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구>와 <완령옥>, <레드 로즈 화이트 로즈> 같은 여러 걸출한 작품에서 연출을 담당했던 중국 감독 관금붕(스탠리 콴)이 신작 <장한가>를 들고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다. 이 작품에서 주연을 맡았던 홍콩 스타 정수문(새미 청)도 동행했다.

관금붕은 중국과 홍콩의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 작가주의적 영화를 자주 만들어온 감독이다. 1957년생인 그는 왕가위와 함께 홍콩 포스트 뉴웨이브를 이끄는 선두주자로서 자주 거론된다. 국내에는 비록 화려한 스타일리스트로 젊은 팬들의 인지도가 높은 왕가위에 비해 덜 알려졌지만, 그는 상처받고 소외된 인간의 비극적 내면을 표현하는 연출력으로 주목받은 바 있다.

▲ <장한가>, 1940년대에서 80년대에 이르는 격동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 여인의 파란만장한 삶을 관조한다.
ⓒ PIFF
<비정성시> 같은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가 주로 대만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다면, 관금붕의 영화는 주대륙의 역사에 주목한다. 동시대의 사회와 역사, 제도와 억압이 황폐화 시키는 인간의 내면과 정체성에 대한 질문은 그의 영화를 관통하는 일관된 키워드이다. 장만옥을 국제적인 여배우로 만들어낸 영화 <완령옥>은 그의 스타일과 주제의식을 상징하는 대표작이기도 하다.

관금붕의 새 영화 <장한가>는 중국의 인기작가 왕안위의 동명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하여 1940년대에서 8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의 중국 상하이를 배경으로 격동의 세월을 살아갔던 한 여자의 파란만장한 삶을 조명한다.

영화의 주인공 정기요(정수문)는 사랑과 성공에 대하여 강한 욕망과 집념을 가진 여성이다. 10대 후반에 참가하게 된 미스 상하이 대회에서 2위로 입상한 그녀는, 중국 국민당의 간부였던 이충덕의 정부로 들어가게 된다.

영화는 그녀가 평생에 걸쳐 만나게 되는 4명의 남자와의 기묘한 인연을 순차적으로 보여주며 그녀의 삶이 화려한 비상에서 나락으로 떨어지는 흥망성쇠의 과정을 약간의 거리를 두고 펼쳐나간다. 그녀의 주위에 있던 남자들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버리고 떠나간다. 홀로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는 그녀의 희망은 각박한 현실 속에 묻혀져간다.

10대 후반부터 갑작스런 최후를 맞이하는 50대에 이르기까지. 무려 40여년의 세월을 넘나들면서 벌어지는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2시간 안에 담아내려다보니 호흡이 가쁘다. 초반부터 인물들의 디테일한 갈등구조나 배경 설명이 생략되어, 사전 이해가 없는 관객들은 초반 영화를 따라잡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정기요 역을 연기한 주인공 정수문의 뛰어난 연기가 자칫 산만해지기 쉬운 이야기에 중심을 불어넣는다. 도발적인 정부에서 억척스러운 어머니, 다시 사랑을 갈구하는 연약한 여성에 이르기까지 복합적인 내면을 드러내는 정기요의 캐릭터는 시대의 격동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캐릭터다. 평생 곁에서 그녀의 삶을 지켜보면서도 흠모의 정을 드러내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방관할 수밖에 없는 관찰자로는 양가휘가 열연했다.

▲ 부산 국제영화제를 찾은 관금붕 감독과 주연 배우 정수문
ⓒ PIFF
"정기요는 사랑을 갈구하는 캐릭터"

11일 오후 4시 20분경 메가박스에서 열린 <장한가>의 공식 상영이 끝난 다음, 관금붕 감독과 주연배우 정수문이 함께 한 관객과의 대화가 열렸다.

홍콩을 대표하는 가수 겸 영화배우이자 뛰어난 패션리더이기도 한 정수문은 영화 속에서 보여준 강렬한 캐릭터와는 대조적으로, 아담하고 작은 체구에 30대의 나이에도 여전히 귀여운 미소가 돋보이는 스타였다.

진지하고 성실한 이미지의 관금붕 감독은 한국 관객들과의 대화에서 시종일관 적극적이고 겸손한 대답으로 눈길을 끌었다. 중화권의 거장들인 허우 샤오시엔과 왕가위와의 비교에서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에서부터, 예정된 시간을 넘기면서도 '질문을 더 받겠다'며 관객들을 먼저 배려하는 성실한 자세로 호평을 받았다.

- <장한가>는 엄청나게 1940년대에서 80년에 이르기까지 굉장히 긴 시대를 아우르는 이야기이다
관금붕(이하 관): "전작인 <완령옥>이 1920~1930년대 상하이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라면, 이번 작품은 시대가 좀더 넓어졌다. 당시 상하이는 자본주의의 유입으로 인하여 상류사회의 문화가 발달하고 정치적-사회적으로 굉장히 혼란한 시대였다. 영화의 디테일한 측면은 100퍼센트 실화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 속에서 시대를 살아가는 한 여인의 파란만장한 삶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이 영화 속에서 역사는 배경으로 작용하지만 이야기의 전면에 두드러지지는 않는다. 방대한 시대를 제한된 시간 안에 영화 속에 녹여낸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작업이다. 그래서 보다 개인의 삶을 그려내는 데 집중하여 역사적인 배경이 그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도록 했다."

- 역사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의 큰 흐름은 허우샤오시엔의 <비정성시>를, 영화의 복고적 스타일은 왕가위의 <화양연화>를 연상시킨다
: "두 분 모두 개인적으로 내가 굉장히 존경하는 감독들이다. 개인적으로 인물이 시대의 격동 속에 놓여 있음으로 벌어지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허우샤오시엔은 대만의 역사를 주로 다루는 감독이고, 왕가위는 <화양연화>가 60년대 홍콩을 무대로 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형식이나 미학적인 측면에서 다소 유사하게 느낄 수는 있어도 본질은 각자 상이한 이야기로 생각한다."

▲ 관금붕 감독과 정수문은 '정기요의 사랑은 그 순간만큼은 진심이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 PIFF
- 정수문 씨는 주로 상업적인 색깔이 짙은 영화에 자주 출연해왔는데, 이 작품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줬다
정수문(이하 정): "개인적으로 그동안 제가 코미디 영화같은 상업 영화가 자주 출연해왔다는 것을 기억하실 것이다. 하지만 배우는 어떤 배역이든 역할에 따라 변신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본다. 정기요는 대단히 복합적인 면을 갖춘 캐릭터로 10대에서 50대까지 방대한 시절을 넘나드는지라 그때그때 몰입하는 데 어려움이 다소 있었다. 하지만 정기요의 성향 중에서 나와 비슷한 부분도 있었고, 감독님의 조언도 있어서 전반적인 어려움은 크지 않았다."

- 주인공의 애정관이 다소 모호한 것 같다. 극중에서 만난 4명의 남자를 과연 진정 사랑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남자들을 속이고 이용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 "정기요는 영화에 나온 모든 남자들을 사랑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남자를 이용하는 것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적어도 각 남자들과 만나는 그 순간만큼은 그 남자들을 사랑한 마음이 진심이었다고 본다."

: "정기요는 여러 가지 다층적인 면을 갖춘 캐릭터다. 당시에 그녀가 처한 입장은 현실적인 고민을 배제할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물론 남자를 만날 때에도 과연 이 남자가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하는 고려를 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남자들을 이용만 하거나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 감독이 주연배우에게 어떤 식의 연기주문을 했는지
: "매번 영화마다 감독님의 기대치가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번 작품에서는 특히 많은 시대를 넘나드는 만큼 감정의 세밀한 부분을 표현해달라고 주문하셨다. 다행히 감독님은 감정이 풍부한 분이라서 저에게 많은 조언을 주셨고, 이 작품을 통해서 연기와 몰입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 다음 작품에 대한 계획은
: "최근 사망한 배우 매염방과 관련된 전기 영화가 될 것같다. 현재 시나리오 완성 단계에 있는데 일정이 확실히 결정된 것은 아직 없다. <장한가>도 굉장히 스케일이 큰 작품이라서 힘든 부분이 많았는데 이 작품을 끝내자마자 또 더 규모가 큰 영화를 시도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서 준비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2005-10-12 15:50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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