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램스>의 포스터. 'Lambs'가 아니라 'Rams'이다.

영화 <램스>의 포스터. 'Lambs'가 아니라 'Rams'이다. ⓒ 미디어컨텐츠스토어


밤이면 오로라가 어른거리고 때되면 활화산이 불을 내뿜는, 수천 미터 높게 솟은 봉우리들과 빙하가 깊게 파논 계곡 사이로 은은한 사람들 모여 살아가는 곳. 오래 전 섬을 찾은 누군가는 앞뒤에 보이는 게 얼음뿐이라 아이슬란드라 이름 지어 불렀다던가. <램스>는 한국에서 보기 드문 아이슬란드 영화다.

주인공은 40년 동안 서로 말 한 마디 않고 산 양치기 형제. 얼마나 싫은지 얼굴 볼 일을 만들지 않는 건 기본, 어쩌다 꼭 할 말이 생겨도 종이에 써서 양치기 개를 통해 전한다고. 그럼에도 같은 목장 바로 옆집에서 살아가는 건 모든 땅을 물려받은 동생이 어머니 임종 전 '형을 내쫓지 않겠다'고 약속한 때문이란다.

결혼도 않고 평생을 홀로 산 형제에게 삶의 유일한 낙은 양을 키우는 일이다. 매년 열리는 계곡마을 '최고의 양 선발대회'가 빼놓을 수 없는 행사인 건 당연지사. 한 해 성과를 검증받는 이 대회에 동생 구미(시구르더 시구르욘슨 분)와 형 키디(테오도르 줄리어슨 분)도 내심 큰 기대를 갖고 있다.

시상식이 열리던 날 밤 구미는 2등으로 호명돼 시상대에 선다. 그 만족스러운 표정. 하지만 1등 발표와 함께 구미의 얼굴은 완전히 구겨진다. 키디가 1등인 것이다.

분노에 차 시상식장을 빠져나온 구미는 몰래 양 우리로 가 형의 양을 살핀다. "네 등 근육이 그렇게 두꺼워? 어디 좀 만져보자!" 양을 끌어 등판을 더듬는 구미, 그런데 무언가 이상하다. 형의 양은 힘 없이 서있기만 할 뿐, 수컷 특유의 굳센 기질이 보이지 않았던 것.

구미는 전날 목장에서 본 다른 양 한 마리를 떠올린다. 죽은 듯 힘없이 주저앉아 있었던 그 양의 모습. 그 순간 뇌리를 스치는 섬뜩한 생각, 말로만 듣던 양 전염병 스크래피와 증상이 비슷한 것이다. 구미는 제 양을 끌고 황급히 집으로 돌아와 박박 씻기고 또 씻긴 후에야 잠자리에 든다.

양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

램스 축사에 가득 찬 양을 돌보는 구미(시구르더 시구르욘슨 분)

▲ 램스 축사에 가득 찬 양을 돌보는 구미(시구르더 시구르욘슨 분) ⓒ 미디어컨텐츠스토어


스크래피는 광우병을 파생시킨 불치의 전염병. 영화는 스크래피가 영국에서 아이슬란드로 들어와 많은 양을 죽였다는 설명까지 곁들인다.

며칠 지나지 않아 검역청이 형 키디의 양 가운데 여러 마리가 스크래피에 감염됐다는 결과를 발표한다. 곧 계곡의 모든 양을 도살해 땅에 묻겠다는 정부 계획이 나오고 계곡의 모든 사람은 충격에 휩싸인다.

이후 영화는 구미가 검역청 몰래 자신의 양을 숨겨 키우는 과정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구미는 남은 양들을 애지중지 먹여 보살피지만, 한 순간에 모든 양을 잃은 키디는 한없는 절망감에 술독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한다. 정신을 잃을 때까지 술을 퍼마시다 얼어 죽을 뻔 한 것만 여러 차례, 그때마다 그를 살려놓은 건 형을 차마 외면하지 못한 구미다.

영화 내내 형제의 시선은 양을 향한다. 그들이 서로를 바라볼 때 눈에는 비난과 분노, 야유가 담겨 있을 뿐이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되고 그들이 그토록 아끼고 아낀 양이 사라지고 난 뒤 조금씩 그 자리에 서로가 들어선다. 눈밭에 쓰러진 형을 트랙터로 실어 마을 병원 앞에 털썩 내려놓을 때, 형의 벌거벗은 몸 위에 담요를 덮어주던 순간이 곧 그런 장면들이다.

영화는 오직 양만 바라보던 형제가 저항할 수 없는 질병 앞에서 자신의 양을 지키려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그린다. 그런데 정작 감독의 메시지가 드러나는 건 마을의 양들이 거의 사라지고 나서다. 양을 모두 잃은 형이 비로소 동생을 찾아 품에 안았을 때, 그건 충분히 일렀을까 아니면 너무 늦었을까?

왜 Lambs가 아니라 Rams일까

램스 계곡 제일의 양을 뽑는 대회. 여러 목장주들이 데려온 양을 수의사가 검진하고 있다.

▲ 램스 계곡 제일의 양을 뽑는 대회. 여러 목장주들이 데려온 양을 수의사가 검진하고 있다. ⓒ 미디어컨텐츠스토어


영화의 제목이 'Lambs'가 아닌 'Rams'인 건 제법 의미심장하다. 영화 내내 형제는 양을 지키려 동분서주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양이 모두 사라지고 난 뒤에 드러난다. 양은 진실을 가리는 장치일 뿐, 영화의 주역은 양 뒤에 가려진 것이다. 키디와 구미, 세상에 오직 둘 뿐인 그들 형제 말이다.

아이슬란드는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고 급전직하해 국가부도 위기를 겪었다. 영국의 선진 금융기법을 도입해 한때는 상당한 부를 누린 이 나라가 빚더미에 오른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스크래피가 계곡의 모든 양을 땅에 묻게 한 것처럼 세계금융의 부실이 아이슬란드를 거꾸러뜨린 것이다. 수의사가 스크래피에 걸린 양을 알아차리지 못했듯 금융당국 역시 그 엄청난 부실을 알아차리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아이슬란드가 그들의 부실을 복원하고 다시 살 만한 나라가 되는 과정은 주목할 만하다. 그들은 공적 자금을 퍼부어 대형은행을 살리고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부를 축적하는 쉬운 방법 대신에 투기를 일삼은 금융인을 처벌하고 실물경제 중심의 안전하고 합리적인 투자로 위기를 극복했다. 양이 사라진 자리에 형제가 남은 것처럼 부가 사라진 자리에 시민들의 공동체가 남았다는 게 아이슬란드의 지난 시간이 남긴 교훈이다.

눈보라치는 이 겨울이 지난 뒤 형제는 어쩌면 그들의 양 대부분을, 혹은 그보다 많은 것을 잃어버릴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뒤에 남을 것이 그 전에 가졌던 것보다 못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나는 믿고 또 믿는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빅이슈>와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램스 미디어컨텐츠스토어 그리머 해커나르손 시구르더 시구르욘슨 김성호의 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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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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