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 거리를 두는 부산국제영화제가 온전히 독자적인 운영을 하고 있으며, 외부로부터 일체 간섭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대외에 확실하게 알리는 모습을 보인 건 2회 때부터였다.

젊은 관객들이 몰리는 특성상 정치인들의 구애가 이어졌지만 부산국제영화제 측은 일체 응하지 않았다.

97년 대선을 앞두고 당시 김대중 후보가 개막식을 찾았지만 조직위는 특별한 소개나 어떠한 인사말도 허락하지 않았다. 대선 후보의 방문도 영화제측의 엄격한 선긋기 앞에 그저 영화제를 찾았다는 것에 의의를 둬야 했다.

당시 이회창 후보도 마찬가지였다. 이틀 뒤 영화제 첫 주말. 일요일 저녁 남포동입구에 거대 수행원을 이끌고 나타난 그는 관객들로 포화상태인 남포동의 혼잡을 가중시켰다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수행원들이 길을 트는 사이 나는 야외무대로 가기 위해 군중들 속을 헤집고 중앙으로 나갔건만 어찌된 영문인지 이회창 후보는 야외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무대 앞에서 뭔가 실랑이가 벌어지는 듯 하더니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물러난 것이다.

김대중도 이회창도 뚫지 못한 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 레드카펫을 밟고 있는 영화배우들

부산국제영화제 레드카펫을 밟고 있는 영화배우들 ⓒ 최윤석



이는 조직위의 강력히 저지 때문이었다. 당시 오석근 사무국장(<101번째 프로포즈> <연인> 감독)은 "야외무대는 영화제 행사를 위해 마련된 곳이므로 그 외의 목적으로는 절대 오를 수 없다"며 이회창 후보를 야외무대에 오르게 하려던 일행을 온 몸으로 막아섰다.

영화제 측의 완강한 저지 앞에 어쩔 수 없었던 이회창 후보는 "알았네, 내가 이해하겠네"하면서 물러섰고, 이 일화는 영화제의 독립성을 이야기 할 때마다 빠짐없이 나오는 레퍼토리가 됐다.

물론 이런 일들로 인해 각 정당들로부터 섭섭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당시 조직위의 의연한 행동은 영화제의 독립적 위상을 세우는 중요한 계기였다.

2회 때 벌어진 '표현자유 보장 및 검열철폐 시위' 또한 영화제의 정치적 독립성을 잘 나타낸 부분이었다.

영화제가 한창인 남포동 피프광장에서 시위가 벌어지자 황급히 현장에 나타난 경찰 관계자가 "이는 허가되지 않은 불법시위이므로 10분내 해산하지 않으면 강제해산시키겠다"며 엄포를 놓았지만, 이 역시도 영화제 조직위 측이 적극 막아선 것.

당시 이용관 프로그래머(현 부집행위원장)는 경찰 간부와의 설전을 통해 "이것은 단순한 시위가 아니다"며 "야외무대에서 벌어지는 무대인사나 영화제 기간 중에 벌어지고 있는 각종 이벤트와 마찬가지인 부산영화제의 부대행사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 또한 영화제 행사의 일환이므로 경찰에서 간섭하지 말라"며 적극 나섰던 것이다.

표현자유와 검열철폐 시위 2회 영화제 때 독립영화인들이 벌이던 시위. 당시 경찰의 강제해산 방침을 막아선 것은 영화제 관계자들이었다.

▲ 표현자유와 검열철폐 시위 2회 영화제 때 독립영화인들이 벌이던 시위. 당시 경찰의 강제해산 방침을 막아선 것은 영화제 관계자들이었다. ⓒ 부산국제영화제


"표현의 자유 시위도 영화제의 일환이다, 경찰이 간섭 말라"

수십 만명이 몰리고 그 중에 태반이 20~30대 관객들이라는 영화제의 특성상 정치적으로 중요한 시기를 앞둔 정치인들에게 부산국제영화제는 놓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4일 개막식에 정치인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특히 대선을 앞둔 상황이라서 그런지 대선후보들이 방문이 두드러졌다.

개막식에 참석한 대선 예비 후보는 정동영·권영길·이명박 후보 등 3명. 레드카펫을 따라 입장한 이들은 열심히 손을 흔들며 관객들의 호응을 유도하려 애썼지만 거기에 호응하는 관객들은 몇 안 됐다. 

그전에 입장한 다니엘 헤니나 수애 등 배우에 열광적 환호를 보내던 관객들은 그에 대비될 만큼 차가운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누가 지들 보러 왔나. 설치기는…."

씁쓸한 표정으로 못마땅하다는 듯 한 마디 던지는 관객의 넋두리는 많은 관객들의 생각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분위기를 모르는 듯 좌우로 움직이며 관객들과 악수하자고 손을 내미는 일부 후보의 모습은 영화제의 분위기를 제대로 모르는 행동이었다.

관객들이 영화제에 오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스타를 보기 위해서다. 스타를 보고 열광하기 위해 레드카펫 주위에 몇 시간 동안 진치고 있는 것이고, 스타와의 만남은 영화제를 통해 얻으려는 이들의 기대치이기도 하다.

영화제의 레드카펫은 그 진한 색깔만큼이나 관객들의 마음을 열정으로 채워줘야 한다. 하지만 마지막 부분에 등장한 정치인들은 이번 12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의 열기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레드카펫은 자제됐어야 했다. 스타들에 섞여 시선을 받으려하기 보다는 그에 앞서 비를 맞으면서도 자리를 지키는 관객들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헤아리려는 자세가 먼저다.

"누가 지들 보러 왔나, 설치긴"

영화제에 참석한 대선후보들 왼쪽부터 정동영, 이명박, 권영길 후보.

▲ 영화제에 참석한 대선후보들 왼쪽부터 정동영, 이명박, 권영길 후보. ⓒ 최윤석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영화제를 찾은 후보들은 당시 영화제 현안으로 대두한 '전용관 문제'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대외적으로는 번지르르하게 말했지만 내년에도 착공이 어려운 상황이다. 또 그들은 한미FTA로 인한 영화시장의 위기감에도 한 몫 단단히 거들었었다. 물론 한곳의 진보정당은 여기서 제외되지만.

부산국제영화제를 아끼는 관객들은 영화제를 단순한 홍보의 장으로 인식하는 정치인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의 입장에서 자연스레 함께 할 수 있거나, 12년 동안 홀로 커온 영화제에 애정을 갖고 키우려는 마음을 가지려는 사람을 원할 뿐이다. 전혀 관심 없다가 선거를 앞두고 그저 얼굴 한 번 슬쩍 비추는 정치인들.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화려한 레드카펫을 어둡게 할 뿐이라는 점을 제대로 알아야 할 것이다.

영화제 조직위 또한 레드카펫에 정치인들을 올리는 부분에 대해 숙고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귀빈들에 대한 대우 차원에서  레드카펫을 밟게 할 수는 있지만 문광위원들처럼 조용히 입장하는 모습이 관객들에 대한 예우가 아닐까 싶다. 마지막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야 하는 것은 거장 감독들과 스타들, 그리고 영화계의 인사들이지 결코 정치인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독립성을 지키려던 영화제 초창기의 모습이 아쉬웠던 개막식이었다.

부산국제영화제 PI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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