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무 메인 포스터

▲ 해무 메인 포스터 ⓒ NEW


<살인의 추억>에서 감독과 각본가로 호흡을 맞췄던 봉준호, 심성보 콤비가 각기 제작과 감독으로 데뷔한 작품 <해무>가 14일 개봉했다. 개봉 첫 날 전국 17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영화는 올 여름을 뜨겁게 달군 <군도: 민란의 시대> <명량> <해적: 바다로 간 산적>의 뒤를 이어 극장가를 점령할 기세다. 김윤석을 비롯 박유천, 이희준, 문성근, 김상호 등 영화나 TV드라마를 통해 검증된 배우들을 다수 기용했다는 점과 한 척의 배 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라는 독특한 설정은 관객들의 흥미를 잡아끌기 충분해 보인다.

영화는 IMF 구제금융의 영향이 전국을 휩쓸고 있던 1990년대 후반, 여수를 배경으로 한다. 여수를 주름잡던 기억도, 만선의 기쁨도 옛 일이 된 전진호 선원들. 부진한 수확과 경영난으로 감척대상이 된 전진호를 살리고자 선장 철주는 밀항이라는 범법행위를 저지르고 선장을 포함한 여섯 선원은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위험에 휘말린다.

<샤이닝>의 구도, <알 포인트>의 설정

<해무>는 자연스럽게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과 공수창 감독의 <알 포인트>를 떠올리게 한다. 가장이 가족들을 위협한다는 구도가 그렇고 극단적 상황에 내몰린 인물들이 미쳐간다는 설정이 그렇다. 고립된 공간이라는 배경과 중심인물이 약자를 숨겨두고 지킨다는 설정 역시도 스릴러나 공포물의 전형적인 공식을 따른다. <샤이닝>과 <알 포인트>를 따로 언급했으나 구성부터 캐릭터, 사소한 디테일에 이르기까지 여러 공포영화들과 유사한 구석이 많은 작품인 것이다.

영화의 추동력은 처음으로 범법행위를 저지르게 된 전진호의 상황이다. 영화는 선원들이 단속을 나온 해경과 신경전을 벌이거나 밀항자들과 갈등을 빚는 상황을 통해 극적 긴장감을 조성한다. 이는 영화의 중반부에 이르러 극적 반전이 일어나기까지 영화를 이끌어가는 서사의 핵으로써 기능한다.

해무 이야기는 여섯 명의 선원이 탄 낡은 어선 전진호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 해무 이야기는 여섯 명의 선원이 탄 낡은 어선 전진호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 NEW


반전은 영화를 더욱 극적인 상황으로 몰고가지만 동시에 영화를 끌어온 추동력을 일거에 상실시킨다. 그리고 그 자리를 박유천과 한예리가 연기한 두 명의 캐릭터, 동식과 홍매의 존재가 차지한다. 이후의 전개는 홍매를 자신의 동료들로부터 지켜내야만 하는 동식의 이야기가 되고 마는 것이다. 약자가 자신보다 더욱 약한자를 지키는 것은 상당수 공포영화들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구도이지만 동시에 그만큼 효과적인 설정이기도 하다.

평이한 선택과 평범한 능력

문제는 이러한 설정을 살릴 만한 역량이다. 극적 긴장과 흐름을 깨지 않으면서 더욱 급박하고 인상적인 클라이막스로 이어가야 했던 영화가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하고 흔한 싸이코 공포물이 되어 침몰하고 만 것은 연출자의 역량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전형적이나마 효과적일 수 있었던 설정에도 심성보 감독의 거친 연출과 제한적인 캐릭터 표현이 섬세해야만 하는 스릴러의 감정선을 효과적으로 살려내지 못한 것이다.

기술적인 부분이지만 연출에 있어 평이하고 전형적인 표현방식을 고수한 건 결정적인 패인이다. 관객이 예상치 못한 것을 통해 충격과 공포를 전달해야 하는 장르의 기본자세를 잊고 평이한 템포로 일관한 것이 너무나도 아쉬웠다.

일례로 철주를 기관실로 유인한 동석이 천장에 숨어 있는 것을 관객들에게 미리 보여주고 한 템포 늦게 기습하는 장면으로 이어간다거나 어창에 경구가 들어오자 뒤에서 삽을 드는 홍매의 모습을 비추고 한 템포 후에 그를 가격하는 모습을 찍어내는 장면은 액션과 스릴러 모두의 장점을 잃게 만드는 안이한 연출이었다.

한 템포 빠르거나 한 템포 더 늦은, 쉽게 예상하기 어려운 연출이 절실했다. 친절하게 모두 보여줄 것이 아니라 관객이 예상하기 전에 기습하거나 기술적으로 극적 긴장감을 더 길게 끌어갔다면 평이한 설정이 단조롭게 전개되는 결과는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축구경기를 예로 들면 공을 잡고 골대의 위치를 확인한 후 공을 차기 좋게 밀어놓고 슛을 차는 것 같은 연출이었다. 키퍼가 미처 대비하기 전에 슈팅타이밍을 가져가거나 개인기로 보다 가능성 있는 상황을 만든 이후에 슛을 차야 골이 들어갈 가능성이 높아진다. 정직한 템포 속에 찬 평범한 슛은 키퍼를 긴장시키기 어렵다.

해무 기관실에 몰래 몸을 숨긴 홍매(한예리). 영화의 후반부는 그녀의 존재로부터 추동력을 얻는다.

▲ 해무 기관실에 몰래 몸을 숨긴 홍매(한예리). 영화의 후반부는 그녀의 존재로부터 추동력을 얻는다. ⓒ NEW


상황을 압도하는 상징의 난감함

각본가 출신의 감독답게 지나치게 도식적이고 상징적인 연출도 눈에 띄었다. 아마도 상당수 관객들이 실소를 터뜨렸을 동식과 홍매의 섹스씬은 눈앞에서 죽음을 목도하고 공포에 질린 남녀가 그에 대비한 생명과 사랑의 행위를 한다는 점에서 나름의 상징성이 있겠지만 그렇다해도 지나치다고 느껴졌다.

홍매를 위해 동식이 끓여온 라면은 생명과 희망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선원의 죽음과 시체의 수습은 죽음과 절망을 상징한다. 이런 대비는 영화가 보다 자연스럽게 녹여냈다면 훌륭한 상징적 배치로 이해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도식적인 캐릭터들과 너무 상징적인 나머지 우스꽝스럽게 느껴지는 연출이 어우러져 그 의미를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다.

영화의 결말 역시 실망스럽다. 때로는 엔딩이 영화 전체를 감싸 그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는 그런 결말을 가리켜 좋은 엔딩이라 말한다. 그런데 이 영화의 경우엔 어떠했나?

영화 막판 홍매의 선택은 이후에 삽입 된 6년 후의 장면을 고려하더라도 쉬이 이해하기 힘들다. 몇 가지 해석은 가능하지만 그렇다해도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감독이 관객들로 하여금 홍매의 선택에 대해 고민하게 하려는 열린 결말을 의도했다 할지라도 관객들이 그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못하기에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샤이닝>의 잭 니콜슨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김윤석을 비롯해 출연한 배우들은 안정적인 연기로 극을 이끌었지만 영화의 특성상 보다 많은 것을 보여줘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여러 명의 분산된 캐릭터들이 각자의 집착과 광기를 내보이지만 좀처럼 통합되지 않고, 명확한 대립구도와 단조로운 연출은 후반부의 폭주를 매력적으로 만들지 못했다. 영화가 극적 긴장감을 충분히 조성하지 못한 상태라면 <샤이닝>의 잭 니콜슨이 그랬듯 연기를 통해 강렬한 이미지와 존재감을 보이는 건 어땠을까 싶다.

전반적으로 많은 야심이 엿보였다. 공을 많이 들인 듯한 매력적인 오프닝이 인상적이고 기존에 찾아보기 어려웠던 소재와 설정은 관객들에게 새로운 이야기에 대한 기대를 안겨주기 충분했다. 영화에는 모습을 많이 드러내지 않았던 박유천과 한예리라는 배우를 발견했다는 점도 수확이다. 부족한 점이 많았지만 한국영화의 가능성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던 의미있는 영화였다. 심성보 감독의 다음 작품을 기대한다.


덧붙이는 글 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게재하였습니다.
해무 NEW 심성보 김윤석 박유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