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대표팀을 이끌고 첫 월드컵 경험에 나섰다가 크게 한 방 먹고 돌아온 홍명보 감독은 사실 아무런 잘못이 없는 지도 모른다. 족집게 도사 혹은 작두 탄 감독들과 맞붙어 만신창이가 된 셈이니 말이다.

우리 시각으로 지난 2일 아침에 월드컵 16강 토너먼트 여덟 경기가 모두 끝났다. 이제 8강 경기만 남겨놨다. 그중 정말 아쉽게 탈락한 한 팀과 아슬아슬하게 8강에 올라간 한 팀의 감독이 눈에 들어온다. 공교롭게도 둘 다 한국과 같은 H그룹에서 순위 경쟁을 펼친 감독들이다. 알제리 할릴호지치 감독과 벨기에 빌모츠 감독이다.

'능력자' 알제리 바히드 할릴호지치 감독

 6월 23일, 한국과의 경기에서 내세운 알제리의 선발 라인업

6월 23일, 한국과의 경기에서 내세운 알제리의 선발 라인업 ⓒ 국제축구연맹


7월의 첫 날 아침, 한국 축구팬들은 멀리 브라질의 포르투 알레그리에서 들려온 월드컵 소식에 깜짝 놀랐다. 아무리 홍명보호를 4-2로 초토화시켰던 알제리라지만 좀 운이 좋았겠거니 생각했었는데, 16강에 올라가 우승후보라 불리는 독일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국제축구연맹으로부터 맨 오브 더 매치(Man Of the Match)에 뽑힌 골키퍼 라이스 음볼리의 눈부신 슈퍼 세이브 덕분이기도 하지만, 알제리는 90분 경기를 그 어느 팀보다 당당하게 임했다. 포메이션만 보면 수비 위주의 전술로 보이지만, 전반적인 공수 균형과 역습의 수준은 이번 월드컵 여느 팀과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특히, 할릴호지치 감독의 변화무쌍한 전술은 경기 때마다 보는 이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이는 지금까지 치른 네 경기의 선발 라인업만 살펴봐도 알 수 있다.

벨기에와의 첫 경기(1-2 역전패)에서 4-3-3 포메이션을 들고 나왔다가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어내지 못한 할릴호지치 감독은 한국과의 두 번째 경기에서 제대로 칼을 빼 들었다. 포백(굴람-할리시-부게라-모스테파)을 포기하고 파이브 백(메스바-할리시-부게라-메자니-만디)을 세우면서 핵심 선수들도 대거 바꿨다.

이것도 모자라 첫 경기 맨 앞에 세운 간판 골잡이 수다니도 과감하게 빼고 '5-4-1' 포메이션을 내세웠다. 미드필더와 공격수 조합이 첫 경기(MF 벤탈렙-메자니-타이데르 / FW 마레스-수다니-페굴리)와는 달리 한국과의 두 번째 경기에는 'MF 벤탈렙-자부-브라히미-페굴리 / FW 슬리마니'를 내세웠다.

한국 선수들이 개개인의 재능이 뛰어나기는 하지만 조직력이 부족하고 특히 수비 측면에서 1:1 대인 방어 능력이 눈에 띄게 모자란다는 약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대회 개막 직전에 서울에서 열린 튀니지와의 평가전과 마이애미에서 열린 가나와의 마지막 평가전을 통해 완벽하게 분석한 결과일 것이다.

이처럼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는 명언을 실제 축구 경기에서 분명하게 실현한 할릴호지치 감독 덕분에 알제리는 16강에 올라 독일이라는 전통 강호와 명승부를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7월의 첫날 아침에 열린 이 경기가 브라질 월드컵 중 손에 꼽을만한 명승부가 된 이유도 할릴호지치 감독의 변화무쌍한 전술 축구에 있다고 할만하다.

 7월 1일 독일과의 16강전에서 내세운 알제리의 선발 라인업

7월 1일 독일과의 16강전에서 내세운 알제리의 선발 라인업 ⓒ 국제축구연맹


할릴호지치 감독은 독일을 상대로 또 한 번의 변화를 줬다. 수비 형태는 한국을 상대로 할 때와 같이 파이브 백(굴람-할리시-벨칼렘-모스테파-만디)을 세웠지만, 조합은 역시 달랐다. 그리고 라센을 수비형 미드필더로, '슬리마니-페굴리-타이데르'를 공격형 미드필더로 세웠다. 맨 앞에는 수다니가 뛰었다. 페굴리 시프트라 이름붙일 수 있을 정도로 다소 파격적인 전술이었다.

그 결과 독일은 알제리의 역습에 여러 차례 흔들렸다. 큰 경기 경험이 많은 문지기 마누엘 노이어가 폭 넓게 뛰어다니며 알제리의 날카로운 역습 패스를 차단하지 못했다면 이번 대회 가장 큰 이변의 주인공이 탄생할 뻔한 경기였다.

득점 없이 이어진 연장전에서 독일의 교체 선수 쉬를레의 절묘한 힐킥에 골을 내준 것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알제리는 많은 축구팬들의 박수를 받기에 충분할 정도로 훌륭한 전술적 대응력을 보여줬다. 감독의 수준이 한 축구 팀을 놀랍게 변화시킬 수 있고, 아울러 상대 팀에게 큰 충격을 안겨줄 수 있다는 것을 할릴호지치 감독이 충분히 입증한 셈이다.

'작두 탄 족집게'? 벨기에 마크 빌모츠 감독

할릴호지치 감독이 상대 팀을 분석하는 능력이 뛰어나며 이에 따라 자신의 선수들에게 맞춤형 전술을 준비시킬 줄 안다면 벨기에의 마크 빌모츠 감독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경기 양상에 가장 적극적으로 대처해 소기의 성과를 올리는 능수능란함을 보여줬다고 평할 수 있다.

아마도 빌모츠 감독은 경기 전날 밤 호텔 뒤 으슥한 곳에 가서 몰래 들여온 작두를 타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 지금까지 네 경기 결과를 이렇게 만들어낼 수 없는 일이다. 그가 펼친 것은 축구가 아니라 만화가 아니었나 착각이 들 정도다. 뛰어난 전술가가 아닌 이름난 극 작가라 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매 경기 결정적인 순간에 그가 들여보낸 교체 선수가 큰 일을 해냈기 때문이다. 그 시작은 지난 6월 18일 벨루 오리존치부터였다. 알제리를 만나 엉겁결에 페널티킥 선취골을 내주고 질질 끌려가던 벨기에는 빌모츠 감독의 족집게 선수 교체 덕분에 짜릿한 2-1 역전승을 거뒀다.

65분에 바꿔 들여보낸 미드필더 펠라이니가 단 5분만에 멋진 헤딩 동점골을 성공시켰고, 후반전 시작과 동시에 들여보낸 오른쪽 측면 미드필더 메르텐스가 빠른 발걸음을 자랑하며 80분에 역전 결승골을 넣었다.

첫 경기에서 그런 것이 우연일 줄 알았지만 빌모츠 감독의 신기는 계속 이어졌다. 6월 23일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 열린 H그룹 러시아와의 두 번째 경기에서 57분에 바꿔 들여보낸 새내기 골잡이 오리지가 88분에 짜릿한 결승골을 터뜨린 것이다. 대부분의 상대 팀들이 루카쿠를 걱정할 때 빌모츠가 몰래 준비시킨 '비밀 병기'가 바로 그였던 것이다.

빌모츠 감독의 촉이 통한 오리지는 6월 27일 상 파울루에서 열린 경기에서도 60분에 바꿔 들어가 그로부터 18분 만에 위협적인 오른발 중거리슛으로 한국을 주저앉혔다. 오리지의 슛을 한국 문지기 김승규가 가까스로 쳐내기는 했지만 노련한 수비수 베르통엔의 밀어넣기까지 감당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벨기에는 미국과 만난 16강전 연장전에서도 교체 선수 로멜루 루카쿠가 빼어난 활약을 펼치며 2-1로 이겨 8강 반열에 당당히 올랐다. 빌모츠 감독은 연장전 시작 직전에 로멜루 루카쿠를 들여보내 단 3분 만에 선취골을 만들어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도록 만들었다.

루카쿠가 오른쪽 측면을 완벽하게 무너뜨리며 공을 몰고 들어가 꺾어준 공이 미국 수비수 다리에 맞고 흐르자 미드필더 데 브루잉이 오른발로 침착하게 차 넣은 것. 루카쿠는 이 활약도 모자라 105분에 데 브루잉의 찔러주기를 받아 왼발로 기막힌 결승골을 성공시켰다.

이쯤되면 한국 미아리에 모여 계신 점쟁이분들이 축구 팀을 하나 만들어 감독으로 모셔와야 할 판이다. 아마도 7월 6일 오전 1시 브라질리아에 있는 에스타디우 나시오날에서 8강 맞대결을 펼치게 될 아르헨티나 선수들이 우루과이를 지나서 있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아주 용한 점성술사를 모셔올 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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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알제리의 네 경기 포메이션 변화
1) 6월 18일 1시(벨루 오리존치, 알제리 1-2 벨기에)
FW : 마레스, 수다니, 페굴리
MF : 벤탈렙, 메자니, 타이데르
DF : 굴람, 할리시, 부게라, 모스테파
GK : 라이스 음볼리

2) 6월 23일 4시(포르투 알레그리, 알제리 4-2 한국)
FW : 슬리마니
MF : 벤탈렙, 자부, 브라히미, 페굴리
DF : 메스바, 할리시, 부게라, 메자니, 만디
GK : 라이스 음볼리

3) 6월 27일 5시(쿠리치바, 알제리 1-1 러시아)
FW : 슬리마니
AMF : 자부, 브라히미, 페굴리
DMF : 벤탈렙, 메자니
DF : 메스바, 할리시, 벨칼렘, 만디
GK : 라이스 음볼리

4) 7월 1일 5시(포르투 알레그리, 알제리 1-2 독일)
FW : 수다니
AMF : 슬리마니, 페굴리, 타이데르
MF : 라센
DF : 굴람, 할리시, 벨칼렘, 모스테파, 만디
GK : 라이스 음볼리

◎ 벨기에의 교체 선수들이 올린 공격 포인트
1) 6월 18일 1시(벨루 오리존치) : 벨기에 2-1 알제리
- 펠라이니(65분 교체 투입 - 70분 동점골), 메르텐스(46분 교체 투입 - 80분 역전 결승골)

2) 6월 23일 1시(리우 데 자네이루) : 벨기에 1-0 러시아
- 오리지(57분 교체 투입 - 88분 결승골)

3) 6월 27일 5시(상 파울루) : 벨기에 1-0 한국
- 베르통엔(78분 결승골, 60분 교체투입된 오리지 중거리슛-GK 김승규 선방-베르통엔 밀어넣기)

4) 7월 2일 5시(사우바도르) : 벨기에 2-1(연장전) 미국
- 데 브루잉(93분 선취골, 91분 교체투입된 루카쿠 오른쪽 측면 연결 수비 몸 맞고 브루잉 잡아서 오른발 슛 성공)
- 로멜루 루카쿠(91분 교체 투입 - 105분 결승골)
축구 월드컵 바히드 할릴호지치 마크 빌모츠 홍명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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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대인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합니다. 축구 이야기, 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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