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연방정부와 보건부에서 만든 <집에 머물러라> 캠페인 포스터. 포스터 우측에 '나중에 친구들과 파티에 가기 위에서는 지금 집에 머물러야 합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멕시코 보건부
7. 조언들
우리 집에서 인터넷 신호가 사라진 후 닷새의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총 세 건의 회의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나는 동료들에게 별도로 상황을 보고하지 않았지만 동료들은 학사 코디네이터를 통해 우리 집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동료들로부터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고,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지는 조언들이 쏟아졌다. 그 중 가장 많이 중복된 조언은 내가 사는 도시의 시장님을 찾아가라는 것이었다.
전화국과 시장님이 무슨 상관일까 싶었지만, 그간 듣고 본 여러 정황들을 회상하며 생각해보니 충분히 승산이 있는 일 같았다. 멕시코에서 지켜본 바, 절차보다는 '빽'이 우선했고 기왕 '빽'을 쓰려면 내가 댈 수 있는 가장 높은 사람이어야 했다. 공화국의 대통령이나 내가 사는 주의 주지사 정도라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내 처지가 거기까진 이르지 못함이 그저 안타까웠다. 순간 그런 생각을 하는 나를 보고 픽 웃음이 나왔다.
멕시코에는 '폴더를 전하다'라는 말이 있다. 멕시코 전역 어디가 되었든 조금이라도 영향력 있는 정치인이 뜬다는 소문이 돌면, 해당 지역뿐 아니라 멀리서도 사람들이 몰려온다. 일견 지역을 방문하는 정치인에 대한 환영 인파처럼 보이지만, 그들 대부분의 손에는 서류봉투 혹은 종이 파일이 들려있다.
봉투나 파일 안에는 도무지 해결될 수 없을 것 같은 잡다한 개인 신상의 문제들이나 적법한 절차를 거쳤으나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혹은 그들의 바람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은 문제들이 빼곡히 적혀 있다. 아무리 십수 년 간 해결의 기미를 찾지 못한 채 묵은 사안일지라도 일단 영향력 있는 정치인들에게 전달되기만 하면, 하루아침에 해결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니 일부 유명 정치인들은 지역을 방문할 때 서류 봉투나 폴더만 받는 전문 비서를 대동하기도 한다.
우리 집 인터넷 문제를 걱정하며 전화를 해온 동료들의 말인즉, 오지 않을 전화국 수리 기사를 그저 막연하게 기다리느니 차라리 마을에서 가장 정치적 파워가 센 시장님을 직접 찾아가 우리 집 사연이 구구절절 적힌 폴더를 전달하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내 당장은 도무지 쑥스러워 가지 못할지라도 다음 주까지도 이런 상황이 이어진다면 그 때는 어쩌면 내 마음이 달라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 마음 한편으로 굳이 다음 주가 되기 전에 우리 집 인터넷 문제가 해결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인터넷과 시장님을 엮기에는 염치가 없는 일이었다.
시장을 만나라는 내용 다음으로 많이 나온 조언은, 역시나 매일 마을 곳곳을 배회하며 전화국 차량을 붙잡고 통사정해보라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미 며칠 전 그 방법을 썼고 내 눈으로 작업자의 노트에 내 이름과 우리 집 주소가 적히는 것을 분명히 보았으니, 그 시간 이후로는 언제 올 지 알 수 없는 기술자를 기다리느라 집을 비울 수가 없었다. 벌써 닷새째 집을 비우지 못한 채 오지 않는 전화국 기술자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역시나 비중 있는 조언 중 하나는, 전화국에 찾아가 어떤 수를 써서라도 전화국장을 만나보라는 것이었지만, 이 또한 집을 비울 수 없어 포기했다. 대신 기술자가 올 때까지 쉬지 않고 계속하여 800으로 시작되는 전화국 고장 신고 접수 번호로 전화를 해대라는 조언은 착실하게 받아 충실하게 실행하였다.
짧게는 30분 길게는 한 시간 넘는 시간 동안 수화기를 붙잡고 기다린 끝에 사람의 목소리와 연결이 되었지만, 매번 듣게 되는 답은 한결 같았다. 전화국은 당신 집 인터넷 수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고, 당신의 상황을 고려하여 당신의 고장 접수 비고란에 '응급' 메시지를 적어 뒀으며, 멕시코전화국(TELMEX)는 '언제나' 당신과 함께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8. 할 수 없는 일과 할 수 있는 일
지금 이 순간 우리 집에 인터넷 신호가 들어온다면, 나는 가장 먼저 우리 집에 인터넷 서비스를 공급하는 텔멕스에 대해서 검색을 해볼 것이다. 지금까지 십 수 년 간 유∙무선 전화와 인터넷 서비스를 이용했지만 단 한 번도 그 회사에 대해 자세히 알아본 적이 없다. 그나마 알고 있는 사실이라면, 너무도 당연하게 멕시코의 가장 대표적인 통신사라는 사실과 미국의 빌 게이츠와 함께 세계 1·2위를 다투는 부호 카를로스 슬림의 회사라는 점이다. 원래는 멕시코 국영 통신사였으나, 1991년 카를로스 슬림에게 팔리면서 민영화되었다.
더불어 멕시코에서 전기국, 석유공사와 더불어 가장 선망 받는 직장이지만, 신입사원 선발을 위한 공채는 없다는 사실. 매년 퇴직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자식이나 친인척을 입사 대상자로 지정할 수 있고, 이들은 아주 간단한 시험을 치르고 정식 직원으로 채용된다는 사실. '부모 찬스' 시스템이 매우 당연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다른 회사에 비해 급여 수준과 복지가 매우 좋다는 사실 정도를 알고 있을 뿐이다.
한동안 인터넷 관련 설치나 고장 수리는 하청 기업들이 하였는데, 최근 다시 텔멕스에서 직접 하고 있다. 코로나 시대 이후 멕시코전화국의 고장수리 기사들도 기저질환이 있는 경우 작업에서 배제되기 때문에 어쩌면 우리 집에 인터넷 신호가 다시 돌아오기까지는 한 달 그 이상의 시간이 걸릴 가능성이 크다. 굳이 논리적인 계산이 아니더라도, 이미 마을에 한 달 혹은 두 달 이상 오지 않는 전화국 기술자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집이 허다했다.
생각해보면, 굳이 코로나바이러스의 시기가 아니더라도, 멕시코 최대 통신회사인 텔멕스의 인터넷은 늘 불안정하였다. 비라도 내리는 날에는 인터넷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문제는 매년 6개월간 우기가 이어진다는 점. 그 와중에 수리 담당자는 언제나 '오지 않기'로 악명이 높았다. 심지어 지난 세기부터 그랬다니 이쯤 되면 확고한 전통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완벽한 독점이라, 나 역시 소비자지만 늘 약자였다.
다행히 인터넷 없이 살아가는 나의 삶이 초래하는 차질을 직장의 동료들은 큰 문제없이 너그러이 이해해줬고 오히려 위로해줬다. 문제는 바로 다음 주부터 시작되는 수업이다. 비대면 회의야 나중에 전화를 통해서라도 보고를 받을 수 있지만, 당장 수업에 대한 걱정에 이르면 막연해진다.
지난 3월 18일 학교가 전면 폐쇄된 이후 연구실이나 도서관에 대한 접근도 불가능하다. 아예 정문을 닫아걸었다. 그렇다면 인터넷 사용이 가능한 카페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사는 인구 2만7천 명 정도의 소읍에는 아직 그런 카페가 없다. 물론, 주변의 더 큰 도시로 나간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으나, 그러기엔 멕시코 내 코로나 현황을 나타내는 신호등 체계에서 여전히 가장 위험한 빨강불이 켜져 있는 이곳의 상황이 녹록지 않다. 대한민국의 3단계 거리두기에 준하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도무지 오지 않는 텔멕스의 기술자를 기다리며 다음 주부터 시작되는 수업을 날려 먹을 순 없다.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생각하다가, 지난주 이미 시작된 수업에서 학생 한 명이 보여준 '열의'를 따라 하기로 했다.
인터넷이 연결되는 집에 가서 그 집의 차고를 빌리고 그 곳에 차를 댄 채 인터넷에 접속하여 수업을 하는 것이다. 사실, 지난 주 학생 한 명이 늦은 밤까지 캄캄한 차 안에서 수업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고 내 마음이 조마조마 하였다. 학생은 집에 인터넷이 없어 친척집에 가서 차와 차고를 빌리고 그 안에서 수업을 듣는 중이라고 했다.
9. 더 불공평해졌다
코로나바이러스 이전의 시대가 그나마 모두에게 조금이라도 더 공평한 시절이었음이 분명하다. 일단 학교까지만 오면 모두가 동등한 조건에서 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적어도 학교가 제공하는 인프라에는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학교가 폐쇄되고 학생들이 각자 집으로 돌아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지난 학기 어찌어찌 급조된 채 진행된 비대면 수업에 몇 명의 학생들은 참여조차 할 수 없었다. 집에 인터넷 서비스가 없는 일부 학생들이 친척집을 전전하며 수업을 받기도 하였지만, 시절이 시절인지라 오히려 내가 나서서 수업에 참여하지 않아도 좋으니 각자의 집에 머물러 줄 것을 당부해야 했다. 그런 학생들에게는 전화를 이용해 수업 손실을 막아보고자 했지만, 그 중 일부는 거주 지역에서 인터넷은커녕 핸드폰의 송수신도 쉽지 않은 상황을 토로했다.
그런 학생들을 위해 지난 7월과 8월 별도로 대면 방식으로 집중 보충수업이 계획되었지만, 이 두 달 사이에만 약 5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면서 학교는 여전히 폐쇄 상태다. 결국 그 학생들에게 과제물 제출로 학기를 마무리 지을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되었지만, 적어도 과제를 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자료를 찾든 인터넷 접근이 필수적인 상황이기에 이 또한 학생들에게 심적 부담을 지우는 꼴이 되어버렸다. 무엇보다도 어찌어찌 과제물 작성한다 해도, 학생들이 나에게 과제물을 전송할 수 있는 방법이 지금으로선 없다. 학교는 코로나바이러스 창궐 이후 학교가 아닌 제3의 공간에서 학생과 교수가 모임을 갖는 것을 철저히 금하고 있다.
물론, 도시라도 모든 집의 상황이 괜찮은 것은 아니다. 여전히 인터넷 서비스를 구매하지 못하는 가구가 상당하다. 또한 인터넷 서비스를 공급받고 있던 상황이라도 매일 비가 오는 이 우기철에 고장 없이 양호한 수준의 인터넷 서비스를 공급 받기란 엄청난 신의 가호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지난 8월 소셜네트워크 망을 통해 회자된 사진 한 장이 잔잔한 감동을 준다. 농촌 지역에 사는 학생들이 각자의 집에서 인터넷이나 교육방송 TV수신이 여의치 않자 선생님이 자신의 픽업트럭에 책상과 의자를 싣고 학생들의 집을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수업 공백을 메워주는 사진이었다.
멕시코 트위터 캡처
이 와중에 지난 8월 소셜네트워크 망을 통해 회자된 사진 한 장이 잔잔한 감동을 준다. 농촌 지역에 사는 학생들이 각자의 집에서 인터넷이나 교육방송 TV수신이 여의치 않자 선생님이 자신의 픽업트럭에 책상과 의자를 싣고 학생들의 집을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수업 공백을 메워주는 사진이었다. 나는 여전히 언제 올지 모르는 전화국 수리 기사를 기다리면서 오매불망 인터넷 신호의 부활을 바라고 있지만,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가장 확실한 것은 픽업 트럭 짐칸에 차려진 작은 교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집에서 인터넷 신호가 사라진 지 일주일이 되었다. 아마도 오늘 나는 컴퓨터 워드 프로그램을 통해 작성된 이 기사를 인터넷 서비스 없이 어떻게 한국까지 보낼 수 있을까에 대해 하루 종일 생각에 생각을 거듭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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