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쉽지만 성공적인 첫 경기였다. 홍명보 감독이 이끄는 한국축구대표팀은 18일(한국시간) 한국과 러시아의 H조 조별리그 1차전에서 1-1로 무승부를 기록했다. 후반 23분 이근호의 선제골로 앞서 가던 한국은 후반 29분 알렉산드르 케르자코프(제니트)에게 동점골을 내줬다.

첫 승의 기회는 살리지 못했지만 월드컵 개막 전까지 깔려 있던 비관적인 분위기를 반전 시키기에는 충분했다. 한국은 월드컵 출정식이었던 튀니지전(0-1)과 최종 평가전이던 가나(0-4)전에서 연이어 무기력한 참패를 당하며 '이러다 월드컵 본선에서도 망신 당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평가전 때와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2014 브라질 월드컵 조별리그 H조 1차전 한국과 러시아의 경기가 열린 18일 오전(한국시간) 브라질 쿠이아바 판타나우 경기장에서 후반전 이근호가 선제골을 넣은 후 환호하고 있다.

2014 브라질 월드컵 조별리그 H조 1차전 한국과 러시아의 경기가 열린 18일 오전(한국시간) 브라질 쿠이아바 판타나우 경기장에서 후반전 이근호가 선제골을 넣은 후 환호하고 있다. ⓒ 연합뉴스


러시아전에서는 모든 것이 평가전 때와 달라졌다. 결과도 내용도 모두 좋았다. 더위에 지친 러시아를 상대로 전반 중반부터 후반 선제골을 넣을 때까지는 한국이 사실상 경기를 주도했다. 홍명보호 출범 이후 가장 좋은 경기를 펼친 지난 3월 그리스전과 근접한 경기력을 보여줬다. 홍명보 감독은 "가나전은 과정이었기 때문에 전혀 중요한 게임이 아니었다. 오직 러시아전에 모든 포커스를 맞추고 준비해 왔다"고 밝혔다.

이전 두 번의 평가전과 비교해 가장 달라진 부분은 역시 수비 조직력의 향상이다. 튀니지전에서 부상을 당했던 홍정호가 돌아오고 오른쪽 수비에 이용이 배치되면서 좌측부터 윤석영-김영권-홍정호-이용으로 이어지는 주전 포백 라인이 안정을 찾았다.

평가전에서 부진한 경기력을 보였던 윤석영도 이날은 컨디션이 상당히 올라온 모습을 보였다. 좌우 풀백들은 이날 무리한 오버래핑을 자제하고 수비에 초점을 맞춰 신중한 경기 운영을 펼쳤다. 그동안 위험 지역에서 어설픈 커버플레이와 패스 실수로 위기를 자초했던 수비진은 이날 만큼은 특별한 실책없이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1, 2선의 간격 유지와 전방위 압박도 잘 이루어졌다. 가나전의 경우 미드필드와 수비라인의 간격이 벌어지며 개인기가 좋은 가나 공격수들이 활약할 수 있는 공간을 자주 내줬다. 러시아전에서는 최전방에서부터 공격수들이 적극적으로 수비에 가담하며 러시아의 전진패스가 쉽게 이루어지지 않도록 압박했다.

'플레이메이커' 기성용은 하프라인 아래로 내려와 한국영과 함께 안정적인 더블 볼란치를 형성하며 미드필드에서 공간을 거의 내주지 않았다. 공격이 풀리지 않은 러시아는 측면에서 볼을 돌리다가 롱볼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수문장 정성룡의 변신이었다. 남아공 월드컵부터 대표팀 주전 골키퍼 자리를 독점해온 정성룡은 최근 기복 심한 경기력으로 팬들의 비난을 받아왔다. 하지만 이날만큼은 그동안의 부진을 날리기에 손색없는 선방을 여러 차례 선보였다. 세트피스와 중거리슛으로 활로를 모색한 러시아의 위협적인 공격을 수차례 저지하며 골문을 든든하게 지켰다.

'주전 원톱' 박주영, 장단점 극명하게 드러내

이근호 골에 열광하는 시민들 18일 오전 브라질월드컵 러시아전에서 후반전 교체투입된 이근호 선수가 중거리슛을 성공시키자 광화문광장에서 거리응원을 하던 시민들이 환호하고 있다.

▲ 이근호 골에 열광하는 시민들 18일 오전 브라질월드컵 러시아전에서 후반전 교체투입된 이근호 선수가 중거리슛을 성공시키자 광화문광장에서 거리응원을 하던 시민들이 환호하고 있다. ⓒ 권우성


한국과 러시아는 기본적으로 경기를 풀어나가는 스타일이 유사한 팀이다. 두 팀 모두 안정적인 수비를 바탕으로 역습 위주의 플레이를 펼친다. 초반에는 양팀이 서로 신중한 경기운영을 펼치느라 경기 템포가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으나, 중반부터 한국의 패스플레이가 살아나며 경기 주도권을 가져왔다. 기성용의 후방에서 안정적으로 볼을 배급하는 리딩 플레이가 돋보였고 짧은 패스를 중심으로 점유율을 높이며 러시아를 끊임없이 압박했다.

하지만 공격의 예리함은 여전히 아쉬웠다. 손흥민-구자철-이청용으로 이어지는 2선 라인의 활발한 움직임이 살아난 것은 인상적이었으나, 문전을 향한 결정적인 침투 패스나 직접 유효 슈팅까지 이어가는 장면은 여전히 부족했다.

'주전 원톱'인 박주영은 이날도 장단점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일단 좋았던 부분은 박주영의 강점이라고 할 수 있는, 2선 공격수들과의 연계플레이를 통하여 공간을 만들어 내는 움직임이었다.

박주영이 볼을 가지지 않은 선수의 반대편으로 돌아나가며 수비수들을 유인해 내는 동작으로 전반 몇 차례의 좋은 찬스를 만들어 낸 점은 칭찬 받을 만하다. 박주영이 동료들과 만들어낸 공간을 바탕으로, 손흥민과 구자철이 초반 결정적인 슈팅 찬스 중 한 번만 살렸어도 경기 흐름은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홍명보 감독이 전술적으로 박주영을 선호하는 이유다.

하지만 공격수 본연의 임무인 '골사냥만' 놓고 봤을 때는 여전히 낙제점이었다. 투지도 헌신성도 부족했다. 전반 이청용의 완벽한 스루패스를 제대로 트래핑하지 못해 놓치는가 하면, 상대 수비수들과의 몸싸움에 밀려나 자꾸 문전 밖으로 나오는 등 경기 감각 저하의 문제점을 드러냈다.

상대에게 위협을 줄 만한 유효 슈팅은 이날도 전혀 없었다. 오히려 전반이 끝나고 선발 멤버 중 가장 먼저 체력 저하를 드러내며 움직임이 무뎌졌다. 홍명보 감독이 이례적으로 후반 10분 만에 교체카드를 꺼내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박주영과 교체되어 그라운드에 들어선 이근호는 13분 만에 동점골을 뽑아냈다. 러시아 골키퍼 아킨페프의 실책이 곁들여진 '반'자책골이기는 했지만 공격수로서 이근호의 빠른 판단과 정확한 유효 슈팅이 빛을 발한 대목이었다. 이근호는 중앙과 좌우측면을 넘나드는 왕성한 활동량과 적극적인 움직임으로 박주영이 최전방에 있을 때보다 동료들과의 호흡이 더 활발한 모습을 보였다.

홍명보호, 16강 향한 희망의 불씨 살렸다

 18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2014 브라질 월드컵' H조 한국 대 러시아의 예선경기 거리응원전에서 대형 태극기가 펄쳐지고 있다

18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2014 브라질 월드컵' H조 한국 대 러시아의 예선경기 거리응원전에서 대형 태극기가 펄쳐지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홍명보호는 행운의 선제골을 지키지 못하고 불과 6분 만에 동점골을 내줬다. 수비의 리더인 홍정호가 근육 경련으로 갑자기 교체된 공백이 뼈아팠다. 황석호가 대신 투입되었지만 어수선해진 수비 조직력이 미처 정돈되기 전에 측면이 뜷리며 교체가 이뤄진 2분 만에 케르자코프에게 동점골을 내줬다.

실점 상황에서 러시아 공격수들의 오프사이드가 의심되는 순간이 있었지만 '심판의 휘슬이 울리기 전까지는 끝까지 플레이를 해야 한다'는 기본을 잊은 한국 수비수들의 집중력 부족도 질타를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선제골 이후 선수들의 긴장감이 다소 풀어지며 라인이 아래로 처져서 압박이 느슨해진 것이 러시아 선수들에게 전진할 수 있는 공간을 허용했다. 이날 러시아의 패스 전개가 전반적으로 위협적이지 못했고 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세트피스에서도 한국 선수들이 제공권과 몸싸움에서 크게 밀리지 않은 것을 감안하면 허무한 실점이 더욱 뼈아프게 느껴진다.

동점골 허용 이후 기가 꺾인 한국은 오히려 후반 막판 이후에는 러시아의 파상공세에 일방적으로 밀리는 모습을 드러냈다. 체력보다는 흐름의 문제였다. 이날 경기가 열린 쿠이아바 현지 기후에 적응이 덜 된 러시아 선수들의 체력 소모가 더 컸고, 공격의 템포가 전반적으로 느리고 단조로웠기에 망정이지 시간이 더 있었다면 한국이 상당히 위험한 흐름으로 갈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월드컵 경험이 전반적으로 부족한 한국 선수들의 장단점을 보여준 장면이다.

비록 첫 승은 따내지 못했지만 한국은 러시아전에서 16강을 향한 희망의 불씨를 되찾는 데는 성공했다. 한국의 다음 상대가 알제리가 첫 경기 벨기에전 패배로 기세가 다소 꺾였고, 최강이라던 벨기에 역시 월드컵 경험 부족을 드러내며 다소 지리멸렬한 조직력을 드러낸 것을 감안하면, 러시아전에서 보여준 경기력으로 충분히 희망을 걸어볼 만하다.


☞ 관점이 있는 스포츠 뉴스, '오마이스포츠' 페이스북 바로가기

축구
댓글4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