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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500년 도읍지 개경을 평정한 반란군은 궁성수비대를 해체하고 군 요직을 장악했다. 최영이 없는 고려의 병권은 고스란히 이성계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병권뿐만이 아니라 조정의 요직도 점령했다. 군 서열상 예우차원에서 정벌군 선임지휘관 조민수가 좌시중에 올랐고 이성계는 우시중에 올랐다. 무인(武人)이 문인(文人)의 관직을 꿰차고 겸직한 것이다.

무인이 문인정권을 접수하는 모양새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5.16 직후 육군 소장이던 박정희는 군 선배이며 육군참모총장인 장도영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추대하고 자신은 부의장에 자리를 잡았다. 계급장을 달고 혁명정부를 움직이던 모습도 어쩜 그렇게 똑같다. 훗날 장도영은 박정희에 의해 반혁명 혐의로 숙청되었다.

@BRI@정권을 장악한 신흥 군부세력은 원나라의 연호 지정을 버리고 명의 연호 홍무를 따랐다. 구파 군벌을 쓸어내기 위하여 최영 휘하의 김약체, 안소, 인원보, 정승가, 정희계 등 장수들을 귀양 보냈다. 매관매직에 찌들고 부패한 군벌을 청산한다는 명분이었지만 반대파의 숙청이다.

정희계는 귀양 가는 길에 풀려났다. 이성계의 제2부인 강씨의 먼 친척조카였기 때문이다. 강씨의 입김이 이성계에게 얼마나 강하게 작용하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다. 정희계는 훗날 이성계를 도와 개국공신에 이른다. 개국 당시 '정씨가 삼한을 멸한다'는 도참설(圖讖說)에 정도전, 정충과 함께 등장하는 인물이다.

"왕을 갈아 치워라"

반란군은 개경 점령 5일째 되던 날 우왕에게 강화도로 떠나줄 것을 요구했다. 반란군이 혁명군으로 탈바꿈하려는 순간이다. 우왕은 완강하게 버텼다. 하지만 우왕에게는 힘이 없었다. 받쳐줄 군벌도 지켜줄 세력도 없었다. 반란군의 위세에 눌려 공민왕비에게 옥쇄를 맡겨두고 강화도로 떠났다. 이제는 새로운 왕을 세울 차례다.

반란군의 실질적인 실력자 이성계는 우왕의 친자식 중에서 새로운 왕을 옹립하는 것을 꺼렸다. 신돈의 핏줄이라는 의혹 때문이다. 하지만 조민수는 근비와 우왕 사이에서 태어난 창(昌)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이에 조정자 역할을 자임하던 문하시중 이색(李穡)이 창(昌) 쪽으로 기울였다.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힘을 가진 이성계를 견제하기 위해서다.

이성계는 무인이었지만 이색은 노련한 정치가였다. 어린 나이에 원나라에 유학하여 국자감에서 공부했다. 변방의 작은 나라 고려 출신 영재의 영특함을 보여줬을까. 원나라 조정에서 실시한 회시(會試)에 1등, 전시(殿試)에 2등으로 합격하여 한림원 편수관으로 재직하다 귀국하여 고려의 성리학을 중흥시킨 학자출신 정치가다.

최충헌의 무신정권이 자행한 무반정치의 폐해를 익히 잘 알고 있는 이색은 화산 폭발하듯 기세가 오른 반란군을 연착륙시켜 고려 조정을 안정시키고 문인 통치시대로 가려는 복안을 가지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반란군의 머리는 둘이었다. 조민수와 이성계의 틈바구니를 파고들기로 한 것이다.

밀고 밀리는 협상 끝에 창(昌)으로 최종 결정했다. 창은 이성계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이성계는 왕씨 종친 중에서 자신과 가까운 사람을 옹립하려 했다. 그런데 창으로 낙점되었다. 이것이 의문스럽다. 막강한 힘을 가진 이성계가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지 않고 양보한 것이다. 힘을 가진 자의 여유일까? 회군은 했지만 혁명의 의지는 없었단 말인가?

혁명군으로 다시 태어난 반란군

9살, 어린 창(昌)이 왕으로 등극했다. 창왕이다. 평양에서 정벌군으로 출정했을 때 군 최고 통수권자는 우왕이었다. 위화도에서 회군한 반란군이 자신의 부대 최고사령탑을 폐하고 새로운 왕을 옹립했으니 이제 반란군이라는 딱지를 떼고 혁명군이 된 것이다. 반란군이 반란을 기정사실화하고 혁명군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다.

하지만 뭔가 떨떠름하다. 모름지기 화끈한 혁명이라면 혁명군을 지휘한 사람이 등극해야 명실상부한 혁명인데 전왕의 아들을 옹립했으니 절반의 혁명이다. 이로부터 4년 후 이성계가 조선을 개창하고 태조 임금으로 등극했다. 세계 혁명사에 유례를 찾아보기 쉽지 않은 참으로 긴 혁명 기간이었다. 이것 때문에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학자는 논한다 :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은 명백한 반란이었으나 무너져 내리는 고려를 일으켜 세우려는 충정이었다. 회군을 윤허해달라는 주청이 그것을 입증한다. 회군 당시 역성혁명은 염두에 두지 않았으나 조선 개국은 역사의 흐름이 선택한 차선책이었다. 국정에 참여한 이후 백성들의 원성의 핵이었던 토지개혁을 시행한 것이 그것을 반증한다.

학자는 논한다 :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은 어떠한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명명백백한 반란이다. 군인의 신분으로 목숨처럼 지켜야 할 군령을 어겼고 군 최고통수권자 왕의 명령을 거역했기 때문이다. 4년 후 등극은 혁명기간이 길었을 뿐이다.

왕위에 오른 창왕은 왕이로되 허수아비였다. 문하시중 이색이 국정을 이끌었지만 군권을 장악하고 있는 이성계의 동의 없이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하지만 조민수는 선임 도통사이고 이색은 문하시중이다.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권력이 삼각을 이루며 견제하고 갈등했다.

개경으로 돌아가자

한편, 어머니 한씨와 서모 강씨를 모시고 함흥으로 피난길에 올랐던 이방원은 철원을 지나면서 위기를 맞았다. 뒤쫓던 관군들이 체포하려 들었기 때문이다.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다. 관군의 추격권에서 벗어난 방원은 함흥 가는 길목 이천(伊川) 한충(韓忠)의 집에서 유숙하며 사태를 관망하기로 했다. 한충은 한씨 부인의 친척 되는 사람이다.

방원은 아버지를 믿었다. 아버지가 행한 위화도 회군이 옳고 그름을 떠나 아버지의 결단이 성공하리라고 확신했다. 전리정랑이라는 관직에 있으면서 피부로 느낀 백성들의 정서가 그랬다. 그래도 상황은 유동적이라 마을 청년 100여명을 모아 가족을 호위하게 했다. 한충의 집에서 유숙한 지 10여일이 되던 날, 개경의 상황이 종료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구파 군벌의 수장 최영 장군이 귀양길에 오르고 우왕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니 이천에 더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아버지의 승리가 확정되었다니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돌아오라는 아버지의 전갈을 받기 전에 개경으로 발길을 돌렸다. 피난민 대열을 이끌고 남의 눈을 피해 움직이던 방원은 자신이 개선장군이라도 된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개경으로 향했다.

방석과 방번을 데리고 피난민 행렬에서 잠시나마 방원과 같이 생활했던 강씨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시간이었다. 약관 21세의 나이 어린 청년이 아버지를 대신하여 가족을 보호하는 모습에서 든든함을 느꼈다. 나이 차가 몇 살 되지 않은 남남임에도 생모와 같이 대해주는 예우에서 고마움을 느꼈다.

위기에 닥쳤을 때 침착하게 대처하는 행동에서 흔들리지 않은 냉철함을 발견했다. 나아갈 때 망설이지 않고 나아가는 과감함과 멈출 때 냉혹하게 멈추는 결단력에 두려움을 느꼈다. 훗날 이성계에게 "내가 방원이 같은 아들을 낳았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푸념하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돌아온 사나이에게 몰려드는 사람들

방원의 행렬이 개선장군처럼 개경에 도착했다. 이천에서 출발할 때는 100여명에 불과했는데 개경에 도착했을 때는 300여명으로 불어났다. 개경에 도착한 방원의 주위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때 모여든 사람이 조영규, 이부, 조영수, 고여 등이다.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우왕을 몰아내고 병권을 잡은 사람은 이성계인데 사람들이 이방원의 주위에 모여든다는 것이 기이한 일이다. 심지어 요동정벌군에 나섰다가 이성계와 함께 회군에 동참한 남은, 조인옥 등 이성계의 심복들도 머리를 조아리며 이방원을 찾아왔다. 차세대 주자라고 생각해서일까? 떠오르는 태양이라고 판단해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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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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