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치게 되는 영화가 있다. 한 해 개봉하는 영화만도 2000편이 넘는 한국에서 영화평론가가 모든 작품을 보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마저 유명세를 얻지 못해 전업을 할 수 없는 대다수 평론가는 한 달에 채 열 편의 신작을 보는 일도 버거워하고는 한다. 자연히 초청받는 모든 시사회에 갈 수도 없는 노릇, 가까이 알고 지내거나 특별히 관심 가는 영화 몇 편을 보는 것이 고작일 때가 많다.
 
보는 영화보다는 걸러내는 영화가 훨씬 더 많은 것이 평론가의 삶이다. 때로는 제법 이름이 있고 규모가 큰 작품을 걸러낼 때도 있겠다. 놓쳐서는 안 되는 작품과 그냥 지나쳐도 될 작품을 구분하는 노하우가 작품을 읽어내는 눈만큼이나 정밀해진다는 점이 재미있다.
 
그러나 흘려보낸 모든 작품이 보지 않아도 되는 건 아니다. 이따금은 흘려보낸 작품이 의외의 담론을 빚어낸다거나 영화사에 남을 법한 성취를 이루기도 한다. 그보다는 못하여도 특별한 감상을 자아내는 작품을 수도 없이 마주한다. 그런 경우 어느 자리에서 대화를 나눌 때면 영화평론가가 어떻게 그런 영화를 안 보았을 수 있느냐고 타박을 받게 되기도 하는데, 지난 한 해로 치자면 내게는 <듄>이 꼭 그런 영화였다.
 
듄 포스터

▲ 듄 포스터 ⓒ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드니 빌뇌브와 마니악한 SF의 만남
 
<듄>은 할리우드가 야심차게 제작한 블록버스터 SF영화다. 어느덧 할리우드의 기수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 드니 빌뇌브의 연출작이기도 하거니와 티모시 샬라메, 젠데이아 콜먼의 존재감은 어느새 할리우드의 얼굴이 되었다 해도 과장이 아닐 만큼 커진 상태다. 프랭크 허버트의 원작 소설 또한 마니아 층 사이에선 전설적인 작품이니, 이를 마치 SF판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 시리즈, 못해도 <트와일라잇> 정도의 명성을 가진 시리즈가 되리라고 여긴 이가 무척 많았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현재 상영 중인 두 편만 놓고 보자면 시리즈는 전설과 잊힐 대작 사이 애매한 위치쯤에 머물고 있는 듯 보인다. 제작사인 워너브라더스 또한 모두 세 편의 시리즈를 처음부터 제작확정 짓지 않은 상태에서 첫 편의 흥행을 확인한 뒤 두 번째 편 제작을 승인했을 만큼 불안요소도 적지 않았다. 흥행성적 또한 썩 괜찮은 편이었으나 그렇다고 앞에 언급한 전설들에 비할 바는 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이 시리즈를 기대한다. 다음 개봉할 세 번째 편에서 기록적 시리즈가 되리라고 여기는 이가 적지 않다. 그것이 이제까지 보여준 이 시리즈의 힘이며 무기일 테다.
  
듄 스틸컷

▲ 듄 스틸컷 ⓒ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멸족된 가문, 살아남은 후예
 
<듄>은 모두 삼부작인 시리즈의 첫 편이다. 제 가문과 행성을 잃고 살아남은 도련님이 사막의 부족을 이끌고 일어나 전 우주의 패권을 도모하는 일대 성공담의 첫 장을 담당한다. 때는 서기로는 2만년도 더 된 원 미래, 한 명의 황제가 여러 행성을 지배하는 귀족가문들을 통합한 일종의 연방제 우주가 배경이다. 수많은 가문들 가운데서 아트레이데스란 가문이 있다. 아트레이데스는 황제의 명을 받아 우주 제일가는 자원인 스파이스가 잔뜩 매장된 아라키스 행성 개발작업에 착수한다.
 
그러나 어느 날 밤, 아라키스 행성은 기습을 받는다. 본래 사이가 좋지 않던 하코넨 가문과 황제의 직속 부대까지 개입된 기습이다. 내통자까지 준비된 공격에 아트레이데스는 그야말로 속수무책, 순식간에 가문은 가주 레토 아트레이데스 공작(오스카 아이작 분)를 잃고 멸문에 이른다.
 
다행히 생존자가 있다. 레토와 그 첩실 제시카(레베카 퍼거슨 분) 사이에서 태어난 후계자 폴(티모시 샬라메 분)이 제시카와 함께 살아남은 것이다. 이들은 사람이 살 수 없다고 여겨진 아라키스의 사막을 건너 생존하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그 과정에서 이 행성의 원주민 프레멘들과 만나고, 그들은 폴이 오래 전 예언된 종교적 구원자라 믿는다. 물 한 방울 나지 않는 사막을 푸르게 변화시킬 지도자 말이다.
  
듄 스틸컷

▲ 듄 스틸컷 ⓒ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온실 속 화초가 영웅이 되기까지
 
<듄>은 가문의 멸망을 겪은 폴이 프레멘 부족 중 하나와 조우하고 그들의 무리로 받아들여지는 과정을 담는다. 말하자면 시리즈의 첫 편으로 온실 속 화초가 영웅이 되는 첫 걸음을 떼기까지의 이야기인 것이다. 신화며 무협지 같은 영웅기가 흔히 그러하듯 탄생의 비화며 주인공의 태생적 불운, 새로운 세계와의 조우 등 고전적 설정이 착착 진행돼 간다.
 
그 사이에서 원작이 쓰일 당시 차용 가능했을 역사적, 사회적 모티프 또한 세계관 가운데 폭넓게 반영했다. 이를테면 황제 치하 연방제 국가를 우주와 행성들 사이에 구현해 놓은 점, 2차 대전 추축국의 복식과 건축을 아트레이데스 가문의 특색으로 반영한 점 등이 그러하다. 또한 사막의 원시부족과 자원을 캐려는 발달된 가문들 사이의 관계 또한 대항해시대 이후 제국주의 국가와 식민지 사이의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무엇보다 아라키스에서 생산되는 물질 스파이스의 존재는 마치 현대의 석유처럼 외딴 땅을 전쟁의 소용돌이 가운데로 몰아넣는다.
 
시리즈 첫 편인 <듄>의 가장 큰 매력은 거대한 세계관의 영화적 반영이다. 그 자체로는 가문의 멸문과 향후 주인공이 될 영웅의 첫 걸음 정도에서 그치고 있지만, 사이사이 보여 지는 이야기는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가 얼마나 장대한 세계관 가운데 있고, 또 그것이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괴리된 것이 아님을 알도록 한다.
 
듄 스틸컷

▲ 듄 스틸컷 ⓒ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부조리한 시대상의 메타포

여전히 세상엔 메시아를 기다리는 이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그를 중심으로 뭉쳐 성전이란 이름으로 전쟁을 치르려 한다. 또한 자원을 노리고 타국에 진입하여 원주민을 몰아내거나 착취하는 세력 또한 존재하지 않던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이야기가 아니란 점이, 또 그 이야기 가운데서 우리의 일면을 뽑아내 생각해볼 수 있다는 점이 <듄>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이라 하겠다.
 
누군가는 말하기를 인간은 다른 모든 것을 파괴하며 스스로를 발달케 하는 존재라고 하였다. 돌아보면 꼭 틀리지는 않은 것이어서 인간이 걸어온 길 뒤에 여러 문명이, 자연이, 수많은 동식물이 훼손되고 파괴되어 왔다. 생태계가 무너지고 지구의 수명 또한 그리 길게 남지는 않았으리라는 비관이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우주로 나가야 종을 존속할 수 있다는 과학자들과 사업가들의 주장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근 미래 인류의 선택일지 모른다. 그러나 파괴로부터 종을 유지해온 인류가 다른 생존의 방식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우리가 나아가는 우주 또한 같은 운명을 맞이하지 않으리라 누가 확언할 수 있을까.
 
수만 년 뒤 인류의 미래를 다룬 <듄>의 세계관은 바로 이 같은 시각으로 보자면 여전히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인류의 욕망과 파괴를 보여주고 있다. 권력을 위해 또 다른 이를 죽이고, 자원을 위해 또 다른 세력을 희생시키는 이들의 이야기가 과연 오늘과 얼마나 다른가.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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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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