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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시골집에 가서 천천히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을 훑어보았다. 중학교 때부터 사서 모은 책들이 벌써 2천 권이 넘어서고 있었다. 역시 공부 못하는 놈이 책가방은 크다고, 내 꼴이 그 짝인가 싶다.

읽는 즐거움도 즐거움이지만 책을 모으는 즐거움 또한 얼마나 큰 것인지 깨닫게 된 것은 참 오래 전 일이다. 초등학교 시절, 시골이라 서점이나 도서관은 구경조차 할 수 없었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아버지께선 이런저런 동화책과 읽을거리를 사다주시곤 했다.

중학교 때 진주로 전학을 가고서부터 주머니에 돈만 생기면 헌책방으로 달려가곤 했고, 좁은 집에 책들이 쌓여가기 시작했다. 이사 갈 때마다 책들 때문에 곤욕을 치른 어머니께선 얼마나 고생이 심하셨는지 내가 군대에 가 있는 동안 몇 차례 분서갱유(?)를 하시기도 했다.

읽기 시작하면 꼼꼼히 읽던 건성으로 책장을 넘기던 어떻게든 끝을 봐야하는 성격 때문이기도 했지만, 내가 좋아했던 많은 책들 중에서도 이문열 씨의 책은 정말 손에서 놓기가 힘들었다. 그만큼 중독성이 강했다.

'사람의 아들' '사색'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 그의 책들은 어린 마음에 대단한 감동과 감명을 가져다 주었고, 곧이어 온 국민의 필독서가 된 '삼국지'와 '수호지'로 그의 책들은 나의 책장에서 가장 많은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권수로 따지면 찾아내지 못한 것까지 40권 정도는 될 듯 싶다. 돈으로 따지면 얼마나 될는지...

그의 책들을 읽으면서 가장 크게 느꼈던 것은 '읽는 이를 사로잡는 특별한 재주'와 함께 '작품의 상품성을 극대화시키는 재주'까지 가졌다는 것이었다. 책을 잡고 읽는 법만 알았지 작가의 사상이나 작품을 분석할 만한 문학이론에 대해서는 깡통이지만 그의 작품에는 그것이 눈에 보였다.

'홍위병론'으로 인해 시끄러웠던 지난 두 달 동안,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다른 모든 쟁점(?)들을 잠재우는 괴력을 발휘했다. 역시 상품성은 국가와 국민이 인정해주는 그야말로 강력한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국민들의 반향(?)을 일으켰던 "최고의 이율로 책값을 쳐주겠다"던 그의 발언은 열렬한 팬이었던 한 사람으로서 가슴이 아팠다. 결국 "이 씨는 문화인보다는 정치인에 가까운 인물이고, 정치인 가운데서도 무책임한 언어폭력에 의존하는 '선동정치인'에 가까운 인물이다"라는 강준만 교수의 얘기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한때 나의 독서열에 불을 지폈던 그의 작품들을 한자리에 쌓아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고, 그렇게나 많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한 권 한 권 책장에서 찾아낼 때마다 느끼는 씁쓸함을 이문열 씨는 알까.

이제 그가 일으켰던 파문도 잠잠해지자, '임동원 통일부 장관 탄핵안 표결'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이 나라 국민들이 가진 가장 큰 아픔이다. 그 아픔을 어루만져줄 대중성을 갖춘 존경받는 문학인을 기대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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