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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시대, 조종을 울리자

국가보안법은 반세기 동안 한반도 남단을 옥죄어왔습니다. 그러나 헌법에도 명시된 사상의 자유를 자의적인 법의 잣대로 재단하는 '야만의 시대'는 이제 끝내야 합니다. <오마이뉴스>는 17대 국회 개원을 앞두고 더욱 높아진 국보법 폐지 여론에 귀기울이며, 목요특별기획으로 [야만의 시대, 조종(弔鐘)을 울리자]를 마련했습니다.

15회 안팎의 이번 기획을 통해 <오마이뉴스>는 국가보안법의 폐해와 그로 인한 폐지 당위성을 집중 탐구할 예정입니다. 특히 이 기간 동안 그간 국보법 폐지를 위해 노력해온 관련단체들의 도움을 받아 전문가 릴레이 기고, 국보법 피해사례 발굴 등 다양한 형태의 관련기사를 내보낼 예정입니다. 네티즌 여러분들의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 그간의 판례에서 우리 법원이 '이적표현물'로 인정한 책들. 그 종류가 1220여종에 이른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그런 게 아직도 있습니까? 정말 그렇습니까?"

지난 25일 낮 서울 광화문 근처의 한 대형서점. 30대 후반의 직장인 최아무개(37)씨는 기자가 들이민 '책 리스트'를 훑어본 후 리스트와 기자의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거듭 반문했다.

기자가 최씨에게 내민 것은 이른바 '금서목록'. 지난 1974년부터 우리 법원이 적, 다시 말해 '북한공산집단'을 이롭게 하는 책이라고 인정한 '이적표현물' 리스트 중 일부이다.

친구에게 선물할 책을 보러 나왔다는 최씨는 "(이런 걸 보니) 아직도 세상이 변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며 "80∼90년대에 (정권에 대해) 가졌던 실망감이 연속되는 기분"이라고 허탈하게 말했다.

21세기에도 존재하는 '금서목록'... 리영희·마르크스 저서면 모두 이적표현물?

최씨에게 보여준 목록을 갓 입학한 대학 새내기에게도 내밀어 보았다. 같은 날 오후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 앞에서 만난 대학생 인성주(18·성균관대 1)·김수영(19·성균관대 1)씨도 자못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인씨는 "80년대도 아니고 21세기에도 그런 것들이 존재하느냐"면서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김씨도 같은 반응이다. 그는 "이것들이 소위 말하는 '빨간 책'이라는 것이냐, 어떤 책을 읽고 사상이나 이념을 받아들일지 여부는 개인의 자유인데 이를 국가에서 규제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혀를 내둘렀다.

학부제로 인한 대규모 교양 강의로는 불만족스러울 것 같아 인문사회과학 연구학회에 가입했다는 김씨는 "목록 중에는 1학년을 대상으로 한 교양 강의에서도 언급되고 있는 책도 있다"고 어리둥절해했다.

그간 우리 법원은 1000여개가 훌쩍 넘는 책과 문건에 '빨간딱지'를 붙였다. 법무부가 지난 2001년 인권운동사랑방의 정보공개청구로 공개한 '판례에 나타난 이적표현물' 목록에는 일반인의 상식을 뛰어넘는 수준의 책들이 다수 포함돼있다.

무려 1220여종에 이르는 이 리스트 중에는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이라 일컬어지는 리영희 한양대 명예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8억 인과의 대화>을 비롯해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박세길) <아리랑>(김산·님 웨일즈) <자유로부터의 도피>(에리히 프롬) 등 교양 필독서로 꼽히는 책들도 다수 끼어있다.

정치경제학 뿐만 아니라 인문사회학의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자본론>(칼 마르크스) <헤겔 법철학 비판>(칼 마르크스)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프리드리히 엥겔스)도 '이적표현물'이다.

▲ 우리 법원이 이적표현물로 인정한 책 중에는 인문사회과학의 고전 뿐만 아니라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등 교양 필독서도 다수 포함돼있다. 사진은 국내 한 대형서점에서도 쉽게 살수 있는 '이적표현물'들.
ⓒ 오마이뉴스 남소연
교수도 읽으라고 권한 책 통신망에 올렸다고 실형

지난 98년과 2003년에는 이러한 '이적표현물'을 갖고 있거나 읽었다는 이유로 대학생과 휴학중인 군 장병이 실형을 선고받은 일도 있었다.

지난 98년 당시 한양대 사학과 4학년 생으로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던 하영준씨는 영국 요크 대학교 정치학 교수이자 마르크스주의 연구자로 널리 알려진 알렉스 켈리니코스와 역시 마르크스주의 연구학자인 크리스 하먼의 주요 저서들을 요약해 한 피시(PC) 통신망의 '인터내셔널 동호회'에 올렸다가 검찰에 의해 기소됐다.

하씨는 이에 앞서 96년 '전국노동자대회'에서 '국제사회주의자(IS) 그룹' 기관지를 판매하다 구속돼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으나 이후 활동을 정리, 학업에 뜻을 굳힌 상태였다.

그러나 당시 검찰은 공소장을 통해 "사회주의 혁명을 선동하는 문건임을 인식하고도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하씨가 "국가변란을 선전·선동하는 행위를 할 목적으로 위 표현물을 취득·소지했다(국가보안법 7조 1·5항 위반)"고 주장했다.

이 사건은 당시 한양대 사학과를 발칵 뒤집어놨다. 학과장이자 하씨의 지도교수였던 임지현 교수를 비롯해 사학과 교수들은 '탄원서'를 통해 하씨의 무죄를 재판부에 호소했다. 심지어 켈리니코스의 저서를 기본교재로 삼아 읽고 토론한다는 내용이 명시된 하씨의 수강과목 강의계획서가 재판부에 전달되기도 했다.

<자본론>의 역자이자 저명한 마르크스 경제학자인 김수행 서울대 교수도 소견서를 재판부에 제출했다.

김 교수는 당시 소견서를 통해 "켈리니코스와 하먼은 모두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는 정상적이고도 양심적인 영국의 학자들로 현재의 각종 문제들에 관해 비판적 시각에서 분석하고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며 "두 사람의 저서는 국내에서도 거의 대부분 합법적으로 판매되고 있어 이들의 저서나 논문을 읽거나 전달했다는 사실은 결코 죄가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검찰이 제기한 혐의를 인정했다. 결국 하씨는 2심 재판에서 징역 8월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6년이 지난 현재 하씨는 석사 학위를 얻은 뒤 박사과정 1기를 밟고 있다. 강사로 강단에 설뿐만 아니라 한양대 비교역사연구소 소속 연구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는 하씨는 당시의 사건을 떠올리며 "황당한 사건이었다, 국보법은 개인의 사상의 자유까지 위축하게 만드는 악법임을 다시한번 절감하게 된 일"이라고 씁쓸히 말했다.

신병교육대에서 동료 훈련병들에게 한 발언 문제 삼아 기소

▲ 그간 검찰과 법원은 자의적 잣대에 의해 '사상검열'의 칼날을 휘둘러왔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2002년에는 신병교육대에서 훈련을 받던 대학 신문사 출신인 이아무개씨가 자신의 생각을 동료들에게 말한 것이 문제가 돼 같은 혐의로 군 검찰에 의해 기소, 이듬해에 실형을 선고받는 일도 벌어졌다.

당시 군 검찰은 이씨가 신병교육대 내부반에서 동료 훈련병들과 함께 휴식을 취하면서 "민족분단의 책임은 북녘이 아니라 미국에게 있다"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북녘은 남을 공격하지 않고 미국을 공격할 것이다"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한겨레 한동포인 북녘에 총을 겨누라고 강요하는 군사훈련이 싫다"는 등의 말을 한 점을 문제 삼았다. 반국가단체인 북한의 주장에 동조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검찰은 이씨의 집에 찾아가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박세길) <참된 시작>(박노해) <변증법적 유물론> <마르크스·엥겔스 저작선> 등 17권의 책을 찾아내 국보법상 이적표현물을 소지했다며 이씨를 기소했다.

이씨 역시 군 법원에서 검찰이 제기한 혐의사실이 모두 인정됐다. 이듬해인 2003년 군 법원은 이씨가 국보법 7조 1·5항을 위반했다며 이씨를 징역 2년형에 처했다.

이 두 사건은 이른바 '막걸리 국보법'의 대표적 예로 꼽히는 사건이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의 김선수 변호사(여민 합동법률사무소)는 "일반적으로 출간되는 서적들을 이적표현물로 이라며 국보법을 적용, 형사처벌까지 한 불합리한 사건"이라고 지적했다.

해마다 국보법 적용 실태를 분석하고 있는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도 마찬가지 지적이다. 이 단체의 송소연 총무는 "두 사례는 국보법이 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고 일컬어지지를 설명하는 대표적 사례"라며 "검찰과 법원은 같은 책이라도 누가 갖고 있느냐에 따라 '이적'이 목적일 것임을 마음대로 재단해 기소하고 처벌했다"고 비판했다.

현직 교수들 "검찰과 법원이 오히려 야만적"

<오마이뉴스>는 사실상 '금서'인 이적표현물 목록 1220여종 중 30여권의 목록을 뽑아 현재 대학 강단에 서고 있는 교수들에게 새로이 '감정'을 의뢰했다(자세한 내용은 딸림기사 참조).

주로 정치·경제·사회학의 고전이자 교양 필독서로 꼽히는 도서이거나 한국 근현대사를 새로운 시각에서 발굴한 책들이 주류이다.

'감정결과'는 뜨거웠다. 교수들은 우리 법원이 이러한 책들을 이적표현물로 간주해 소지하거나 반포한 사람들을 처벌해온 데 대해 "검찰과 법원이 오히려 야만적이고 폭압적인 행태를 저질렀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동국대 장시기(영문학) 교수는 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리영희 한양대 명예교수 등의 저서 중 다수가 이적표현물로 인정된 데 대해 "한국의 모든 지식인들을 모두 잠정적인 국가보안법 위반의 범죄자로 만드는 행위"라며 "이들의 저서는 오늘날 인문사회과학의 학문적 담론에서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근대성, 문화학, 국가주의 연구에 기초가 되는 고전"이라고 말했다.

안병욱(가톨릭대 사학) 교수도 "'금서 목록'의 존재 자체가 군사독재가 얼마나 우리사회를 황폐화시켰는가를 적나라하게 증명하는 실증자료"라며 "'이적표현물'이라는 낙인을 찍어 학문과 지식세계를 통제하는 일이야말로 불온하고 파괴적인 범죄 행위"라고 일갈했다.

경제학자인 김균(고려대 경제학) 교수도 마르크스의 저서 대다수가 이적표현물 목록에 포함된 사실에 대해 놀라움을 드러냈다. 김 교수는 "<자본론>과 <정치경제학비판 강요> 등은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고전적 저술이며 어쩌면 19∼20세기 최고의 지적 유산"이라며 "만약 '마르크스 읽기'를 우리 사회가 금한다면 그것은 인류공통의 지적 전통에의 접근을 차단하는 야만적 행위"라고 못박았다.

▲ <오마이뉴스>가 현직 교수이자 학자 3명에게 새로이 '현장 감정'을 의뢰한 결과, 이들은 우리 법원이 규정한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 목록에 대해 "살아있는 고전까지 이적표현물이라니 한국의 거의 모든 지식인을 잠정적 범죄자로 만드는 꼴"이라고 입을 모았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사실상의 사상검열관 '공안문제연구소'

그렇다면 이들 이적표현물은 누가 '감정'해서 '딱지'를 붙이는 걸까. 사실상 우리 검·경은 산하에 사상검증소를 두고 있다. 경찰대 부속기관인 공안문제연구소와 검찰총장 직속 민주이념연구소가 그것이다.

특히 지난 97년 민주이념연구소가 설립되기 이전까지 공안문제연구소는 사상 검열을 사실상 독식해왔다(아래 <박스기사> 참조). 그간 이념적 편향성과 사실상 사상의 자유를 침해하는 검열관 역할을 해왔다는 지적에 대해 연구소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 연구소의 한 관계자는 "전혀 이념적으로 편향돼 있지 않다"며 "(연구원들도) 자기 양심과 학문적 배경을 토대로 공정하게 감정하고 있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이들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은 다르다. 문화평론가인 정윤수씨는 "'검열관들'은 내용을 읽지도 않고 저자의 성향과 제목의 급진성만으로 금서 딱지를 붙인 것으로 보인다"며 "당장 걷어치워야 할 지난 시대의 재미없는 코미디"라고 냉소했다.

송소연 민가협 총무는 우리 사법부의 책임을 촉구했다. 송 총무는 "공안문제연구소에서 내놓은 그간의 '결과'들을 보면 이미 객관성과 전문성을 상실한 곳임이 증명된다"며 "'공안적 상상력'만으로 내놓은 일개 연구소의 감정을 주요한 판단 근거로 삼는 검찰과 법원이 더 큰 문제"라고 비판했다.

21세기 들어서도 학문·사상의 자유에 대한 사법적 유린이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다. 그리고 그 책임은 바로 우리 수사·사법당국에 있다고 하겠다.

'공안문제연구소', 어떤 곳인가

지난 1989년 1월 문을 연 공안문제연구소는 ▲북한의 대남혁명노선 및 통일노선에 관한 분석 ▲마르크스 주의나 계급이론에 대한 사회주의 혁명 사상 분석, ▲국제 공산주의 사상에 관한 분석 등의 업무와 ▲보안관련 기관에서 의뢰한 문건 분석"을 목적으로 대통령령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 연구소의 전 직원은 20여명 정도. 소장을 제외한 석·박사급 13명의 연구관과 행정직원 5∼6명이 전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파워'는 막강하다. 국보법 관련 각종 재판에서 공안문제연구소의 감정결과는 주요한 증거자료로 이용됐고 재판부도 이 결과를 대부분 수용했다.

연구소의 연구원이 어떤 인물들인지는 '대외비'로 베일에 가려져 있다. 공안문제연구소에 따르면 연구원들은 석·박사급으로 이념관련 학과를 졸업한 인사와 공안관련 부서에 근무한 경력이 있는 인사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의 주요업무는 수사기관에서 의뢰한 문건에 대한 이적성 여부 판단인데 한 달에 40건 이상의 문건에 대한 분석을 벌인다. 휴일을 모두 반납해도, 연구원 1인당 하루에 1건 이상씩 '이적 혐의 문건'에 대한 감정을 하는 셈이다. 통상 감정기간은 사례 하나 당 일주일을 넘지 않는다.

그밖에 격월간으로 발행되는 기관지인 <공안연구>에 수록되는 연구서를 쓴다. 주제는 '한민전 신년메시지 분석' '북한의 대남정책이나 교육제도의 실상 분석' 등 대북관련 공안연구가 대부분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지난 97년 검찰도 검찰총장 직속으로 사실상 공안문제연구소와 같은 역할을 하는 민주이념연구소를 설립, 빈축을 사고 있다. 남북통일에 대비한 안보기관 대비태세 연구, 이적표현물 분석 및 평가, 자유 민주주의 체제 위협세력의 동향과 대처방안 연구 등이 그 목적인 이 기관에 대해 시민단체들은 전면 개편되거나 없어져야할 기관이 하나 더 늘어나 이적표현물에 대한 불합리한 단속이 더욱 집중됐다고 비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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