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나는 순정 만화책 보기를 좋아했다.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나는 만화책을 고르기 전 참 오랫동안 어떤 것을 볼까 고민하곤 했다. 뭘 그리 심각하게 고민하였는지, 만화책 한 권 빌리면서 이것저것 견주어 보던 버릇을 생각하면 피식 웃음이 난다. 그 이후 나는 중2때 즈음부터 만화책에서 손을 떼게 되었지만, 세 살 버릇은 여든까지 간다더니, 아직도 그 버릇은 온전히 남아있다.

주말에 휴식차 영화나 보려고 하면, 오랫동안 고민의 고민을 한 끝에 어렵사리 영화 한편을 골라서 보게 되니 말이다. 직접 전체를 보고 선택할 수 없는 노릇이니 영화 안내 홈페이지에 들어가보기도 하고 꼼꼼히 나름의 분석을 하기도 한다. 그런 째려봄을 거친 영화들이 내게 감동을 선사해 줄 때의 희열은 예전 구석에 박혀있던 만화책이 재미있을 때의 감동과 버금간다. 특히나 그 영화가 흥행하지 못한 영화였을 때, 감동은 딱 '2배'가 된다.

ⓒ 정미선
나는 며칠 전 윤태용 감독의 영화 <소년, 천국에 가다>를 보았다. 영화배우로서 제법 자리를 굳힌 박해일과 염정아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연기력 우수한 배우들에게 주목하기 이전에 윤태용 감독과 함께 박찬욱 감독과 이무영 감독이 시나리오를 만들었다는데 먼저 주목해야 할 듯싶다.

하지만 명성을 얻을 법 했던 이 영화의 결과는 개봉 첫 주 관객 누계 23만4천여 명. 개봉한 지 한 주 만에 10위 권 밖으로 밀려난, 흔히 말하는 '흥행 실패작'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선택하여 보고 난 후, 나는 마치 숨은 진주를 찾아낸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소년이 천국에 다녀 온 신기한 이야기

우선, 시종일관 유쾌함을 선사하려는 이 영화의 스토리는 대충 이러하다. 그 주인공의 이름은 '배네모'. 13살 네모는 미혼모 아들로 태어나 어머니까지 잃었으며 나이 많은 미혼모 '이부자'를 사랑하게 되는 기구한 인생을 품게 된다. 하지만 이보다 더 기가 막히는 것은 이부자의 아들을 구하려다가 저승사자의 실수로 네모가 일찍 죽는다는 것이다.

네모가 천국에 간 건 80년이나 일렀기 때문에 하루를 일년처럼 살기로 저승사자와 약속하고 20일 후 다시 지상으로 내려가게 된다. 지상으로 돌아온 네모의 지금 나이는 33살, 네모는 60일 후에 죽는 시한부 인생이 된다. 남은 60일의 삶 동안, 네모는 부자와 멋진 로맨스를 만든다. 이쯤에서 눈치 챌 수 있듯이 이 영화의 장르는 판타지 로맨스. 네모가 천국에 갔다 온 묘한 이야기는 '황당함'과 '두근거림'이란 두 가지 코드를 적절히 섞어가며 진행된다.

아픔과 순수를 품은 13살, '네모'

13살 배네모, 이 녀석은 그 수상한 이름처럼 범상치 않은 행동을 했다. 나는 그 모습에 미처 적응하지 못하여 웃을까 말까를 2초 정도 고민하는 공백상태를 겪기도 하였지만, 이 아이는 분명 내게 강력한 흡입력을 발휘하였다. 천국으로 가기 전, 그러니까 13살이었던 어린 시절 네모는 껄렁 껄렁한 자세와 말투를 유지하는 전형적인 애늙은이였다. 하지만 굉장히 희화(戱畵)되어 묘사된 네모의 모습을 다시 되짚어 보면 그 행동 뒤에는 완벽하지 않았던 환경 속에서 자란 내적 아픔이 숨겨져 있음을 엿볼 수 있었다.

바람이 휘몰던 어느날 밤 그 어느날 밤에
떨어진 꽃잎처럼 나는 태어났다네
내 눈에 보이던 아름다운 세상 잊을 수가 없어
가엾은 어머니 왜 날 낳으셨나요
봄 여름 가을이 또 겨울이 수없이 지나도
뒹구는 낙엽처럼 나는 외로웠다네
- 이용복 가수가 부른 '1943년 3월 4일생'


ⓒ 정미선
위는 네모가 평소 입에 붙이고 살던 노래이다. 이를 듣다 보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조소하는 건지 어린 녀석이 깊은 상처를 입은 것 같아 13살 아이의 재롱이 꽤나 씁쓸해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모가 내게 기특하게 보인 이유는 자신의 상황을 비관하지 않는 긍정적 성격 그리고 13살의 아이가 가질 수 있는 '순수함' 때문이다. 특히나, 이 녀석이 보여주었던 이부자에 대한 사랑을 보면 이 점을 확실히 느낄 수 있다.

부모님의 지난 러브레터를 그대로 이부자에게 빼뚤빼뚤한 글씨로 옮겨 적어 주기도 하며, 이부자의 치마 속을 보려는 동네형들을 보고 주먹을 불끈 쥐고 나섰다가 한껏 두들겨 맞기도 한다. 또한 말쑥하게 차려 입고 이부자 앞에 서서, "결혼한다고 약속해주이소~! 10년이고 20년이고 기다릴 수 있습니더!"라며 반지를 끼워주기도 한다.

이 뿐만이 아니다. 극장가에서 불이나 이부자의 아들이 위험한 상황에 놓여있을 때에 장차 아빠가 될 자신이 아들을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 하나로 불 속으로 뛰어든 네모였다. 그 어떤 티끌하나 찾을 수 없는 순수함이 자아낸 맹목적 사랑이었다.

아직도 순수를 품은 33살, '네모'

천국에 한 번 갔다 오고 나니, 볼살이 통통하던 네모가 얼굴 훤한 박해일로 변해왔다. 몸은 33살이면서 여전히 거짓말 살살하며 히죽거리는 장난꾸러기는 사실 부담스러울 수도 있었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건지 놀리는 건지 심기 불편한 멘트도 사정없이 날리니 말이다.

네모: "키스하면 안 외로울 건데… 나 이제 잘해요!"

하지만 33살 네모의 넉살은 그가 '순수'하기에 라는 이유로 어느 정도 용서가 되었으며 특히 13살이 품었던 순애보가 33살 몸과 나이에 그대로 옮겨 짐을 보며 나는 점점 '배네모'라는 인물에 빠져들 수 있었다. 예전 못된 형들 앞에 주저 없이 나서듯, 술집에서 남자들과 시비가 붙은 이부자를 위해 발과 주먹을 날리는 왕자님은 네모이며, 다른 남자에게 고백 받는 이부자의 앞에 마징가 제트 가면을 쓴 채로 나타나, 분위기 깨는 남정네 역시 네모였다.

이런 13살 순수를 품은 33살의 연정을 보며 누군가는 유치한 비현실적 사랑일 뿐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도 말릴 수 없었던 그의 맹목적 사랑이야말로 남자에게 버림받아 생긴 미혼모 이부자의 상처에 강력하게 약발이 통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소년, 천국에 가다

이들의 알콩달콩한 러브스토리를 흐믓하게 지켜보는 시간은 내게 그리 많이 허락되지 않았다. 네모의 시간은 그 누구보다 빠르게 흘러가기에, 영화의 러닝타임이 점점 후반부로 가까워질 즈음 네모의 겉 모습은 많이 달라졌다. 그리고 부자의 상처에 새 살을 돋게 했던 네모의 순수한 사랑 역시 시간이 흐름과 동시에 그 깊이가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그것이 네모가 나이를 날로 먹지 않아서인지, 사랑을 해서인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어쨌든 네모는 겉 모습만 크는 것이 아니었다.

평생토록 보지 못하였던 자신의 친아버지에게 찾아가기도 하고, 자신 없이도 부자가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이것 저것 꼼꼼하게 챙기기도 한다. 더군다나 다시 어린 시절의 모습으로 되돌려 주겠다는 저승 사자의 제안도 기철이(이부자의 아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거절까지 한 네모다. 어찌 보면 그가 이만큼 성숙해지고 있기에 그의 죽음이 내게 더욱 안타깝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순이(네모 소꿉 친구): "…좋나?"
네모: "…그래, 행복하데이…."
부자: "네모야…. 나중에…봐…."
네모: "딥다…나중에…보입시더…."

해피엔딩인지 아닌지 그 갈피를 잡지 못할 때, 나는 이 영화의 의문스러웠던 인트로가 생각났다. 이부자(염정아)와 배네모(박해일)가 예쁜 집에서 열렬이 키스를 하고 그들을 익숙한 눈초리로 바라보며 지나가는 두 남녀 꼬마는 날개를 펴고 구름 속을 날아다니는 장면이었다.

나는 처음 동화적 풍경의 이해 못 할 인트로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었으나, 영화가 끝난 후에는 그 장면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마침내, 소년 네모는 천국에 간 것이었다. 물론, 그의 남다른 사랑 역시 '-ing'의 상태로 말이다.

에필로그…

여기까지, 내 눈을 사로잡은 영화 속 주인공 '배네모'에 대한 이야기였다. 남들처럼 둥글게 살아가기보다는 모나게 살아가라고 붙여진 네모라는 이름처럼, 그의 인생살이는 참 파란만장 했다. 기구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던 그의 삶, 아마 흥행 대열에 서지 못하였기에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희미하게 남아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디선가 매우 유쾌한 사람을 본다면 그에게 숨겨진 아픔을 찾으려 할 테고, 어디선가 네모라는 특이한 이름을 또다시 만나게 된다면, 오래 전 친구를 다시 만난 것처럼 매우 반가워 할 것이다. 아픔과 순수를 동시에 가졌던 네모를 떠올리며 말이다.

요즘 날씨가 참 춥다. 온몸이 얼어붙을 것 같은 겨울 바람이 불고 있지만, 맘 속만이라도 '봄'처럼 보내길 바라며, 당신과 네모와의 따뜻한 만남을 주선한다. 특히나 당신이 요즘 유쾌함에 굶주려 있거나 증발해버린 순수를 되찾고 싶어 한다면, 두말 말고 네모에게 찾아가보길 '강추' 한다!

덧붙이는 글 | '남들에겐 졸작, 내게는 불후의 명작?' 응모기사

2006-01-19 15:42 ⓒ 2007 OhmyNews
덧붙이는 글 '남들에겐 졸작, 내게는 불후의 명작?' 응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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