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외부세계와 접점이 없어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된 어느 원시 부족에 한 학자가 들어가 살며 겪었다는 이야기다.
 
여느 문화권에서도 그러하듯 언어는 그를 써온 이들의 온갖 특성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사회적 자산이다. 어느 언어에선 십 수 가지 풍요롭게 분포하는 단어가 다른 언어에선 단 하나 쯤으로 퉁 쳐지곤 한다는 건 꽤나 유명한 일화다. 어느 언어엔 있는 말이 다른 언어에는 없어서 번역이나 통역을 할 때 곤란을 겪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다. 지구촌, 세계화란 말이 쓰임을 잃을 만큼 뒤섞인 이 시대에도 그런 단어가 있는 것인데 하물며 고립된 원시 부족이랴.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도 꼭 그와 같다. 학자가 원시부족에 들어가 함께 지내며 산 지 한참이 흘렀을 즈음, 그는 이 부족에게 어떤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단 사실을 알아챈다. 내일이다. 어제란 말도, 오늘이란 말도 있는데 내일이란 말이 없었단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싶겠지만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야깃거리가 되는 것이고.
 
굿바이 트라우마 스틸컷

▲ 굿바이 트라우마 스틸컷 ⓒ 반짝다큐페스티발

 
단어 하나가 바꿔내는 삶이 있다
 
흥미로운 건 어느 단어가 없는 것이 그저 없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학자가 오래 머물며 이 부족의 여러 특징점을 연구한 바, 이 부족에겐 미래와 연관된 온갖 개념들이 아예 없거나 상당히 약한 정도만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고 한다. 이를테면 희망이며 꿈, 저장, 저축, 인내 같은 것들. 비슷한 환경의 다른 부족에 비하여 내일을 예비한 여러 특징들이 잘 나타나지 않으니 이 부족의 여러 풍습들은 현실에 충실하고 과거에 집착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했던가. 말하자면 단어가 있어야 비로소 그와 연관된 온갖 개념이 활성화된다는 현대철학의 이론을 이 같은 연구가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굳이 이 이야기를 꺼낸 건 한 다큐멘터리 때문이다. 제2회 반짝다큐페스티발 일곱 번째 섹션의 마지막 작품으로 상영된 <굿바이 트라우마, 우리들의 장례식 - 너에게 이름을 줄게>(이하 <굿바이 트라우마>)가 바로 그 영화다. 유튜브 시리즈로 제작했다가 한 회를 따로 떼어 영화제에 출품한 것으로, 41분짜리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졌다. 감독은 이다솔과 김가은, 두 사람이 함께 맡았다.
 
영화엔 웬만한 사람은 따로 들어본 적 없었을 한 가지 단어가 등장한다. 영화 초반의 인터뷰에선 굳이 단어를 감추었다가 다큐가 한창 진행된 뒤 그를 드러낼 만큼 전체를 가로지르는 핵심적인 개념이다.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사유는 이 단어를 찾아낸 뒤에야 제 삶을 구렁텅이에서 건져냈다고 말한다. 도대체 어떤 단어이기에 그 발견만으로도 인간을 끌어올릴 수 있었던 것일까.
  
굿바이 트라우마 스틸컷

▲ 굿바이 트라우마 스틸컷 ⓒ 반짝다큐페스티발

 
싸우면서 크는 것? 남매폭력 피해자의 증언
 
​다 싸우면서 크는 거야. 쉽게들 내뱉는 그 말이 틀릴 수도 있다. 집에서, 학교에서 흔히 일어나는 싸움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가해자와 피해자가 확연히 나뉘는 폭력이 적지가 않은 것이다. 개중에선 가해자의 공격성이 피해자를 옭아매어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기는 경우가 여럿이다. 특히 위험한 것은 그 폭력성을 해소하지 않은 채로 가해자와 피해자를 한 공간에 방치하는 경우다. 가정폭력이 그와 같다.
 
<굿바이 트라우마>는 가정폭력, 그중에서도 남매폭력 피해를 주장하는 여성 사유의 이야기다. 어린시절부터 오빠에게 지속적인 욕설과 위협을 들었다는 그녀는 그로 인한 트라우마가 오래도록 잔존하여 제 삶을 갉아먹고 있음을 자각한다. 그로부터 중요한 결정을 내리니 다름 아닌 저의 장례식이다. 과거와 현재를 단절하고 트라우마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운 삶을 새로 쓰기 위하여 과거의 저를 장례지내겠다는 계획이다. 41분짜리 중편다큐로 제작된 영화는 제 장례식을 주관하는 주인공 사유의 인터뷰와 그녀가 초청한 두 친구와의 대화, 그들이 함께 치르는 예식으로 꾸려진다.
 
영화의 절반쯤을 차지하는 인터뷰는 사유가 겪어온 폭력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알도록 한다. 가족들의 발소리를 구분하고, 누가 들어올 수 없게 문고리를 붙들어 잡으며, 책상 아래로 기어들어 안전함을 느꼈던 시간들이 하나둘 언급된다. 오빠에게 당한 폭력이 제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도 인지하지 못하던 시절, 제가 그 폭력의 자장 아래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된 이야기, 그것이 가정폭력이며 남매폭력이었음을 의식하기까지의 과정도 담아낸다. 그녀가 종종 들었다는 '원래 남매는 그러면서 크는 것 아니냐'는 물음의 근저에 폭력의 양상과 파급에 무지하고 그를 알려 하지도 않는 무관심이 있음을 알게 한다.
 
굿바이 트라우마 스틸컷

▲ 굿바이 트라우마 스틸컷 ⓒ 반짝다큐페스티발

 
트라우마 떠나 보내는 피해자의 용기
 
특히 남매폭력이라는 개념을 발견한 일은 그녀에게 인식의 전환점이 되어준다. 형제가, 특히나 오빠와 여동생이 함께 자라다보면 조금쯤 욕설도 듣고 조금쯤은 얻어맞는 날도 있다는 것, 이것이 세상에 널리 퍼진 흔한 인식이 아닌가. 굳이 인식이라고만 할 수도 없는 것이 오빠와 함께 자라며 욕을 듣거나 얻어맞은 경험이 한 번도 없다 말하는 이가 그렇지 않은 이보다 훨씬 적을 것이 자명한 일이다.
 
그렇다곤 하여도 남매 사이의 폭력이 그래도 좋은 것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함께 자라며 겪는 분쟁들과 그 분쟁의 잘못된 해소법으로서의 폭력을 방치할 경우 그는 더 이상 형제의 건전한 성장과정에서 겪게 마련인 시행착오일 수는 없는 것이다. 동등하고 경쟁하는 관계가 아닌 함부로 대하는 착취와 종속의 관계가 되고 나면 가해자와 피해자가 구분되고 그들 서로가 모두 망가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의 수많은 가정 가운데 과연 몇이나 분쟁과 폭력이 어떠한 후유증도 남기지 않고 지나가도록 풀어내고 있는가 말이다.
 
사유는 남매폭력이라는 단어를 획득하면서 저를 옭아맨 오랜 굴레에서 조금쯤 벗어날 수 있었다 전한다. 단어를 얻고 나서야 제가 겪은 일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그 가해와 피해를 나누며 그것이 남긴 파급이 어떠한 것인지를 바로 볼 수 있는 힘을 얻어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언어가 지닌 힘이 아니겠는가.
 
반짝다큐페스티발 포스터

▲ 반짝다큐페스티발 포스터 ⓒ 반짝다큐페스티발

 
용기를 세우는 이야기
 
영화의 나머지 절반은 장례식이다. 사유는 지난 아픔으로부터 결별을 선언하고 저의, 또 저의 오빠의, 지나간 고통의 세월에 대한 장례식을 준비한다. 영정사진으로 쓸 그림을 마련하고, 글을 쓰고, 친구들을 초대하며, 몇 가지 아기자기한 상징적 절차들을 만들어 저를 찾은 이들과 함께 소화한다.
 
스스로의 상처와 직면하여 그를 극복하려는 발버둥은 얼마나 대견한지. 또 친구의 노력을 가상히 여겨 자리를 함께 한 벗들의 우정은 어떠한가. 이들이 함께 무엇을 만들고 빚었다가 지우고 허무는 과정이 아기자기 어여쁘게 담겼다. 과거를 죽여 새 장을 열겠다는 마음가짐 뒤엔 그만한 각오와 절실함이 있다. <굿바이 트라우마>는 트라우마를 설명하는 걸 넘어 그 각오와 절실함 또한 내보이려 시도한다.
 
살다보면 누구나 상처를 입는다. 삶은 공평하지 못하여 상처를 입힌 자보다 입은 자가 굴레를 지는 경우를 수시로 목격한다. 어쩔 수 없다고 주저앉아 포기하는 건 흔한 일이다. 반면 떨치고 일어나 그건 참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건 드문 일이다. 우리는 그를 용기 있다고 말한다. 그럼에 여기 이 다큐가 적어도 용기를 세우는 작품이라고는 적을 수가 있겠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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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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