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미네이터 제니시스 메인 포스터

▲ 터미네이터 제니시스 메인 포스터 ⓒ 롯데엔터테인먼트


스카이넷이라는 컴퓨터 시스템이 인간을 지배하는 미래, 인류의 마지막 희망인 저항군 사령관 존 코너가 심복 카일 리스를 과거로 파견한다. 저항군의 구심점 존 코너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려 터미네이터 T-800을 과거로 보낸 스카이넷의 계획을 저지하기 위해서다. 시간여행을 통해 현재를 바꾼다는 개념은 SF장르의 오래된 설정이지만 <터미네이터>만큼 이를 효과적으로 살린 작품도 드물다. 지난해 꼬이고 꼬인 시리즈의 난제를 멋지게 해소했다는 평을 받은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의 선택은 기실 제임스 카메론의 구상으로부터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것이었다.

이번에 나온 <터미네이터 제니시스> 역시 제임스 카메론의 전작에 기반을 두고 있다. 속편의  연출을 맡은 앨런 테일러 감독은 전작의 이야기를 반복하거나 부정하는 대신 그 기반 위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펼치는 안정적인 선택을 했다. 타임라인이라는 개념을 통해서다. 그는 한 영화에 두 개 이상의 타임라인을 공존시키는 선택을 통해 시간여행으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의문을 해소하려 했다.

결과적으로 이번 편에서 과거로 간 카일 리스는 다른 타임라인의 자신이 만들어 놓은 과거에 적응하는데 성공했고 그로부터 또 다른 타임라인의 자기를 만나 자신과 같은 길을 걷도록 힌트를 남겼다. 이를 통해 5편의 해피엔딩은 이번 편을 뒤따르는 모든 타임라인에서 공유할 수 있는 결말이 되었다. 시리즈의 종결이 이뤄지는 듯싶었을 정도로.

하지만 이번 편의 카일 리스에게 제니시스를 파괴해야 한다는 기억이 남아있었음을 떠올리면 그가 스카이넷을 물리친 첫 번째 카일 리스가 아니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최초의 승자와 그가 승리에 이르는 이야기는 아직 영화로 그려진 바 없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소하지 않고 시리즈를 끝낼 수는 없기에 3편은 결말일 수 없다. 대부분의 악을 제거했음에도. 이 역시 흥미로운 지점이라 하겠다.

사실상 이번 편의 카일 리스와 사라 코너, T-800은 <터미네이터> 시리즈를 관통하는 모든 악을 해소해 시리즈를 절반쯤 종결시켰다. 첫 번째 승리와 쿠키영상의 찝찝한 사족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제임스 카메론이 5편 격인 이 영화를 가리켜 자신의 작품을 잇는 <터미네이터> 3편이라 평한 것도 이 때문이다. 오직 이 영화만이 제임스 카메론의 원작을 제대로 이어받았으며 나름의 방식으로 결말지었기 때문이다.

오리지널 시리즈 팬을 향수에 적시고

터미네이터 제니시스 부녀의 분위기를 풍긴 사라 코너(에밀리아 클라크 분)과 T-800(아놀드 슈왈제네거 분)

▲ 터미네이터 제니시스 부녀의 분위기를 풍긴 사라 코너(에밀리아 클라크 분)과 T-800(아놀드 슈왈제네거 분) ⓒ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초반 세 명의 부랑아가 T-800에게 옷을 빼앗기는 신이나 노숙자가 카일 리스의 시간여행을 목격하는 장면, 카일 리스가 마트에서 옷과 신발을 챙기는 신, 무엇보다 T-800이 "I Will be Back!"이라 말하고 떠나가던 장면은 오리지널 시리즈 팬의 향수를 자극하는 명장면이다. 단순히 동일한 상황을 묘사하는 걸 넘어 새로운 타임라인과의 조우를 멋들어지게 표현한 이 장면을 통해 우리는 앨런 테일러가 제임스 카메론의 유산을 받아들이기 위해 얼마나 고민했는지를 절로 느낄 수 있다.

할리우드 영화팬이라면 인상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장면이 또 하나 있다. 카일 리스가 마지막 작전을 앞둔 존 코너에게 전쟁이 끝난 뒤 무얼 할 것이냐 묻는 장면이 그것이다. 이때 존 코너는 "맥주나 한 잔 해야지"하고 답하는데 이는 브라이언 드 팔마의 역작 <언터처블>을 떠올리게 한다. 이 영화에서 금주령을 어기고 밀주를 유통해온 폭력조직의 두목 알 카포네(로버트 드니로 분)와 숙명의 대결을 벌이던 엘리엇 네스(케빈 코스트너 분)는 "검사님, 금주법이 폐지된다는데 어떻게 생각하시죠?"라는 질문에 "그럼 한 잔 해야지."라고 답한 바 있다. 인물의 멋을 단적으로 드러낸 이 대사를 <터미네이터 제니시스>가 존 코너의 입을 통해 변주한 것이다.

이밖에도 흥미롭게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볼거리가 산재해 있다. 할리우드의 유망한 작품에서 비중 있는 역할로 출연한 이병헌부터 기존 시리즈에선 존재감에 비해 노출이 제한되었던 존 코너의 활약, 무엇보다 시리즈 최대의 적 스카이넷의 전격적인 등장까지 인상적인 부분이 한 둘이 아니다.

더불어 1편부터 이어져 온 인간과 기계의 대립이 사실상 이번 편에서 끝장난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인공지능 제니시스에서 진화한 스카이넷이 T-800에게 패퇴하는 장면은 기계로부터 휴머니즘이 승리를 거뒀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 순간이다. 인간과 접촉하며 인격을 갖게 된 T-800과 기계 그 자체인 스카이넷의 대결은 곧 시리즈 전체의 주제이며 결말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의미심장한 오프닝과 어수선한 엔딩의 기묘한 결합

터미네이터 제니시스 <왕좌의 게임> 이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전문 연출자로 거듭난 앨런 테일러

▲ 터미네이터 제니시스 <왕좌의 게임> 이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전문 연출자로 거듭난 앨런 테일러 ⓒ 롯데엔터테인먼트


하지만 이 모든 장점을 퇴색시키는 결말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중반 이후 필요이상 늘어지는 전개부터 절로 실소가 나는 상황까지가 모두 그렇다. 혁신적 설정과 영상, 액션을 선보인 제임스 카메론의 유산을 계승하기엔 앨런 테일러의 신작은 너무나도 얌전하다. 액션은 트렌드를 벗어나지 않고 촬영 역시 기본에 충실하다.

구성과 전개도 새롭지 않다. 감격적이기까지 했던 초반부가 평범한 중반부를 거쳐 억지스럽고 졸렬한 결말부에 도달했을 때 이 영화에 대한 내 기대도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일말의 개연성도 없는 터미네이터의 진화와 밑도 끝도 없이 벽을 박차고 들어오는 T-800, 영화 전체의 의미를 격하시킨 쿠키영상은 가장 호의적인 관객조차 실망시키기 충분한 것이었다.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는 용두사미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훌륭한 전반부와 졸렬한 후반부가 뒤엉킨 영화였다. 작품성에 대한 추구가 자본에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한 것일까. 속편을 위한 억지스런 전개가 전반부의 품격 있는 변주를 무너뜨렸다고 생각한다. 진화한 T-800의 귀환은 "I Will be Back!"을 외치고 다시 돌아왔던 그 시절의 감동과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 새로운 전설을 써나가기 위해선 이보다 몇 배쯤 치열한 고민이 이뤄졌어야 마땅한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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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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