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이아이피 포스터

▲ 브이아이피 포스터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주)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한가. 알면서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진실을 아프게 들춰내는 영화가 있다. <신세계> 이후 한국 누아르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된 박훈정 감독의 <브이아이피>는 법 위에 군림하며 법을 농락하는 이들의 존재와 그로부터 파생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스크린 위에 화려하게 펼쳐낸다.

지난달 25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재판장 김진동)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다. 89억2000만 원 상당의 뇌물공여를 비롯해 횡령·재산 도피·범죄수익 은닉·위증까지 기소된 혐의 모두에 대해서 유죄가 인정됐다.

판결이 나온 후 각계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현행법은 다수 범죄가 함께 인정될 때 피고인의 형량을 가장 무거운 죄를 기준으로 1.5배 가중하도록 하고 있다. 따라서 89억 원대 뇌물혐의가 인정된 이 부회장은 최소 형량 5년, 최고 형량 45년까지 받을 수 있었다. 즉 재판부가 이 부회장의 죄를 인정하면서도 최소한의 처벌만 했다는 것이다.

또 현행법이 징역 3년 이하를 받을 경우 집행유예를 선고할 수 있도록 하고 있어 벌써부터 이 부회장이 2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받아 빛을 보게 될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재벌총수에게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하고 2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하며 풀어주는 게 한두 번 있었던 일이 아니기에 우려는 설득력을 얻는다.

2001년 항공기 도입 과정에서 비자금을 조성하고 세금을 포탈한 혐의를 받은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 2003년 1조5000억 원대 분식회계 혐의를 받은 최태원 SK그룹 회장, 이 사건에 가담한 손길승 SK텔레콤 명예회장, 2006년 계열사를 통해 부외자금을 조성한 혐의 및 두산건설 자금 횡령과 회계사기 등의 혐의를 받은 두산그룹 박용성·박용만·박용오 전 회장, 2008년 1000억 원대 비자금 조성과 회삿돈 797억 원 횡령 혐의를 받은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2014년 회사와 주주들에게 3000억 원대 손실을 입힌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모두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형을 받고 풀려났다. 이 부회장의 아버지인 이건희 회장 역시 2009년 삼성경영권 불법 승계 사건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형을 받았다. 과연 우연일까.

법 앞에 모두가 평등한가

브이아이피 살인마 김광일을 연기한 이종석. 영화는 채이도(김명민 분)와 박재혁(장동건 분)에게 무게를 두고 이야기를 끌어가기 위해 반대편에 위치한 김광일의 캐릭터는 이미지에 집중해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 브이아이피 살인마 김광일을 연기한 이종석. 영화는 채이도(김명민 분)와 박재혁(장동건 분)에게 무게를 두고 이야기를 끌어가기 위해 반대편에 위치한 김광일의 캐릭터는 이미지에 집중해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주)


법은 모두에게 공정한가. 돈과 권력을 가진 자는 법망을 피해가고 힘없고 '빽'없는 이들만 엄격하게 다스리는 게 우리의 현실은 아닌가. 29년 전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지강헌의 외마디 외침은 아직도 유효한가.

<브이아이피>가 다룬 엉망진창의 세계는 우리의 현실과 상당 부분 맞닿아 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범인을 쫓은 열혈형사 채이도(김명민 분)가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 김광일(이종석 분)을 붙잡지만, 법에 따라 처벌하기까지 놓인 장벽은 한둘이 아니다. 경찰 내부에서 수사를 막고 국가정보원이 방해 공작에 나서며 검찰마저 발을 뺀다. 북한 고위관료의 아들로 천문학적 비자금이 숨겨진 계좌정보를 아는 유일한 인물, 김광일은 미국 정보기관까지 나서 검거를 막는 요인 중의 요인으로 그려진다.

문제는 그가 여성을 잔혹하게 살해하는 연쇄 살인마란 것이다. 난폭하게 날뛰는 살인마를 국정원도 제어하지 못한다. 기획 귀순을 주도한 국정원은 스스로의 과오를 감추기 위해 최일선에서 국가안보를 수호한다는 목적마저 스스로 거스른다. 국정원과 경찰, 그 이상의 주체는 등장하지 않지만 국가기관이 국민에 앞서 다른 무엇을 지키려 하는 상황의 아이러니를 영화는 흥미롭게 펼쳐낸다. 그 자체로 이상 상황이지만 얼마든지 있을 법하며 실제로도 있었던 문제들이 아닌가. 우리는 이미 국정원이 저지른 용납할 수 없는 문제들을 알고 있다.

법은 모두에게 평등하지 않다. 범죄를 저지르고도 면책특권을 주장하는 외교관들과 불평등한 조약에 따라 처벌받지 않고 귀국하는 미군 범죄자의 이야기를 우리는 너무 많이 알고 있다. 돈과 권력, 힘의 논리에 따라 누구는 처벌받고 누구는 처벌받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진다. 가장 열정적인 사람들이 현장에서 무력감을 통감한다. 1988년 지강헌의 외침이 <브이아이피> 속 채이도의 절망과 맞물릴 때 관객은 여전히 비좁은 정의의 영역을 실감한다. 어째서 우리는 이토록 많은 아까운 것들을 이토록 저열한 것들에게 잃어가야 하는가.

이보다 멋진 한국 누아르를 본 적이 있는가

브이아이피 열혈형사 채이도 역을 맡아 연기한 김명민. <조선명탐정> 시리즈 외에는 스크린에서 이렇다 할 활약을 펼치지 못한 그가 비로소 <브이아이피>에서 오래도록 기억될 강렬한 캐릭터를 연기했다.

▲ 브이아이피 열혈형사 채이도 역을 맡아 연기한 김명민. <조선명탐정> 시리즈 외에는 스크린에서 이렇다 할 활약을 펼치지 못한 그가 비로소 <브이아이피>에서 오래도록 기억될 강렬한 캐릭터를 연기했다.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주)


김광일의 신병을 확보하기 위해 미국과 한국의 여러 기관이 암투를 벌인다. 그 과정은 국민에게 철저하게 감춰진다. 암투의 현장에서 미국 정보기관이 김광일을 데리고 현장을 빠져나가는 장면이 있다. 감독은 이 장면에서 거리에 멈춰선 차들을 슬로우모션으로 잡아낸다. 가장 긴박한 순간에 이들은 슬로우모션으로 멈춰서 있다. 많은 일이 벌어지는 현장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며 심지어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들이 바로 이 나라 국민이다.

박훈정 감독은 사회와 사람의 어두운 면을 꿰뚫어 흥미롭게 풀어낼 줄 아는 연출자다. 알려지지 않았지만 엄연히 실재하는 부조리를 그는 이번에도 매력적으로 이끌었다. 능란한 배우들의 안정된 연기는 영화를 한층 더 멋스럽게 만들었다. 모든 면에서 훌륭한 영화라 하긴 어렵겠으나 근래 보기 힘든 비범한 영화인 건 명확하다. 과연 이보다 멋지게 한국의 누아르를 만들 수 있는 이가 누가 있는가. 나는 단 다섯 명의 이름도 대지 못하겠다.

김명민은 스크린에서의 깊은 부진을 딛고 오래도록 남을 멋진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시종일관 담배를 물고 욕설을 내뱉으며 폭력을 행사하는 그의 캐릭터가 진부하다며 비판하는 이들도 있다지만 삼시 세끼 먹는 밥이 쌀로 지은 것이면 모두 같다고 생각하는 눈 어두운 이의 비판에 지나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저기 알 파치노가 <여인의 향기>나 <스카페이스> <칼리토>에서 연기한 전설적인 캐릭터들에 대해서도 지루한 논리를 끌어대며 그와 같이 비판할 것인가. 아마도 그런 용기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다. 홍콩에서 살해당한 희생자의 잔혹한 현장 사진을 보고 분노와 희열을 동시에 표출하던 채이도의 모습과 같이 말이다. 목각인형에 이름을 불어넣는 비범한 장면을 놓치고도 어떻게 그의 연기와 캐릭터를 지적할 수 있는지 나로선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

우리의 현실은 과연 다른가

브이아이피 미국 정보부 간부 폴 역을 맡은 피터 스토메어. <콘스탄틴>의 사탄 루시퍼 역 이후 할리우드 악역 전문 배우로 입지를 구축했다. <택시운전사>의 토마스 크레취만에 이어 피터 스토메어까지, 최근 한국영화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배우들이 출연하는 흐름은 한국영화의 질적 향상을 방증하는 듯하다.

▲ 브이아이피 미국 정보부 간부 폴 역을 맡은 피터 스토메어. <콘스탄틴>의 사탄 루시퍼 역 이후 할리우드 악역 전문 배우로 입지를 구축했다. <택시운전사>의 토마스 크레취만에 이어 피터 스토메어까지, 최근 한국영화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배우들이 출연하는 흐름은 한국영화의 질적 향상을 방증하는 듯하다.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주)


지난달 23일 tvN 현장토크쇼 <택시>에 출연한 표창원 의원이 자신의 인생을 바꾼 사건을 이야기해 화제를 모았다. 일명 부천 황태자 성폭행 사건으로 그가 부천 형사계에 있을 때 발생한 사건이었다.

그에 따르면 재수생이던 여성이 입시시험이 끝나고 나이트클럽에 갔다가 강간 피해를 입었다. 경찰은 탐문 수사를 벌여 범인을 검거했지만 범인은 반성하기는커녕 당당하게 범행과정 전반을 진술했다. 표 의원은 피해자 측에 합의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은 뒤 수사를 진행했으나 사건은 양 당사자 합의로 처벌 없이 마무리됐다.

알고 보니 가해자는 부천 지역에서 유력한 재력가의 아들이었단다. 가해자 측은 피해자의 부모가 합의에 응하지 않자 피해자 아버지가 일하던 회사를 찾아내 압력을 가했고 아버지는 동료들조차 합의를 권하는 상황에 끝내 합의를 보고 말았다는 것이다. 범행마다 그렇게 합의를 봐온 가해자를 보며 표 의원은 "그 자리에서 때려죽여 버리고 싶었다"고 분노를 표현했다.

과연 모두는 법 앞에 평등한가. 지금 이 순간에도 절망하고 좌절할 채이도들에게 아직은 희망이 없지 않다고 다독이고 싶은 건 많은 일이 벌어지는 도로 위 멈춰 있는 차가 되지 말자고 경각심을 불어넣는 이런 영화가 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브이아이피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주) 박훈정 김명민 김성호의 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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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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