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계 생명체의 은밀한 침투 <복제인간의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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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났을 때 아버지는 더 이상 아버지가 아니고, 어머니는 더 이상 어머니가 아니라면 그건 과연 뭘까?"

지난 날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후배들에게 장난 삼아 했던 농담이 기억난다. 그 때 후배들은 웃으면서 술을 많이 마신 것 같다며 답도 하려 들지 않았다. 난 이내 그 답을 말했다.

"외계인이야."

모두가 엉뚱한 소리만 한다며 무시했지만, 사실 난 그 얘길 하면서도 소름이 끼쳤다. 내가 더 이상 내가 아닌 날이 온다면, 껍데기에서 빠져 버린 난 어디로 가야할 것이며, 설령 혼자 자신을 지킨다 한들 달라져 가는 사람들을 어찌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필립 카우프먼의 78년작 <복제인간의 제국>은 언제나 나를 따라다니는 유일한 공포 영화다. 가끔이긴 하지만, 사람들이 모두 한 방향으로 걸어간다거나, 나도 모르게 내 이야길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 이 영화를 기억해 내곤 한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무 생각 없이 처음 영화를 볼 때만 해도 이 작품이 그토록 큰 공포심을 자아낼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그 공포의 여운은 아직도 머리 속과 귓가를 맴도는 것만 같다.

<복제인간의 제국>의 원제는 <신체 강탈자의 침입>(Invasion of the Body Snatchers)이다. 잭 피니의 소설 <신체 강탈자들>(Body Snatchers)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원래 피니의 이 소설은 돈 시겔이 56년에 동명의 영화로 만든 바 있다. 그리고 필립 카우프먼의 영화 이후 93년에 아벨 페라라에 의해 다시 한번 영화화 되었다(페라라의 영화는 비디오로 출시되어 있다. 비디오 출시 제목은 <바디 에이리언>).

또한 99년엔 이와 비슷한 내용으로 로베르토 로드리게즈가 <패컬티>를 내놓기도 했다. 무려 4번에 걸쳐 영화화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소재가 흥미로움을 의미한다. 그 가운데에서 필립 카우프먼의 <신체 강탈자들의 침입>은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네가 잠들기만을 기다릴 거야...언제 어디서건!"

지구 바깥의 머나먼 우주 어딘가에서 정체 불명의 물체가 떨어진다. 그것은 아름다운 식물의 모습이다. 이들은 이곳 저곳에 퍼져 나가 사람들 가까이 다가가게 되고, 이 물체들은 사람이 잠들기만을 기다린다. 그리고 잠자는 이의 몸 속에 손을 뻗어 파고들고 그들의 몸을 복제한다. 진짜 인간은 죽어 버리고, 인간의 형상을 복제한 괴생명체가 탄생한다.

잠을 자면 죽는다는 설정. 이것이 영화가 공포심을 주는 핵심이다. 인간의 원초적인 약점으로부터 공포심을 끌어내는 것이다. 원래 사람이란 높은 직위에 있는 자든, 최하층에 있는 자든, 기본적인 욕구(수면욕, 식욕, 성욕)를 충족시켜야만 한다. 이 가운데에 어느 하나라도 채워지지 않는다면 그만큼 인간은 삶을 영위하기가 힘들 것이다.

삶의 위협. 영화는 그것을 겨냥한 공포를 선사한다. 영화 속의 인물들은 모두 잠을 잘 수가 없다. 만약 잠을 자게 된다면 그들은 깨어났을 때 그들 자신일 수 없을 것이다. 잠을 자지 못해 극도로 지친 사람들의 모습과 자신의 욕구를 참지 못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영화를 보는 우리는 끊임없이 공포로 인한 심리적 압박감에 시달려야만 한다.

그리고 영화에 등장하는 획일화된 인간의 모습은 어디서건 영화의 공포를 떠올리게 할 만한 요소다. 겉모습만 사람일 뿐, 외계인인 이들은 서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만약 진짜 인간으로서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자가 있다면 그들은 그 인간을 손으로 가리키고 죽일 듯이 노려보며 소름끼치는 소리를 지른다.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의 수가 많아지고 급기야 마지막 남은 남자 주인공(도널드 서덜랜드 분)마저 그들과 같은 종류의 존재가 되었는가를 의심하게 될 때 앉아 있던 의자의 손잡이를 꽉 잡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개인적인 자유의 의지를 보여 주지 않는 이러한 면모는 사실 심하게 말하자면 우리가 아침, 저녁의 러시아워에 볼 수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늘 같은 버스 정류장, 지하철, 회사가 밀집한 특정 장소로 이동하는 우리의 모습은 이 영화의 장면과 흡사하다. 그러한 일상을 목격할 때 또 한 번 되살아 나는 이 영화의 공포는 그 여운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짐작케 한다.

"어디로도 도망갈 수 없다... 폐쇄적 공포의 매력"

아마도 이 영화를 계속 기억하게 되는 것은 영화의 내용이 지닌 심리적인 공포와 더불어서 영화의 표현 방식에도 매혹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비주얼한 측면에서 공포를 자아내는 영화는 많았다. 전통적인 고어 영화들, 이를 테면 <피의 향연>이나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과 같은 일련의 영화들은 관객들에게 징그러운 장면들-피와 너덜너덜한 살점, 떨어져 나가는 육체-들을 보여 줬다. 이후 등장한 <할로윈>이나 <13일의 금요일>같은 슬래셔 영화들은 소리 지르는 10대를 주인공으로 섹스와 무자비한 살인마의 등장 등을 볼거리로 제공하기도 했다.

물론 우리는 오컬트 영화가 제공하는 섬뜩함을 잊어선 안 된다. 가장 대표적인 윌리엄 프레드킨 감독의 <엑소시스트>의 경우, 몸에 악마가 들어가서 한 아이를 지배하는, 좀 더 영적인 의미의 공포를 선사했다. 아이는 얼굴과 몸의 살이 갈기갈기 찢기고 목이 360도 돌아가며, 잔인한 자해 행위와 더러운 체액을 분비하는 괴물로 변해서 공포감을 조성했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공포는 관객들에게 짜릿함을 선사하며 더위를 잊게 만들었다.

이 영화 <복제인간의 제국> 역시 징그러운 장면이 등장한다. 정체 불명의 식물들이 인간의 몸을 복제하는 장면이다. 이 식물들은 잠을 자는 사람들의 몸을 향해 줄기를 뻗은 후 하나의 개체를 만들어 낸다. 이 개체는 점점 커져서 인간의 형상을 하게 되는데, 끈적끈적한 액체에 싸인 미끈한 몸을 보면 역겹다 싶을 정도다. 게다가 덜 만들어진 또 다른 자신과 대면한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까.

하지만 이러한 징그러움은 복제 장면에서만 보인다. 이들 장면을 제외하곤 직접적으로 잔인하거나 무서운 장면들을 보여 주진 않는다. 공포는 좀 더 교묘한 방법으로 드러난다. 이 작품의 남녀 주인공은 단지 자신들과 다른 내면을 지닌 생명체를 피해 거리 이곳 저곳을 뛰어다닌다. '그들'이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기에 인물들의 행동 반경은 점차 좁혀진다. 그리고 영화가 진행될수록 이들은 숨거나 갇히게 된다.

자신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알 수 없는 변화가 점점 자신을 옥죄어 온다는, 이 영화의 설정이 주는 공포감은 불안정한 사각 앵글 속에 풀 샷(Full Shot)으로 잡힌 뛰어 가는 남녀의 그림자, 어둠, 안개 등으로 더욱 구체화된다. 폐쇄적인 느낌의 이러한 장면들은 보이지 않는 존재의 공격을 우리가 심리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때론 더욱 무섭고 두려운 것이 될 수 있다'는 말이 맞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드는 대목이다.

"좋은 공포영화는 진지한 의미를 지닌다!"

이 영화가 나를 사로잡은 또 하나의 이유, 그것은 좋은 공포영화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이 작품 역시 단순한 공포영화를 넘어 하나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늘 사람을 죽이는 데에만 몰두하는 사이코나 의미 없는 살인에만 집중하는 여타 영화들과는 달리 이 작품은 진지하다.

<복제인간의 제국>은 알란 J. 파큘러 감독의 <암살단>(The Parallax View)이나 로만 폴란스키의 <악마의 씨>(Rosemary's Baby)와 같은 영화들과 같은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6,70년대를 강타한 음모에 대한 미국인들의 공포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 공포는 아직도 유효하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절대적인 판단이 없는 현대 사회에선 말이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신을 잃어가고, 그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죽음의 위협을 당해야만 하는 영화 속 상황. 실제로 거짓된 진실에 자신도 모르게 순응하게 된 당시 미국민들의 모습은 외계인들에게 장악된 껍데기뿐인 인간과 다를 바가 없다. 거짓은 진실을 압도한다. 주인공마저 껍데기만 남았음을 알게 될 때 우린 모든 것이 끝났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진실은 없고 거짓만이 난무하는 현실에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추구해야만 하는 것일까. 영화는 우리에게 이처럼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

생각의 여지가 많은 영화는 언제나 유익하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 <복제인간의 제국>은 단순한 공포영화로 치부하기엔 아쉬운 점이 많은 좋은 작품이다. 의미 없는 살인과 잔인함을 담은 영화가 관객들의 정신을 갉아 먹기 쉬운 요즘, 자꾸만 이 영화를 생각하게 되는 건 왜일까?

가끔 7년 전, 이 영화를 처음 봤던 그 날로 되돌아가곤 한다. 외계인들의 소름끼치는 비명 소리, 잠을 자지 못해 하얗게 질린 사람들의 얼굴…. 그 모든 것이 편집증에 걸린 사람의 꿈 속 이야기 같다. 끊임없이 기억 속에서, 현실 속에서 튀어나와 놀라게 했던 이 영화야말로 나를 진정으로 사로잡은 공포영화였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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