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에는 '어둠'이 곧 '공포'였다. 화장실은 본 건물과 별도의 공간에 마련되어 있었고, 늦은 밤 화장실을 이용한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그 많은 화장실 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곳은 단연 '학교 화장실'이었다. 학교마다 이름은 조금씩 달랐지만 사연이 있는 '귀신'이 존재한다는 풍문이 떠돌았고, 그 귀신에 얽힌 괴담들도 전해 내려왔다.
 첫 번째 작품 '여고괴담'의 포스터
ⓒ Cine2000

관련사진보기

수많은 사람들이 이 '괴담'을 들어왔지만 이를 영화로 만들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러나 1998년 박기형 감독은 이 '괴담'을 영화로 만들었다. 이로 인해 한국 공포영화는 199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빛을 발하게 된다. 그 흥행 성공의 신호탄을 울린 것이다. <여고괴담>은 그간 한국 공포영화의 전형이었던 귀신들이 하얀 소복에 머리를 산발한 모습이 아니라 단정한 머리에 교복을 입은 소녀의 모습으로 나타난 새로운 '공포영화'였다. 1998년에 개봉한 <여고괴담>은 교사에 의한 구타와 성희롱, 입시제도의 중압감, 따돌림 등 적지 않은 사회적 문제를 담아내면서 이슈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전통적인 귀신영화의 모티브인 '원한의 복수극'을 주제로 하여 한 여고생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상황을 보여줌으로써 공포감을 주었다. 고목에 목을 매고 죽은 채 발견된 '늙은 여우'라는 별명을 지닌 여교사의 시체, 그 의문스러운 죽음을 시작으로 몇 년 동안 계속해서 학교를 다니고 있는 여고생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생활기록부에 매년 등장하는 그녀의 얼굴, 복도 끝에서 '콩콩…'거리며 순식간에 다가오는 소녀귀신의 모습은 관객을 오싹하게 만든다. 앞으로 나오는 두 편의 시리즈 중에서 <여고괴담>은 교육제도의 문제점을 가장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지만 이도 교육문제를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녹여내지 않은 채, 억압과 권력의 문제로 조심스럽게 풀어나간다. 한 학생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공포, 그 안에서 다음 대사를 기억한다면 이 영화가 왜, 최고의 공포영화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내가 네 친구로 보이니?" 이 영화의 속편격인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Memento Mori>는 민규동과 김태용 두 감독에 의해 '호러 무비'와 '하이틴 무비'의 결합이 시도된다. <여고괴담>을 넘어서는 속편을 기대했던 관객들은 다소 흥미를 잃게 했던 영화였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서는 '괴담'은 사라지고, '여고'만 남아있는 듯 보인다. 공포영화에서 흔히 보여지는 클로즈업이나 어두운 조명, 충격을 가져다 줄 음향은 도무지 나타나지 않는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의 한 장면
ⓒ Cine2000

관련사진보기


친한 친구로만 생각하던 시은과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면 죽음도 아깝지 않은 효신의 엇갈린 사랑 이야기는 공포를 기대했던 관객들에게는 그저 싱겁기만 할 뿐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공포는 후반부에 나타난다. 책상에 앉아있던 시은의 다리를 불현듯 움켜잡는 효신의 팔, 우리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장면이다. 책상 밑을 조심해야 했다. 남아있는 것은 효신의 자줏빛 일기장에 적힌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라는 주문 뿐.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에 전반부 밋밋한 스토리에 비해 후반부에 안겨준 색다른 공포는 그 후속작을 기대하기에 충분하다. 다소 흥행에 실패했던 이유 때문이었을까, 다음 편을 기대하는 관객들을 뒤로 한 채 3년이 지나서야 <여고괴담 세 번째 이야기: 여우계단>을 개봉한다.
 <여고괴담 세 번째 이야기: 여우계단>의 한 장면
ⓒ Cine2000

관련사진보기

윤재연 감독이 제작한 <여고괴담 세 번째 이야기, 여우계단>, 소녀들 앞에는 음산한 분위기를 내뿜는 기숙사 계단이 있다. 누구나 한번쯤 간절한 소원을 품고 또 빌어보지 않았을까. 영화 속 학생들은 하나, 둘, 셋… 계단을 오르며 소원을 되뇌며 간절하게 소원을 빌면, 없던 29번째 계단이 등장한 후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저주의 시작이며,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운명의 계단이다. 성격은 좀 나쁘지만 미술 실력 만큼은 일품인 소녀, 그녀는 자신의 작품을 최고로 만든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살아있는 시체로 빚은 엽기 조소이다. 이 세 번째 이야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는 죽어서도 '진성'의 곁을 떠나지 않는 '소희'의 말, "진성아, 나는 언제나 니 곁에 있어" 일 것이다. <여고괴담 세 번째 이야기, 여우계단>은 어찌 보면 유치하고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10대 시절의 꿈들이 집약된 한 폭의 자화상이다. 스물여덟, 혹은 스물여덟 개의 계단은 현실의 벽에 부딪혀 억눌러야 했던 자아를 내뱉는 장소이다. 문제가 된다면 그 장소가 곧 저주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세 편의 영화로 이어져 온 <여고괴담> 시리즈는 각기 다른 감독에 의해서 '공포'라는 동일한 주제를 다루어 왔다. 각기 원한의 복수극, 순정비극, 경쟁 수난극 등으로 조금씩 변주를 가했지만 관객에게 '공포'를 주는 임무에는 모든 작품이 성실하다. 관객에게 불안과 공포를 불러일으켜 식은땀을 흘리게 하는 데에는 충분하다. 다시 초등학교 시절의 학교 화장실 괴담을 떠올린다. 지금은 대부분 오래된 건물이 사라져서 '요즘 학생들은 그런 괴담도 하나 모르겠지?'라고 생각했다가 다시금 '아니 뭔가 또 있을 거야'라고 생각을 바꿔본다. 꼭 '여고괴담' 시리즈가 아니더라도 소원을 되뇌며 간절하게 소원을 빌면, 없던 29번째 계단이 등장하는 것처럼 한국영화계에도 공포영화는 계속 되겠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