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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경은 외곽에 용수산과 부흥산을 연결하는 라성(羅城), 자남산과 지네산을 축으로 하는 내성(內城), 그리고 중심가에 황성(皇城), 임금의 처소 궁궐을 품고 있는 궁성(宮城)으로 4중 방어망을 갖춘 요새다. 평화시에는 선의문과 장패문에 백성들의 발길이 붐비지만 전란시에는 동서를 축으로 하는 부흥산 아래 숭인문과 지네산 기슭에 있는 선의문이 군사요충이다.

동대문(숭인문)과 서대문(선의문)을 선점한 반란군은 남산을 장악한 다음 궁성을 공략했다. 병력을 여유롭게 운용하는 반란군의 우월적 전술이다. 수적 열세를 면치 못하는 최영의 궁성수비대는 희생자를 내며 궁 안으로 밀려들어갔다. 반란군이 왕당군을 추격하는 길목 흥원방에는 왕성수비대 군사들의 시신이 즐비했다.

@BRI@자남산과 용수산 사이를 흐르는 오천(烏川)에도 붉게 물든 핏물이 흘렀다. 오뉴월 삼복더위에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전쟁터로 내준 백성들은 공포감에 떨었다. 산으로 피난가거나 집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군대가 의로운 군대이고 어떤 부대가 불의의 부대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평화롭던 500년 도읍지가 전쟁터로 변했다. 같은 나라 같은 민족끼리 죽고 죽이는 살육의 피바람이 불었다. 죽이는 자도 왜 죽여야 하는지 몰랐다. 그저 자신이 죽지 않기 위하여 상대를 죽였다. 죽어가는 사람도 무엇 때문에 죽어야 하는지 모르고 죽어갔다. 황색기와 흑색기 그리고 붉은색으로 갈려서 피 터지게 싸웠을 뿐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국정을 돌보지 않고 황음에 빠져있는 우왕과 백성을 수탈하는 권문세족을 몰아내기 위한 회군은 천명이라는 반란군의 대의는 황색 깃발을 치켜든 자의 명분일 뿐, 그 깃발 아래 살육의 칼춤을 추는 군졸들은 위화도에서 무엇 때문에 군사를 돌렸는지? 왜 왕당군을 죽여야 하는지 몰랐다. 이들에게 이념과 명분은 사치스러웠다.

평화롭던 도읍지, 시가전의 전쟁터로

목숨 바쳐 나랏님을 지켜야 한다는 왕당군 지휘부의 독전도 궁성수비대 병졸들에겐 공허한 메아리였다. 황음에 빠져있는 임금을 하나밖에 없는 목숨 던지며 지켜야 하는지 의문스러웠다. 오로지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일 뿐, 자신이 속한 부대가 반란군이던 왕당군이던 그 색깔은 무의미했다. 이들에게 충이란 거추장스러울 뿐이었다.

최영장군이 이끄는 부대와 격전이 벌어졌을까? 권문세족에게 핍박받던 백성들이 봉기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토지 주에게 식량을 수탈당한 백성들이 약탈을 자행한 것일까? 관아가 밀집해 있는 홍도방에서 불길이 솟구쳤다.

호부(戶府)와 공부(工府)가 불타고 양온서(釀瑥署)와 대악서(大樂署)에 불이 붙었다. 백성은 굶주리는데 임금에게 괴이한 술을 빚어 바친 양온서가 원망스러웠을까? 음탕한 가무를 제공한 대악서가 황음의 원천이라고 지목한 것일까? 이어서 고공사(考功司)에 불길이 옮겨 붙었다. 고공사는 조선시대 이조(吏曹)에 해당하는 관서로서 매관매직의 소굴이었다.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가던 반란군은 궁성의 화원(花園)을 수십 겹으로 에워쌌다. 화원 안에 있는 2층 팔각전(八角殿)에 우왕과 영비, 그리고 최영 장군이 있기 때문이다. 곽충보가 휘하 장졸 몇 명을 데리고 팔각전 안으로 들어갔다. 최영을 발견한 군사가 최영을 끌어내려하자

"네 이놈 무엄하구나. 일개 장졸이 도통사에 손을 대려하느냐? 반란군에 끌려나가느니 내 발로 걸어 나가겠다."

말을 마친 최영이 뚜벅뚜벅 걸어 나가자 우왕이 최영 장군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뒤돌아 선 최영은 그 자리에 엎드려 2번 절하는 것으로 예를 올렸다. 74세의 노장군 최영의 얼굴에 통한의 눈물이 흘러 내렸다. 이 모습을 바라보던 최영 휘하 장수들은 통곡했다.

참담한 마음으로 팔각전을 빠져나오던 최영이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섰다. 거기에는 딸이 있었다. 곱게 자란 나이어린 딸이 우왕의 아내 영비(寧妃)가 된 것이 불과 3개월 전인데 이렇게 험한 꼴을 보이다니 가슴이 미어져 내렸다.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영비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곽충보를 따라 나온 최영과 이성계가 마주섰다. 만감이 교차하는 마주침이다. 조국 고려를 위하여 북방에서 여진족을 무찔렀고 남해안에서는 왜구를 격퇴했던 역전의 장수들이다. 최영이 앞서가면 이성계가 뒤따라가는 선후배 사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만나지 말아야 할 지점에서 만난 것이다. 숙명의 만남이다. 최영의 눈빛에서 분노와 증오가 이글거렸다.

"내 일찍이 싹을 자르지 못한 것이 한이로다."

회한도 뿜어져 나왔다. 이성계 역시 애증이 엇갈리는 눈빛으로 최영을 바라보았다.

"국가를 위하는 마음은 하나 일진데. 왜 회군의 소청을 거두어 주시지 아니하고 우리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나게 하셨소이까?"

회군의 자신감과 무인으로서 연민의 눈빛이었다.

"이 같은 사변은 나의 본심에서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만 대의(大義)에만 거역했을 뿐 국가가 편치 못하고 인민이 피곤하여 원통한 원망이 하늘까지 이르게 된 까닭으로 부득이한 일이니 잘 가시오. 부디 잘 가시오."(<태조실록>)

반란군이 궁성을 접수하고 최영장군은 고봉현으로 유배 길에 올랐다. 74년 생애를 조국 수호에 몸바쳐온 최영장군의 종말이 백성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모거경(毛居敬)이 4만 명의 홍건적을 이끌고 평양(西京)을 유린 했을 때 선봉대장 한임아(韓林兒)와 마상검투(馬上劍鬪)를 벌여 패퇴(敗退)시켰던 전설의 노병은 이렇게 스러져갔다.

신흥군벌에 패한 구파 군벌

최영의 퇴장은 우왕과 수구세력을 수호하려는 구파 군벌과 진보적인 학문과 사상으로 무장한 성리학적 신진사류의 지원을 받은 신흥군벌의 대립에서 구파 군벌이 패배했음을 의미한다. 당시 고려는 권력과 토지를 과점한 권문세족을 수호하려는 보수 세력과 성리학적 도덕관으로 무장한 신진사류 중심의 진보세력이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었다.

좌군 도통사 조민수와 우군도통사 이성계 그리고 36명의 장수들이 팔각전에 엎드려 절을 올리며(拜謝) 임금에게 충성을 약속했다. 우왕이 얼굴을 내밀지 않자 장수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충성이라기보다 시위라 해야 옳을 것이다.

이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이색(李穡)이 기로(耆老)와 재신(宰臣),추신(樞臣) 등을 대동하고 이성계를 찾아왔다. 군사들을 전문(殿門) 밖으로 물리쳐 달라는 것이다. 이성계도 흔쾌히 응했다. 군사를 문 밖으로 물리쳤다.

반란군을 왕군이 진압하면 영원한 반란군이 된다. 하지만 최고 권력자가 반란군을 제어할 능력이 없어 용인하게 되면 반란군은 반군이라는 불명예 딱지를 슬며시 떼며 반란을 기정 사실화한다. 지금 현재 용상에 있는 우왕은 힘이 없다. 받쳐줄 세력도 없다. 이성계군대가 반란군이냐? 아니냐? 기로에 서있다.

반란군이 임금을 폐하고 수괴가 등극하면 혁명군이 된다. 헌데 이성계의 반란군은 왕궁을 접수하고 임금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있다. 이 순간의 이성계군이 반란군이냐? 혁명군이냐? 하는 것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이성계는 이로부터 4년 후 조선조를 개국하고 왕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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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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