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9.20 05:45최종 업데이트 23.09.20 0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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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20일 멕시코 치아파스주 산 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시에서 부모들이 '공산주의 논란'에 휩싸인 교과서를 불태웠다. EPA/연합뉴스
 
'하나의 유령이 멕시코를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멕시코의 여러 세력들, 현 야당과 교회와 언론과 학부모들이 이 유령을 사냥하려고 신성 동맹을 맺었다.' 

엉뚱하지만, 최근 멕시코 언론이 초등학교와 중학교 국정교과서를 둘러싸고 쏟아내는 뉴스들을 보고 있자면 19세기에 쓰인 공산당 선언 한 부분이 자연스럽게 소환된다. 


'우리 아이들에게 공산주의 바이러스를 주입할 것인가?' 언론과 정치권에서는 연일 이와 같은 자극적인 물음으로 호소하며, 해시태그를 달아 우려와 혐오와 공포를 확대하고 재생산한다.   

이 호소와 물음에 답이라도 하듯, 일부 과격한 학부모들은 교과서를 불태우는 화형식을 마다치 않는다. 멕시코 전체 32개 주 가운데 6개 주에서는 주 정부가 직접 나서 주 헌법 재판소에 교과서 배포를 법적으로 금지해 줄 것을 요청했다. 아이들에게 '공산주의 바이러스'를 주입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다.     

유령 또는 망령

 
멕시코 주요 방송사 중 하나인 Tele Azteca의 메인 뉴스 앵커 Javier Alatorre가 새교과서에 대해 ‘공산주의교과서’라고 비평하면서 이 책 안에 맑스, 마오쩌둥, 스탈린, 폴 포트, 카스트로, 차베스의 망령이 그대로 담겨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공산주의교과서’라는 말에 해시태그가 달려 있다. 당일 뉴스에서 그의 오픈 멘트는 다음과 같았다. “멕시코가 심각한 위험에 처해있습니다. 아주 악랄한 바이러스 때문인데요. 이 정부의 교육부가 이번 학기에 모든 초등학교와 중학교 학생들에게 배포하려는 교과서에 담겨 있는 바이러스입니다. 바로 공산주의 바이러스입니다. 공산주의의 망령이 기어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현 교육부가 그 망령을 우리의 아이들에게 주입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든 우리의 아이들이 이 책에 접근하는 것을 막아내야 하겠습니다.”Tele Azteca Hechos뉴스 캡처

학생들을 불모로 잡을 수 없으니 개학을 하고 나면 좀 잠잠해질까 싶었는데 전국의 모든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개학을 했음에도 교과서 문제는 여전히 정리되지 못한 채 격돌하고 있다. 새 교과서 배포가 법적으로 금지된 주에서는 학생들이 헌 교과서로 학기를 시작했다. 

일파만파로 퍼진 '공산주의 바이러스' 괴담은 '교과서 포비아'로 이어진다. 새 교과서에 손만 대도 공산주의라는 몹쓸 병에 걸려버릴 것 같은 공포가 멕시코 곳곳에 만연하다. 급기야 멕시코 어느 초등학교는 개학식에서 교과서 화형식을 단행했다. 새로 배급된 교과서들이 어린 학생들이 보는 가운데 운동장 한복판에서 활활 불타올랐다. 이쯤 되면 교과서 자체가 곧 '유령' 혹은 '망령'이 아닐 수 없다. 휘발유를 끼얹은 교과서 상자에 쉬이 불이 붙지 않자 '교과서 악마설'까지 그 자리에서 쏟아져 나왔다. 
 
멕시코 남서부 치아파스 주 어느 초등학교에서 개학식날 학부형들이 학교 운동장에서 교과서를 불태웠다. 자신들의 아이들에게 공산주의와 동성애를 가르칠 수 없다는 이유였다.Tele Azteca Hechos뉴스 캡처
 
교과서를 둘러싼 갈등에서 공공의 적은 현 정부다. 지난 세기 무려 80년간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여당이었던 현 야당과 국교에 가까운 가톨릭 교회와 '학부모 연합'이란 이름을 달고 등장한 시민단체가 새로 만들어진 교과서를 향해 신랄한 비판을 쏟아낸다. 그리고 언론들은 앞다퉈 이들의 목소리를 실어 나른다. 

반대 목소리의 면면에 구체적 쟁점들이 드러나지만 이러저러한 이유들을 막론하고, 가장 막강한 파워를 갖는 것은 역시나 공산주의 바이러스다. 교과서 배포를 막지 않으면, 교과서를 불태우지 않으면, 이 나라가 온통 공산주의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결국 파행을 맞을 것이란 명제들이 곳곳에 선연하다. 

코로나 시기를 거쳐온 사람들은 '바이러스'란 말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각계 전문가들이 교과서를 둘러 싸고 서로 다른 목소리들을 내고 있지만 종국은 '공산주의 바이러스'에 묻히고 만다. 기-승-전-공산주의다. '공산주의 바이러스'라는 말 앞에 구체적이고 자세한 정보들이 도무지 힘을 쓰지 못하고 묻혀버린다. 

이 시대에 공산주의라니, 아무래도 유령이거나 망령일 수밖에 없는 말이 무슨 힘을 얻어 멕시코 전역을 흔들고 있는지 모르겠다. 멕시코는 이미 20세기 초 사회 정의를 내세워 식민 시기부터 이어진 대토지 지주를 제거하고 토지 균분과 공동토지를 축으로 삼았던 혁명을 일군 나라이지 않던가.

그리고 혁명 정신에 기반해 이를 제도적으로 계승하겠다는 기치를 건 '제도혁명당'이 20세기 내내 80년 동안 단 한 번의 정권 교체 없이 여당으로 군림했던 나라이지 않았던가. 작금 문제가 되고 있는 무상 교과서 역시 당시 혁명이 추구했던 무상교육의 한 축이 아니던가. 급진적이었던 혁명의 시기에도 언급되지 않았던 공산주의가 혁명의 흔적마저 사라진 지금 다시 부활하여 멕시코 거리 곳곳을 배회한다. 

신자유주의와 공산주의 연맹에 대한 서술 문제 삼아
 
멕시코 주요 방송사 중 하나인 Tele Azteca의 메인 뉴스에서 새교과서에 대한 소식을 전하면서 자막에 '멕시코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 현 정부가 공산주의 독재를 하기 위한 초석을 깔고 있다'는 말을 자막으로 표시하고 있다. 멕시코에서는 2024년 대선이 치러진다. Tele Azteca Hechos뉴스 캡처
 
사실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모든 교과서가 싸잡혀 '공산주의 바이러스'라는 오명을 쓰고 공격받지만 구체적 근거의 빌미는 중학교 교과서에 실린 내용 두 군데다. 그중 하나가 중학교 1학년 교과서에 실린 신자유주의에 대한 설명이고 또 다른 하나는 교사용 지침서에 실린 '9.23 공산주의 연맹'에 대한 내용이다. 

신자유주의 부분에서 설명된 부작용에 대해 현 야당은 이를 곧 자본주의에 대한 부정으로 규정했다. 이어 곧 공산주의 바이러스의 주입으로 해석한다. 굳이 이번에 배포된 새 교과서의 언급이 아니더라도 이미 숱한 전문가들이 멕시코에서 신자유주의 도입이 초래한 부작용에 대해 증명해 왔다.

국가 기간 산업의 민영화가 가속화되고 정규직이 줄어들고 비정규직이 증가하면서 부의 불균형이 심화되었다는 연구 결과들이 차고도 넘치는 마당에, 그 말을 차용한 교과서의 설명이 곧 자본주의의 부정이며 공산주의라는 계산은 아무래도 그 평가와 호들갑이 무색하다. 

신자유주의의 부작용과 더불어 집중포화를 맞고 있는 또 다른 내용은 중학교 교사용 지침서에 실린 '9.23 공산주의 연맹'에 대한 설명이다. 교사용 지침서에는 20세기 후반 정치 불안정을 설명하는 장에서 '하늘을 찌른 꿈'이란 제목으로 9.23 공산주의 연맹이 한 예로 삽입되었다. 특히 1973년 코로나 맥주를 생산하던 기업 사장이 이 조직에 의해 납치되어 살해된 사건이 언급되었다. 이를 두고 야당과 기업들은 납치를 '정치 전략'으로 기술함으로써 합법적으로 운영되던 기업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했다며, 역시나 공산주의 바이러스라는 틀 안에서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당시 시대적 상황이 단 한 번의 정권 교체 없이 현 야당인 제도혁명당의 장기 집권이 50년 넘게 이어지던 시점이었고 국가에 의한 폭력이 극심했던 상황임을 감안한다면 공산주의 연맹과 같은 반정부 세력의 출현을 지금의 잣대로만 볼 수 없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정부에 반기를 들었던 공산주의 연맹에 의한 납치와 살인이 있었음이 분명하지만, 멕시코 맥주 산업이 승승장구하던 그 시절 병 뚜껑을 만들기 위해 전국 각지 광산에서 철을 채굴하며 각 마을공동체 공동소유지와의 갈등이 불거질 때마다 얼마나 많은 '죽임'이 횡행했는지 또한 물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공산주의 연맹'의 탄생 자체가 당시 멕시코 정부와 거대 기업이 개입된 숱한 '죽임'의 결과라는 의견도 개진된다. 무엇보다, 멕시코 역사에 존재했던 반정부 세력 중 하나인 '공산주의 연맹'에 대한 언급 자체를 공산주의 바이러스로 몰아가는 것에 분명한 오류와 한계가 있음도 지적되고 있다.

그들이 교과서를 불편하게 여기는 진짜 이유
 
초등학교 2학년 교과서에 실린 가족 형태에 대한 장이다. 이 장에서 양성부모FAMILIA BIPATERNAL 형태와 동성부모FAMILIA HOMOPATERNAL 형태가 설명된다. 멕시코 교육부 무료교과서 홈페이지
   
멕시코를 휩쓸고 있는 공산주의 바이러스 광풍에 비한다면 이를 뒷받침하는 구체적 근거들은 턱없이 빈약하다. 위에 언급한 대로 중학교 교과서에 실린 신자유주의와 공산주의 연맹에 대한 설명뿐이다. 이렇듯 그 부분들에 대해 이미 충분한 반론이 제기되고 있음에도 계속하여 공산주의 바이러스 열기가 식지 않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정치적 영역이 아닌 사회적 영역에서 나타나는 불편함이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가족의 형태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아빠와 아빠, 혹은 엄마와 엄마 같은 동성 부모로 구성된 가족이 포함된 점, 언어 영역에 스페인어뿐 아니라 다양한 원주민어가 포함된 점, 시민 운동에 세계 여성의 날 시위가 포함된 점 등이다. 

이 사회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결코 드러내고 싶지 않은 동성애나 내 몸속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차마 인정하기 싫은 원주민 혈통과 같은 역린을 교과서가 건드린 셈이다. 
 
멕시코 새교과서는 멕시코 내 다양한 원주민어들을 소개한다. 멕시코 교육부 무료교과서 홈페이지
 
더불어 스페인어 문법상 성구분이 필요한 명사와 대명사 사용 예 중 기존의 여성형이나 남성형이 아닌 성중립형이 포함될 수 있음을 언급한 부분도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한국어는 물론 여러 언어권에서 명사나 대명사의 성 구분이 성차별일 수 있다는 의견들이 나오지만 멕시코에서는 새 교과서가 제안한 '그 남자'나 '그 여자'가 아닌 '그'라는 성중립형 표현에 심한 불편함과 불쾌감이 표출된다. 

물론, 새 교과서의 분명한 한계와 오류들도 지적된다. 그중에서도 검수와 시범 운영이 미흡했던 점은 이미 여러 전문가들에 의해 확인되었다. 또한 기존 국어, 수학, 과학 등과 같이 교과과목에 기반하던 교과서가 <교실 생활>, <공동체 생활>, <여러 언어>, <지식>으로 통합되는 과정이 너무 갑작스러웠다는 점이 오류의 중심을 차지한다. 일부 오타도 지적되지만, 기존 교과서에 비하면 오히려 적은 편이다. 

우려스러운 점은 새 교과서에 대한 모든 불편과 불만이 '공산주의'라는 틀로 포장되어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구체적이고 자세해야 할 공론의 장이 공산주의 바이러스로 점철되고 도배된다. 동성 부모에 대한 설명도, 성중립형 명사 사용도, 원주민 언어 포용도 모두 공산주의라는 오명을 쓴 채 그 안에 갇혀버린다. 

이유는 간단하다. 어떤 단어를 들고 싸울 때 혹 어떤 단어 뒤에 숨을 때 그들 싸움이 유리해질지 아는 이들과 어떤 단어를 내세울 때 더 많은 독자를 확보할 수 있는지 아는 언론이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공개 질문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멕시코 대통령연합뉴스
 
야당이든, 교회든, 시민단체든, 이 시기 멕시코에서 교과서를 둘러싼 누군가의 불편은 모조리 공산주의라는 프레임이 씌워진다. 이 싸움의 와중에 마르크스, 마오쩌둥, 폴 포트, 스탈린, 차베스가 소환되어 현 대통령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Andrés Manuel López Obrador)에게 덧씌워진다. 일련의 상황들에 대해 대통령이 그들을 향해 공개적으로 물었다. 

"교과서를 단 한 번이라도 읽어 보기는 했습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 아이들에게 공산주의 바이러스를 주입할 것인가? '라는 물음은 그 안에 숨은 많은 이들의 불만과 불편을 대신하며 싸움의 최전방에 선다. 해시태그라는 우군을 얻어 오늘도 이 나라 곳곳에 선연하게 난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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