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라라랜드>의 포스터. 아름다운 영화이다.

영화 <라라랜드>의 포스터. 아름다운 영화이다. ⓒ 판씨네마(주)


흔히 '꿈은 이루어진다'고 말들 하지만 내가 사는 저잣거리에선 이뤄지는 꿈보다 좌절되는 꿈이 수십 곱절이다. 아무리 공을 들여도 병아리가 될 수 없는 무정란처럼, 눈물겨운 노력에도 고꾸라지는 꿈들이 부지기수다. 세상 사람들이 누구나 김연아와 박지성이 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냉혹한 현실 가운데선 꿈은커녕 상처 입은 자존감을 추스르기에도 벅찬 청춘이 너무나도 많다. 

정말 옛사람들은 청춘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믿었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한없이 위태로워 오래 지속하기 어려운 걸 가리켜 아름답다고들 하니까. 풀잎에 맺힌 이슬이나 누구도 밟은 적 없는 흰 눈밭, 매우 아름다운 여인의 미소와 하루의 찌꺼기를 태우는 듯한 석양 같은 것들 말이다. 

그렇다. 아름다운 건 오래 지속하기 어렵다. 디즈니 만화영화에서 늘 등장하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부류의 결말은 현실에선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현실은 그보다는 훨씬 더 비극적이다. 역사를 보자. 일제 치하 36년, 다시 그만큼 참혹했던 독재정권이 있었다. 그런 뒤 잠시 잠깐 꽃이 피었던가. 세월은 여전히 냉혹하고 행복은 아직도 멀기만 하다. 꿈은 영양실조 걸린 해바라기처럼 고개를 숙였고 청춘은 바짝 마른 모래알처럼 부서져 나가며 삶은 밤샘근무 끝에 돌아온 외주업체 직원처럼 털썩 무너져내린다. 이것이 영화라면 비통하기 짝이 없는 누아르일 것이다.

정말 그런가? 정말 이놈의 세상은 헤어나올 길 없는 한 편의 비극인 것일까? 

사랑을 등대삼아 꿈으로 전진하는 
 
 등대 불빛을 쫓아 항해하는 범선처럼, 오직 꿈을 향해 전진하는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 분)과 미아(엠마 스톤 분).

등대 불빛을 쫓아 항해하는 범선처럼, 오직 꿈을 향해 전진하는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 분)과 미아(엠마 스톤 분). ⓒ 판씨네마(주)


다미엔 차젤의 신작 <라라랜드>는 세상이 비극적인 것들로 가득하진 않다고 역설하는 작품이다. 비록 바보만이 꿈을 꾸고 청춘은 부서지며 삶은 무너지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여기 내가 너를 지켜보고 있다고 번쩍 손을 들어 응원하는 영화다. 전작 <위플래쉬>의 주인공 앤드류가 드럼과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플렛처 선생의 파괴적인 지도를 이겨냈듯이 꿈을 향한 열정 하나로 비루한 삶을 몰아치는 주인공들이 끝내 나름의 성취를 거두는 모습을 매력적으로 그려냈다.

영화의 주인공은 통장잔고부터 냉장고와 자존감까지 텅텅 빈 세바스찬이다. 그는 보험 없는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서도 영혼 없는 연주는 하지 않는 위대한 무명 재즈 피아니스트로 언젠가 재즈 연주자들이 모여 공연하는 클럽을 만들어 몰락하는 재즈를 지켜내겠다는 꿈을 품고 있다.

꿈은 높지만 현실은 시궁창인 세바스찬 앞에 미아라는 여자가 나타난다. 배우지망생인 그녀는 할리우드 영화사 스튜디오 안에 있는 카페에서 점원으로 일하며 언젠가는 잉그리드 버그먼 같은 대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키워간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쉽나. 오디션이란 오디션엔 모두 지원하지만 번번이 떨어지는 탓에 다 집어치우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든다. 

세상이 알아보지 못한 가난한 음악가와 아직 날개를 펴지 못한 배우지망생의 만남은 할리우드 고전 멜로물이 그러했듯 자연스런 로맨스로 이어진다. 세바스찬과 미아는 프레드 아스테어가 나오는 오래된 뮤지컬에서처럼 춤추고 노래하며 서로에게 익숙해지더니 이내 <이유없는 반항>의 짐과 주디가 되어 그리피스 천문대를 휩쓸고 다니다가 미아가 동경한 <카사블랑카>의 엔딩을 몸소 재현하며 이야기를 갈무리한다. 

감독 다미엔 차젤은 이 과정에서 할리우드는 물론 유럽과 동양의 고전부터 최신작까지 영감을 주는 영화라면 가리지 않고 끌어와 변형해 쓰는 무지막지함을 과시한다. 영화 좀 보았다는 관객이라면 <라라랜드>에 크고 작은 영향을 준 영화를 십수편은 꼽을 수 있을 텐데, 감독 자신이 대단한 영화광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차젤은 여기에 특유의 리드미컬한 편집능력을 한껏 살려가며 관객을 매력적인 세계로 이끌어간다. 

바보만 꾸는 꿈, 부서지는 청춘, 무너지는 삶을 위하여
 
 현실서는 좀처럼 벌어지지 않는 이야기. 그래서 더 매력적인 이야기.

현실서는 좀처럼 벌어지지 않는 이야기. 그래서 더 매력적인 이야기. ⓒ 판씨네마(주)


꿈과 사랑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공간, 그곳이 바로 <라라랜드>다. 사랑만 있다면 중력을 무시한 채 하늘을 날아다니고 꿈과 열정이 있다면 모두가 끝내 성공하는 세계가 펼쳐진다. 감독 스스로 '이것은 환상이다'라고 말하는 듯한 도입을 통과해 도착한 자리에는 시공간을 특정할 수 없는 소품이 한데 뒤엉키고 보랏빛 하늘이 와이드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당연히 현실이 아니다. 라라랜드(La La Land)다.

이와 같은 세계를 창조하면서까지 다미엔 차젤이 전하고픈 건 무엇이었을까. 답은 오직 그 자신만이 알겠지만 나는 이 영화를 한 편의 영웅담으로 보았다. 열망으로 가득 찬 주인공이 자신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제물로 바쳐가며 갖은 역경을 뚫고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하는 이야기. 영화가 막을 내릴 때 주인공은 처음보다 더 나은 인간이 된다. 포상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감독은 이 모두를 아름답게 포장한다. 예쁜 조각이 든 스노우볼처럼 유리벽으로 밀봉해, 위태로운 아름다움이 현실 가운데 아스라이 사라지지 않도록 단단히 잡아맨다. 

세바스찬과 미아의 이야기는 현실 가운데선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종류의 것이다. 여전히 꿈은 바보들만 꾸고 청춘은 부서져 나가며 삶은 오늘도 5mm쯤 무너지는데 누가 스타가 되고 누가 재즈클럽을 여는가. 하지만 그래도 좋다. 때로는 이런 영웅담이 결코 내지 못했을 용기를 주기도 하는 법이니까. 그저 그의 응원이 효과가 있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라라랜드 판씨네마(주) 다미엔 차젤 라이언 고슬링 김성호의 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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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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