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제로법칙의 비밀>의 포스터

영화 <제로법칙의 비밀>의 포스터 ⓒ 와이드 릴리즈(주)

테리 길리엄은 영화 팬들의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는 흔치 않은 영화감독 가운데 한 명이다. <브라질> <12 몽키즈> 같이 제한 없는 상상력과 따스한 시각이 어우러진 명작을 연출했고, 동시에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과 같은 괴작 역시 적지 않게 생산했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나 독특한 색채의 영화를 만들어왔지만 완성된 작품의 수준이 일관되지 않았고, 최근작으로 올수록 팬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작품이 많다는 점에서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 그런 그가 내놓은 신작 <제로법칙의 비밀>은 이젠 노장의 축에 꼽히는 테리 길리엄 감독이 여전히 건재하냐 그렇지 않으냐를 판가름하게 될 시험대가 될 것이다.

<제로법칙의 비밀>은 지난 14일 국내 극장가에 상륙했다. 테리 길리엄 특유의 독특한 분위기가 묻어나는 배경을 뒤로하고 크리스토프 왈츠와 맷 데이먼, 틸다 스윈튼, 벤 위쇼 등 할리우드의 유명 배우들을 내세운 예고편과 포스터는 기대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맷 데이먼과 틸다 스윈튼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다면...

하지만 그건 다 거짓이다. 맷 데이먼과 틸다 스윈튼은 우정 출연 정도에 불과하고, 벤 위쇼는 차라리 카메오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주연을 맡은 크리스토프 왈츠만이 멜라니 티에리, 루카스 헤지스 같은 생소한 배우들과 런닝타임 대부분을 이끌 뿐이다.

맷 데이먼과 틸다 스윈튼의 역할이 충분치 못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들의 이름을 맨 앞에 내세운 배급사의 태도가 매우 불량하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만약 유명한 배우들의 검증된 연기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았다면 지루함을 견디며 손가락을 빨고 있어야 한다. 

사실 이런 식으로 광고하는 영화는 이전에도 있었다. 지난 5월 개봉한 <트랜센던스>처럼 제작자를 연출자인 것처럼 모호하게 전달하거나, 히스 레저의 유작으로 몇 분 등장하지 않는 조니 뎁, 콜린 패럴의 출연을 강조했던 테리 길리엄 감독의 전작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도 이와 같은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그러나 흔하다고 해서 잘못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선전된 문구를 보고 극장을 찾은 관객에게 '영화 그 자체에 집중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제로법칙의 비밀 영화 <제로법칙의 비밀>에서 베인슬리(멜라니 티에리)가 만든 가상 세계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코언(크리스토프 왈츠)

▲ 제로법칙의 비밀 영화 <제로법칙의 비밀>에서 베인슬리(멜라니 티에리)가 만든 가상 세계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코언(크리스토프 왈츠) ⓒ 와이드 릴리즈(주)


흩뿌려진 상징과 흐리멍텅한 메시지

심지어 영화는 수준 자체가 의심스럽다. 테리 길리엄의 영화답게 기술적으론 발전했지만 행복하지 않은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배경으로 인생의 목적을 찾으려는 한 인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영화는 극의 전개와는 별개로 방황하고 메시지는 흐리멍텅하다. 철저하게 자신의 스타일에서 어떠한 새로움도 만들어내지 못하기에 내겐 이 영화가 테리 길리엄의 가장 실망스러운 작품 가운데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전형적으로 그려지는 미래의 사회상은 식상하게 여겨지고 존재론적 물음과 관련한 주제는 던져졌을 뿐 탐구되지 않는다. 그러니 이야기 속 우정이나 사랑, 제로법칙의 정리 등도 모두 무의미한 일이다. 흩뿌려진 상징 역시 마찬가지다.

자본주의적 디스토피아나 빅 브라더가 떠오르는 회사의 감시는 수십 년간 수십 편의 작품들에서 우려질 대로 우려진 식상한 설정이다.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를 시작으로 SF 장르의 온갖 명작을 오마주한 부분 역시 새롭지만은 않다.

중요한 것은 새로움과 깊이였다. 그것도 테리 길리엄과 같은 수준급 감독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그는 이 영화를 통해 그간의 작품을 통해 넓히고 다져온 예술적 지평을 단 한 뼘도 넓히지 못했다. 어쩌면 테리 길리엄은 이미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다 해버린 노쇠한 감독이 되어버린 건지도 모른다.

와이드 릴리즈(주) 제로법칙의 비밀 테리 길리엄 크리스토프 왈츠 멜라니 티에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