화 <파고>가 내게는 그렇게 쓴 시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고>에는 많은 수수께끼가 숨어있다. 그 수수께끼 때문에 영화가 그럴 듯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수수께끼가 해결됐을 때 묘한 배신감이 든다는 것이다.

왜냐면 난해해 보이는 수수께끼가 영화에서는 그냥 어렵게 꼬아놓은 문제일 뿐, 그 문제 속에 영화를 새롭게 이해할 만한 중심 문장이 숨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영화를 보면서 얻게 된 결론의 부연설명일 뿐, 이런 장면은 빠진다 하여도 영화의 흐름에 아무런 문제될 것 없는 그런 장면임에도 이상하게 이런 장면에 잔득 힘이 들어가 있다.

제목에서부터 감독의 '수수께끼 내기' 강박증이 읽혔다. <파고>라는 제목은 사건의 배경이 되는 지명을 뜻하기도 하고, 작은 사건에서 시작된 사건이 눈 덩이처럼 커져 겉잡을 수 없게 됐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한다.

또한 지명으로서 '파고'에도 또 다른 의미가 내포돼 있다. 미국과 캐나다의 국경도시인 미국령 파고는 미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주목받는 도시이다. 그런 도시를 살인사건의 배경으로 삼았다는 데서는 인간의 욕망이 천국을 지옥으로 만든다는 훈계조의 메시지가 읽힌다.

제목에서 시작한 보물찾기 게임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지속된다. 그러나 감독이 숨겨둔 상징을 찾아내는 것을 그만둔다면 영화는 비교적 단순하다.

1987년 미국 미네소타주에서 발생한 유괴사건에 착안해 만든 <파고>는 빚에 쪼들린 한 남자가 돈 많은 장인에게서 돈을 얻어 내려고 자신의 아내를 유괴하며 시작한 일이 나중에 눈덩이처럼 커져 겉잡을 수 없는 상태가 된다는 그런 내용이다. 주제 또한 현대사회의 황금만능주의가 비극을 부른다는 그런 뻔한 결론이다.

이런 뻔한 결론에 단순한 이야기가 1996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으로 거듭난 까닭은 바로 곳곳에 상징을 배치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자신의 생각을 상징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단순한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든 기교를 부렸다.

경찰 마지가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오랜만에 만난 동창은 마지에게 이성적으로 접근하면서 아내가 죽어서 외로워서 그렇다고 울먹였다. 관객인 우리가 봤을 때는 오랜만에 본 동창에게 그렇게 이상하게 구는 남자가 정신적으로 뭔가 문제가 있음을 알겠는데도, 예리해야할 경찰 마지는 오히려 그걸 눈치 채지 못한다. 이런 장면은 상식 이상으로 무능한 경찰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다.

그러나 영화를 좀 더 들여다봤을 때 상징이 영화의 본 바탕은 바꾸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야기는 단순한 살인사건일 뿐이다. 시간의 순서에 따라 순차적으로 살인사건이 일어나는데, 영화는 그것을 그대로 쫓아가고 있다. 단조롭고 지겨울 수 있는 이런 구성에 활력을 집어넣는 역할을 도끼를 든 농부의 조각상과 같은 상징이 하고 있는 것이다.

ⓒ <파고>포스터
그리고 이 영화의 가장 큰 결점은 사이보그형 인간 게어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어가 빠진 <파고>는 '터미네이터'가 빠진 <터미네이터>가 돼버린다.

멍청한 표정을 지은 채 말 한 마디 안 하고 앉아 있어서 오히려 끊임없이 조잘거리는 칼이 이들 범죄조직의 리더고, 게어는 조수 정도로 얕보이는데, 어느 순간 표정 한 번 바뀌지 않은 채 사람을 죽인다. 이 인물은 <터미네이터>의 사이보그를 닮은 것 같은 캐릭터다. '위험하면 죽여라'라는 코드가 입력돼 있어 이 주문에만 반응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사람 냄새가 나지 않고 사이보그를 연상하게 하는 그런 인물이다.

사이보그로서의 그의 특징은 동료인 칼과 비교되면서 선명하게 나타난다. 같은 범죄자지만 칼은 재미있을 때 깔깔거리며 웃고, 심심하면 수다를 떨면서 지루함을 극복하려고 애쓰고, 텔레비전 화면이 잘 안 나올 때는 화를 내면서 텔레비전을 고치려고 애쓰는 등 매순간 감정의 변화를 경험하는 등 감정적인 모습을 많이 보인다.

허나 게어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시종일관 무표정이다. 그의 캐릭터는 사이버그에서 차용한 것이 분명한 그런 인물이다. 게어에 대해 영화에서는 다른 사람의 입을 빌려 '무의식적으로 행동한다'고 했다. 이성이나 감정의 지배를 받지 않음을 명확하게 표현한 것이다.

사이보그형 캐릭터는 분명 새로운 유형이고,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기에 충분한 유형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재미있게 보게 만든, 영화에 긴장감을 불어놓은 일등공신으로 게어를 들 수가 있다. 허나 영화를 세 번쯤 보자 이 인물이 갖는 한계성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가 있었다. 이 인물의 한계는 현실적으로 이런 인물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모습을 한 사이보그일 뿐 이런 인물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 이 영화의 한계로 나타났다.

매우 자극적인 인물이지만 지나치게 단순하기에 그 바닥이 쉽게 드러난다. 게어에 대한 신비감이 사라지면서 영화는 급격하게 추락하는 일면을 갖고 있다. 게어에게 지나치게 의존한 영화였는데 알고 보니 게어는 현실성과 깊이가 부족한 사이보그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터미네이터> 식의 살인게임과 뭔가 있는 것처럼 보이고 싶어 하는 예술영화들이 즐겨 사용하는 상징적 화면 끼워넣기로 이 둘이 만나면서 묘한 시너지 효과가 발생한 케이스라고 본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영화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사람 냄새나는 영화를 좋아하는 편인데, 나에게서는 <파고>는 내용은 별거 아니면서 기교만 잔득 부린 그런 영화로 비쳐졌다.

덧붙이는 글 | 남에게는 졸작, 내게는 불후의 명작(남들에겐 불후의 명작, 내게는 졸작) 응모

2006-01-16 16:28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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