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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의 철령위 계획은 고려 조정을 혼란에 빠트렸다. 친원정책을 펼치며 전횡을 일삼던 이인임이 처단되고 기사회생 살아나기 시작한 성리학자들도 선택의 파도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영토수호냐? 학문이냐? 갈등의 기로에 선 것이다. 당시 학자들에게 야만스러운 오랑캐는 악(惡). 오랑캐를 몰아낸 명나라는 선(善)이라는 이분법이 은연중에 존재했다.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려는 것은 우리의 영토에 쐐기를 박아 고려를 명나라의 속국으로 만들려는 계략이므로 분쇄하자는 의견에는 모두 공감했다. 하지만 각론에 들어가서 맞대응하자는 문하시중 최영과 무모한 공격은 화(禍)를 부른다는 문하부시중 이성계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BRI@이에 문하찬성사 정몽주가 이성계의 의견에 동의하고 나섰다.

"중원에서 원나라를 몰아낸 명나라의 사기는 욱일승천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군사를 일으키면 백성들의 원망이 클 것이고 백성들의 원망을 받은 우리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져 패할 염려가 있으므로 명나라를 치는 것은 시기에 적절하지 않습니다."

학자들의 논리 저변에는 성리학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충과 효는 성리학의 기본 덕목이다. 여기에 덧붙여 도덕성이라는 숭고함마저 곁들여져 있으니 범접한다는 것은 학자의 도리가 아니다. 이러한 학문이 몸에 밴 학자들로서는 머리를 조아리기로 한 명나라를 공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황제가 있는 대국 명나라를 친다는 것은 불충으로 받아들였다.

자식은 어버이를 정성껏 섬겨야 하고(父爲子綱), 신하는 임금을 섬기는 데 있어 의리가 있어야 한다(君爲臣綱)는 것은 성리학자들의 기본적인 불문율이었다. 서양종교가 들어오면서 사상과 문물을 전파했듯이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이 땅의 학자들은 '동굴의 우상'이 되었다. 그래서 성리학이 유교라는 종교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사냥 길에 나선 왕과 왕비, 그리고 장수

명분과 논리대결에서 학자들의 지원사격을 받은 이성계의 주장에 밀린다고 생각한 우왕과 최영은 사냥을 빌미로 개경을 비우고 해주로 떠났다. 우왕의 제2계비 영비(寧妃)도 동행했다. 영비는 최영의 딸이다. 이인임에 의존하던 우왕은 이인임이 실각하고 최영이 등장하자 최영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자 최영의 딸을 원했다.

형식적인 몇 번의 사양을 거쳐 3월에 입궁했다. 왕명을 거역할 수 없는 신하의 입장이었을까? 72세의 노구에 권세가 탐이 나서 그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최영은 신하로서 더는 오를 곳이 없는 문하시중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최영의 딸이 우왕의 계비가 되었다. 우왕을 만류하고 설득하여 정중히 물리쳤다면 고려조의 마지막 보루 최영의 명예가 한층 빛났을 것이다.

우왕의 해주 행차는 사냥이라는 명분을 빌렸지만 대규모 군사가 동원되었다. 궁성 친위대와 최영장군 휘하의 정예부대가 호종하였다. 사냥 행차에는 과하게 넘치는 군사였다. 그뿐만 아니라 관직에 봉직하고 있던 이성계의 아들 방우와 방과를 차출하여 동행시켰다. 이는 최영의 계책이 숨어 있었다. 해주에서 사냥은 구실이었고 군사훈련이 펼쳐졌다. 사냥을 마친 우왕이 군사를 이끌고 서경(평양)으로 옮겨 이성계를 불렀다.

"요동을 정벌하라"

왕명이 떨어졌다. 장수가 왕명에 거역하면 반역이다. 반역은 곧 죽음이다. 하지만 이성계는 반대하고 나섰다.

"지금에 출사(出師)하는 일은 네 가지의 옳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에 거역하는 것이 한 가지 옳지 못함이요,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두 가지 옳지 못함이요, 온 나라 군사를 동원하여 멀리 정벌하면 왜적이 그 허술한 틈을 탈 것이니 세 가지 옳지 못함이요, 지금 한창 장마철이므로 활(弓)은 아교가 풀어지고 많은 군사들은 역병(疫病)을 앓을 것이니 네 가지 옳지 못함입니다."<태조실록>

네 가지 근거를 들어 고려군이 요동에 출정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고 주장했다. 이를 이성계의 4대불가론(4大不可論)이라 한다.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친다면 이기기 어렵다.
둘째, 지금은 농사철이므로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옳지 못하다.
셋째, 고려군이 요동으로 출정한다면 남쪽에서 왜구가 쳐들어올 위험이 있다.
넷째, 여름철이라 무덥고 비가 많이 내려 싸우기 어렵고 질병이 돌 염려가 있다.

이에 대하여 문하시중 최영이 반박하고 나섰다.

첫째, 명나라는 원나라와 전쟁을 치르고 있어 크게 힘을 쓸 수 없으며
둘째, 요동은 곡창 지대이므로 지금 공격하면 많은 군량을 모을 수 있고
셋째, 명나라 군대는 비가 많이 오는 여름철에 싸움을 꺼려 할 것이다.

"이미 군사를 일으켰으니 그만둘 수는 없다."

우왕의 단호한 명령이 재차 떨어졌다. 우왕이 최영을 앞세워 군사를 이끌고 개경을 떠나 해주에 나선 것은 사냥길이 아니라 요동정벌 출정이었다. 사태를 파악한 이성계도 물러서지 않았다.

"전하께서 반드시 큰 계책을 성공시키고자 하신다면 서경(평양)에 어가(御駕)를 머무르셨다가 가을에 출사(出師)하면 볏곡이 들판을 덮어 많은 군사의 식량이 넉넉할 것입니다. 지금은 출사할 시기가 아니므로 비록 요동의 한 성(城)을 함락시키더라도 비가 한창 내려 군대가 전진할 수 없고 퇴각할 수도 없으며 군대가 피곤하고 군량이 떨어지면 다만 화(禍)를 초래할 뿐입니다."<태조실록>

5만 정벌군, 요동을 향하여 평양을 떠나다

"최영을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 조민수를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 이성계를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에 명하노라."

4월 18일. 돌이킬 수 없는 명이 떨어졌다. 거역하면 목이 떨어진다. 군인은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산다. 장수라고 예외일 수 없다. 이제는 요동정벌이 현실이 되었다. 마침내 5만 병력이 서경(평양)에서 요동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요동정벌군이 출정한 것이다. 이때 최영 장군은 전선으로 출전하지 않고 우왕과 함께 평양에 남았다.

요동정벌군은 '10만명이다', '5만명이다', '3만8천명이다' 학자들의 주장이 각각 다르지만 실록에 5만명이라 기록되어 있어 이를 준용하였다.

학자는 논한다 : 최영의 요동정벌 계획은 상승세를 타고 있는 명나라와 한판 붙어 생사를 결하자는 뜻이 아니라 '요동의 주인은 기마민족이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봐야 옳다. 이는 증원군을 준비하지 않은 것이 증명해주고 있다. 명나라에 우리의 의지를 보여주고 철군할 생각이었다.

만리장성 이북의 땅은 원래 우리의 땅이었으며 남경에 근거지를 확보한 명나라가 요동의 연고권을 주장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결의의 표현이다. 요동정벌이 성공했으면 우리나라가 중국의 속국을 면하고 동북아의 판도가 달라졌을 것이다.

학자는 논한다 : 최영의 요동정벌은 신진사류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자신은 물론 사위인 우왕의 위협세력으로 성장한 이성계를 사지에 몰아넣기 위한 출정이다. 5만 병력으로 300만 대군을 어찌 당할 수 있는가. 요동정벌이 실패하여 이성계가 전장에서 전사하면 자연팽이고 패전하여 돌아오면 책임을 물을 수 있다. 요동정벌군의 최고 사령관을 명(命)받은 팔도도통사 최영은 출진하지 않고 평양에 남은 것이 이를 반증해주고 있다.

또한, 정벌군이 명나라 군대와 맞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을 때 보내줄 증원군을 평양이나 개경에 마련해두지 않았다는 것이 증명한다. 대륙의 새로운 강자 명나라와 일전을 치르는 전투에 30만명 이상 50만명급 대군을 일으키지 않고 5만명을 동원한 것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역설적으로 최영 장군이 증원군을 평양이나 개경에 마련해 두었다면 위화도에서 말머리를 돌려 남하하는 이성계의 반란군이 쉽게 개경에 진입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성계와 조민수 군대가 평양을 무혈 통과하고 개경에 들이닥쳤을 때 최영 장군은 몇 명 되지 않은 궁성 수비대를 이끌고 항전하다 무너졌다. 그 당시 고려의 군사 동원 능력은 30만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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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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