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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공포하면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언제나 '전설의 고향'이었다. 그 프로를 보고 나면 며칠간 운신을 못할 만큼 파급이 컸다. 구미호가 빨간 입술에 하얀 송곳니를 드러내며 휙 뒤돌아보던 장면에서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얼굴을 파묻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공포감 속에서도 견딜 수 있었던 건 죄를 짓지 않으면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 선인은 하늘이 도와준다는 권선징악의 결말이었다. 그렇게 전설의 고향은 공포와 교훈을 동시에 주는 유익한 프로였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부터 삶의 질곡이 더욱 무서운 것임을 깨달아서인지 보고싶은 영화도 없었거니와 보았다해도 머리에 남은 것 하나 없었다. 더욱이 요즘의 공포 영화라는 게 억지로 만들어낸 캐릭터들이 마구 피만 뿌려대는 것임으로….

그러다가 얼마 전 전설의 고향과 같은 재미를 주는 영화를 한 편 만나게 되었다. 그 영화가 바로 더 로드(The road)다. 사실 이 영화를 보려고 한 게 아니라 안소니 퀸이 나오는 <길>이라는 영화를 재미있게 본 기억이 있어서 제목만 보고 골랐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폭염을 잊을 만큼 서늘함을 맛보게 되었으니 기대하지 않았던 보너스라고 해야 할 것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해링턴은 가족을 데리고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처가로 향한다. 더 빨리가기 위해 지름길로 들어선 해링턴, 하지만 빨리 갈 줄 알았던 그 길은 끝이 없다. 불현듯 아기를 안은 한 여인이 나타난다. 죽음에서 방금 깨어난 듯 스산한 분위기의 여자. 여자의 출현과 함께 죽음은 점차 검은 손을 뻗쳐오고 차가 멈출 때마다 한사람씩 죽는다.

탈출을 꾀하는 해링턴 하지만 한결같은 이정표는 길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시작과 끝이 이어져있다는 걸 보여준다. 극한까지 고조되는 공포. 그리고 결말.

내용상으로는 길 위에서 시작해서 길 위에서 끝나는 간단한 구조와 진퇴양난, 불가항력이라는 고전적인 공포영화 도식을 따르고 있지만 이 영화는 다른 영화들과 구별되는 몇 가지 요소를 갖고 있다.

우선 길이라는 특이한 소재다. 깜깜한 밤에 잘못 든 길, 그것이 알지 못하는 숲길이고 초보자라면 그 공포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영화는 그렇게 안개 자욱한 끝이 없는 길을 가시거리가 몇 미터도 되지 않는 헤드라이트를 비추며 힘겹게 달리는 것으로 시종일관된다. 하지만 그런 직접적인 공포 외에도 길이라는 장치는 하나의 메타포 기능을 가지고 있다.

길은 인생의 은유다. 잘못 들어선 길, 가시덤불 길, 끝이 없는 길은 관객의 머리 속에서 인생의 의미와 치환된다. 자동차가 멈출 때마다 한사람씩 죽어가니 멈출 수도 없다. 하지만 길은 끝이 없고 기름은 충분하지 않다.

시지프처럼 달리고 또 달려야만 하는 인간의 운명. 그것은 머리보다는 가슴에서 먼저 느껴지는 공포다.

둘째는 이 영화가 전설의 고향같이 우리의 정서와 닿아 있는 결말을 갖고 있다는데 있다. 앞서 말했듯이 전설의 고향은 공포이되 교훈을 주는 공포라고 했다. 이 영화도 결말까지 다다르면 그런 방식과 같다는 걸 반전에서 알게 된다.

결론은 '남에게 피해주지 않고 바르게 살아야 한다'이며 더 구체적으로 함축하면 '조심운전'이다.

엉뚱한 주제 같지만 결국 주인공 해링턴의 졸음운전이 모든 사건의 원인이 되고 이야기는 그에 대한 파생이기 때문이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결말이지만-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영화는 진지하다- 거기에는 간단히 스쳐 버릴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교통사고 세계1위. 습관이 되어버린 난폭운전, 졸음운전, 음주운전. 운전자들의 그런 행태가 자신은 물론 남에게까지 돌이킬 수 없는 참화를 들 씌운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시사하는바가 크다.

자신의 실수가 얼마나 타인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줄 수 있는지 공포라는 형태로 각인 시켜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영화의 전반부가 허망할 만큼 결론이 전체 스토리와 어긋나는 건 아니다.

영화를 마치고 커피를 한 잔 마실 때까지도 공포는 여전히 여운처럼 머리 속을 맴돈다. 그것이 교훈으로 다가오는 건 그 이후부터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영화는 독특하고 무섭고 교훈적이며 그래서 친숙하다.

누군가는 어느 고을에서 억울하게 죽은 여인네의 한을 담은 전설의 고향 한 대목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2003년 유럽 판타지 영화제 대상 수상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하지 않은 영화니 잠시의 시간을 투자하는 것도 남은 더위를 물리치는 좋은 방편의 하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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