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진보의련 사건 공동대책위가 지난 해 8월15일 서울 광화문 네거리 일대에서 진행한 '진보의련 사건 항의 1인시위'와 소속 보건의료단체와 함께 운영한 무료진료소. 진보의련 공대위에는 전국민중연대, 보건의료단체연합 등 50여개 단체가 참여했다.
ⓒ 진보의련사건공대위
"권정기씨죠?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합니다."

지난 2001년 가을, 경기도내 한 보건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던 의사 권정기(43)씨의 출근길을 형사 4∼5명이 가로막고 나섰다. 처음 권씨는 이들이 사람을 잘못 알아본 것이려니 생각했다. 그러나 형사들은 권씨에게 '미란다 원칙'을 고지하면서 체포영장을 들이밀었다. 그들이 내민 영장에는 영낙없이 자신의 이름 석 자가 씌여 있었다.

같은 날 오전 9시께. 후배 집에서 중간시험을 앞두고 공부를 하던 나영찬(33)씨에게도 '이상한 벨'이 울렸다. 경희대 한의대 본과 4학년이던 나씨는 학교 근처의 후배 집에서 밤을 새 공부하던 터였다. 후배도 없고 남의 집이라 문 열어주기를 주저하던 차 잠겨있던 문이 절로 열렸다. 그리고는 경찰 9∼10명이 들이닥쳤다.

"나영찬씨죠?"

의사·약사·한의대생 20명이 '국가 변란'?

이 뿐만이 아니다. 비슷한 시각 제주도, 수원, 서울 등에서 이 아무개(40)씨, 지 아무개씨 등 의과대학 교수·의사·간호사·약사·교사 등 6명이 무더기로 연행됐다. 이는 불과 3년전인 2001년 10월 8일에 일어난 일들로, 이른바 '진보의련 사건'의 첫 장인 셈이다.

보건의료운동 단체인 '진보와 연대를 위한 보건의료운동연합'(진보의련)의 회원이었던 현직 의대 교수, 보건소장, 의사, 한의대생 등 한날 한시에 잡힌 이들의 혐의는 '국가보안법 위반'. 결국 진보의련은 항소심까지 이어진 재판을 통해 국보법상 이적단체로 규정되기에 이른다.

당시까지 실질적인 회원이 고작해야 20여명에 불과했고 회원 대다수가 교수·의사·약사 등 의료인인 이 단체가 국가 변란을 선전·선동하는 이적단체다? 언뜻 봐서 납득하기 어려운 이 사건의 진상은 무엇일까.

딴지 #1: '시나리오 수사'의 가능성

진보의련은 1995년 '보건의료의 공공성 강화''의료보장 확대 등 무상의료' 등에 동의하는 의료인들이 모여 결성한 보건의료운동 단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활동했던 회원이 20여명에 불과하고 운동조직으로서 실질적인 활동이 거의 없어졌다는 이유로 2001년 1월 구성원들은 해소에 의견을 모았다. 약 7개월이 지난 뒤인 같은 해 8월에는 전세로 마련한 사무실까지 정리했다.

그러나 경찰은 활동은 하지 않은 채 다달이 후원금만 보냈던 회원, 이미 수년 전 활동을 정리한 회원까지 10명에 대해 체포영장을 청구해 발부 받았고 이중 8명을 연행했다.

나영찬씨는 "해소 결정 이후 회의를 한번 연 것 빼고는 사무실까지 정리해 활동을 거의 접어 '사실상 해소'된 상태였다"며 "경찰이 내사는 해왔고 터뜨리면 국보법 위반으로 걸릴 것 같으니 필요한 시기에 잡아들였을 의혹이 짙다"고 말했다.

국보법상 이적단체 사건의 공소시효가 7년이라는 점도 이러한 의혹을 뒷받침한다. 송소연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총무는 "공소시효가 끝나기 직전에 사건을 터뜨려 감청이나 미행을 통해 증거가 될만한 자료를 찾아놓은 뒤 관련 혐의자를 무작위로 연행했다는 비난이 강하게 일었던 사건"이라고 지적했다.

경찰이 임의의 진술서와 조직도를 그려 놓은 후 혐의자들의 자백을 통해 가감해 나갔다는 사실도 '시나리오 수사' 의혹을 뒷받침한다.

나영찬씨는 "홍제동 보안분실에서 조사받을 당시 경찰은 이미 조직도와 진술서 초안을 마련해놓은 상태였다"며 "진술에 따라 사실이 아닌 부분을 제하는 식으로 조사를 해나갔다"고 말했다.

▲ 진보의련에 대한 이적단체 판결이 난 직후인 지난 해 6월13일 건강권실현을위한보건의료단체,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등 50여개 단체들은 '진보의련 사건 공동대책위'를 구성, 종로구 안국동 느티나무 카페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법원의 이적단체 판결을 강력히 비판했다.
ⓒ 진보의련사건공대위
딴지 #2: 무리한 체포영장 발부... 관련없는 사람까지 체포

무리한 체포영장 발부도 문제다. 당시 경찰청 보안수사대는 진보의련 사건 혐의자로 권정기씨등 8명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이들을 연행, 이틀에 걸쳐 일괄 조사를 벌였다. 그러나 이들 중 구속영장이 발부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이틀간의 조사 뒤 경찰은 별 혐의를 찾지 못한 4명을 귀가시켰고 나머지 4명에 대해서는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그러나 법원은 영장 청구를 기각했다. 경찰은 또다시 범위를 두 사람으로 좁혀 영장을 청구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기각됐다. 국보법 위반 사건의 수사과정에서 흔히 드러나는 무리한 체포 수사의 한 단면이다.

이미 5∼6년 전 활동을 정리한 회원과 다달이 후원금만 전했을 뿐 회원이라고 하기엔 활동이 극히 미미했던 사람까지 연행한 점도 문제로 지적할 수 있다.

나영찬씨는 "당시 연행된 사람 중에는 연행을 계기로 근 5년만에 얼굴을 본 이도 있었다"며 "연행을 하더라도 관련자를 제대로 파악해야 하는데 거의 관련이 없는 사람까지 뜬금없이 잡아들여 무리하게 체포를 했다"고 비판했다.

딴지 #3: 인권침해 수사 논란

진보의련 관련자 8명이 연행된 서대문구 홍제동 보안분실에는 약 1.5m 높이의 자료가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경찰이 이미 4∼5년 전부터 내사를 벌였고 수개월전부터 이들의 행적을 추적해왔다는 점이다. 이 과정에서 감청, 통화기록조회, 미행 등 경찰의 무리한 수사로 인한 인권침해 의혹도 강하다.

당시 경찰 조사를 받았던 인사들에 따르면, 경찰은 혐의자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공공연하게 "우리가 당신들을 5년에 걸쳐 내사했다, 몇 년 간 일거수 일투족까지 다 파악했다, 이때 어디서 뭐하고 있었지 않느냐" 등의 말을 내뱉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회원들이 주고 받았던 이메일까지 조사 자료로 제시했다.

"아니, 연행되기 두달 전에 자전거 잃어버린 것까지 다 알고 있더라구요. 경찰에게 내 자전거 훔쳐간 사람이나 잡아주시지 그랬느냐는 농담을 건넬 정도였습니다."

당시 이틀간 조사를 받은 뒤 석방된 나영찬씨의 말이다. 권정기씨도 마찬가지 사연을 털어놨다. 권씨는 "경찰이 지난 몇 년간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다시피 해왔다는 사실을 알았다"며 "심지어 조사과정에서 '권정기씨, 그때 어디서 뭐 하고 있었지. 우리가 다 미행했어'라고까지 말하더라"고 말했다.

딴지 #4: 진보의련이 주장하는 '의료의 공공성 강화', 과연 문제인가

진보의련은 '의료의 공공성 강화'에 동의하는 보건 의료인들이 모여 결성한 운동단체이자 연구모임이다. 의료 서비스의 국영화 등 무상의료를 대안으로 모색한 이들의 주장에서 이적성을 찾을 수 있을까.

지난 2003년 6월 법원은 진보의련을 국보법상 이적단체로 규정했다. 또한 소위 '진보의련 사건'으로 기소된 권정기·이상이씨에 대해 각각 징역 1년에 자격정지 1년, 집행유예 2년과 징역 10월에 자격정지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서울지법 형사21부(재판장 황찬현 부장판사)는 당시 판결문에서 "진보의련은 강령 등에서 우리 사회를 '소수의 자본가가 절대 다수의 노동자를 지배·착취하는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로 규정하고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추구하는 등 국가 변란을 선전·선동하는 이적단체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또한 재판부는 "진보의련은 창립총회자료집에 실린 권정기 등의 글을 통해 볼 때 ▲반자본 진보노선 ▲한국 보건의료의 사회화 ▲진보적 제세력과 연대를 통한 한국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적 변혁이 그 조직노선(강령)"이라며 "(피고인들은) 국가변란을 선전·선동할 목적으로 하는 단체인 진보의련을 구성했다"고 판시했다.

반면 당시 변호인측은 '항소이유서'를 통해 원심 판결을 반박했다. 이상희 변호사(법무법인 한결)는 "진보의련은 조직노선이라는 것을 가져본 적이 없다"며 "판결문에 인용된 글은 총회 자료집에 있었으나 참고자료로 실렸을 뿐 토론되지도 않았다"고 밝혔다.

"진보의련, 민노당 보건의료 정책의 산파"

진보의련이 조직 강령으로 '반자본적 진보노선에 의한 보건의료의 사회화' 즉 '의료의 공공성 강화'를 채택했다고 해도 이 사실이 이적단체 규정의 근거가 될 수 있는지 여부를 두고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더구나 이같은 주장은 17대 총선에서 원내 진출에 성공한 민주노동당의 보건의료 정책의 일부이기도 했다.

민노당은 지난 2002년과 올 총선에서 '무상의료'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지난 2002년 대선에서 당시 대선후보였던 권영길 대표(현 국회의원)는 "임산부에 대한 모든 필수 의료 서비스(입원 및 외래)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5년 안에 '전 국민 무상의료'라는 목표를 달성하겠다"고 밝혔다.

민노당의 이같은 정책은 진보의련의 주장과도 궤를 같이 한다. 전현준 전 민노당 보건의료위원장(현 월간 <말> 편집위원)은 "민노당의 보건의료정책을 마련한 보건의료위에는 진보의련 회원의 일부도 참여해 민노당 보건의료 공약의 실질적 산파역할을 했다"며 "진보의련의 주장은 이적성 여부와 전혀 관련이 없다"고 설명했다.

법원의 판결에 대해서는 권정기씨도 받아 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권씨는 "우리의 주장 중 가장 급진적이랄 수 있는 것은 '대형 병원의 국유화를 통한 무상의료' 등 '보건의료의 사회화'였다"며 "이미 영국에서도 실시하고 있는 이러한 보건의료체계를 사회주의 국가로의 혁명을 위한 방법으로 보는 것은 대단한 오판"이라고 따졌다.

해결책은 "국가보안법 폐지"

▲ 지난해 8월 '진보의련 사건' 항소심 2차 공판을 앞두고 '진보의련 사건 공대위'가 서초구 서초동 서울고등법원 앞에서 벌인 1인시위. 시민단체와 보건의료운동 단체는 법원의 이적단체 판결에 강한 비판을 제기하고 있는 상태다.
ⓒ 진보의련사건공대위
이러한 논란을 안고 있는 진보의련 사건은 항소심을 거쳐 현재 대법원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다(지난 해 12월 이뤄진 항소심에서 권정기씨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이상이씨는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과 관련해 검찰이 제기한 공소사실이 2심에서도 그대로 인정된 데 대해 권정기씨는 아직도 반발하고 있다. 특히 권씨는 법원이 진보의련을 이적단체로 판결한 데 대해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회원 한명의 주장이 이적단체 규정의 주된 근거가 될 수 있습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이적단체라고 하면 그 단체가 표방하는 규약이나 강령에서 국가변란이 목적이라던지 사회주의 국가로의 혁명이 명시됐다던지 하는 뚜렷한 목적이 있어야 하는데 재판부가 문제 삼았던 것은 내가 썼던 글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권씨는 진보의련이 이적단체로 규정된 데에는 자신이 활동을 하면서 썼던 문건들이 주효하게 작용했다고 보고 있다. 권씨는 "진보의련 활동을 하면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분석, 정치조직과의 연대 필요성 등을 주장한 글이 이적표현물로 인정이 됐는데 이는 모두 내가 썼던 글"이라며 "사상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에서 이런 주장이 문제가 되는 것도 납득이 안되지만 단체의 한 개인이 쓴 글로 전체가 '이적단체'로 규정되는 것은 '법논리가 아닌 건수 올리기식 수사'"라고 비난했다.

반면 1심에서 진보의련을 이적단체로 판결했던 황찬현 판사는 "진보의련은 활동이나 회원들의 발제 내용 등을 볼 때 의료의 공공성 강화만을 주장하는 단체는 아니며 주장을 실현하는 방법도 문제였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하지만 진보의련 사건을 바라보는 진보적 의료인과 시민사회는 이러한 법원의 시각에 동의하지 않는 분위기다.

임정수 교수(가천의대 예방의학)는 "우리나라가 헌법에 명시된 국민의 건강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이들(진보의련)의 의견도 건전하게 수용할 필요도 있다"며 "의사로서 안정된 수입도 거부한 채 우리나라 보건의료의 발전을 위해 고생한 사람에게 실형을 선고한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특히 의료서비스가 돈벌이의 수단으로 전락해서는 안된다는 신념에 따라 의과대학 졸업이후 94년부터 보건소에서 일해온 권정기씨는 2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점이 문제가 돼 보건소장 직에서 물러나게 됐다.

전현준 월간 <말> 편집위원은 진보의련 사건에 대해 "보건의료운동을 위한 연구모임을 국보법 위반으로 기소한 말도 안되는 사건"이라며 "근본적인 해결책은 조속한 국보법 폐지"라고 강조했다.

숱한 논란과 반발 속에 이적단체로 규정된 진보의련 사건. 대법원의 판결에 시민사회단체의 관심이 쏠려있다.

만만한 게 '조직사건'이다?
국보법 위반사범 중 '이적단체 구성 및 가입'죄가 가장 많아

"만만한 게 조직사건"

툭 하면 터지는 국가보안법상 조직사건을 두고 항간에 떠도는 말이다. 국보법이 제정된 이래 셀 수도 없을 만큼의 조직사건이 터졌다. 언뜻 생각해봐도 '인혁당''민청학련''통혁당''영남위' 사건 등을 꼽을 수 있다. 국보법의 결정적 제정 배경이 '여순 반란 사건'으로 인한 남조선노동당 등 이른 바 '좌익단체'의 척결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묘한 '인연'이다.

국가인권위가 최근 내놓은 '국가보안법 적용상에서 나타난 인권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1991년부터 98년까지 이적단체 구성 및 가입으로 총 2001명이 입건됐다(경찰청 집계). 이는 전체 국보법 위반 사범의 절반을 넘는 약 54%를 차지한다.

특히 90년대 중반에는 전국적으로 6대학 학생회 간부 100여명이 이른바 '자주대오' 사건으로 구속된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95년 2월 부산대를 시작으로 5개 대학에서 발생한 '자주대오' 사건으로 95년과 96년 각각 64명, 55명이 구속됐다. 이밖에도 검·경은 이 시기 다수의 청년단체에 이적단체 혐의를 씌웠다.

국보법 적용사례 실태를 연구해온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는 '조직사건에도 일정한 틀이 있다'고 지적한다.

민가협이 제시하는 국보법상 조직사건의 특징은 대략 두 가지다. ▲대부분 현재 활동하고 있는 조직이 아닌 해체된 조직의 회원에 대해 과거의 활동을 뒤늦게 문제 삼는다는 점 ▲공개단체가 다수를 차지한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진보의련의 경우도 이에 해당한다.

이에 대해 송소연 민가협 총무는 "조직사건의 경우 한번에 많은 사람을 잡아들일 수 있어 경찰로서는 성과가 크고 국가 존립에 명백한 위험을 끼친다는 구체적인 증거나 특별한 행위가 없어도 기소가 가능하다"며 국보법상 '조직사건'의 난립이 경찰의 '실적올리기' 수사와 무관하지 않음을 피력했다.


관련
기사
[목요특별기획-국보법 폐지 ①] '룡천돕기'도 국보법 위반?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