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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한흥 옥천신문 편집국장. ⓒ 조주현
<오마이뉴스>는 '현장과 사람-언론개혁, 이제는 이렇게'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세무조사와 탈세사주 구속으로 1단계 언론개혁이 마무리된 지금, 언론개혁의 2단계 과제들을 짚어보는 기획입니다. 이 기사는 그 여섯번째입니다.-- 편집자 주

언론개혁과 안티조선은 이제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우리 시대의 화두가 됐다.

그것은 종교, 여성, 시민, 환경, 노동, 농민, 빈민, 학생, 법조, 학술, 예술, 통일, 언론 등 18개 부문운동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언론개혁 6월선언' 대회의 열기에서도, 60만 조합원을 가진 민주노총의 전격적인 '조선일보 구독거부 선언'의 충격에서도, 대학가를 안티조선 열풍으로 휩싸이게 만든 전대기련의 '조선일보 평생구독거부 선언'의 결의에서도 그대로 확인된 바 있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변화는 강준만 교수 등 일부 지식인과 네티즌이 안티조선운동을 시작하던 무렵인 한두 해 전만 하더라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그러나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상황은 돌변했다. 많은 사람들이 구체적인 절독운동을 통해 조선일보의 판매부수를 줄여버리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서서히 그것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닐 것이라는, 잘만 하면 성공할 수도 있다는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다.

우리는 그러한 징후를 곳곳에서 느낄 수 있거니와, 그 유력한 진원지 중의 하나가 인구 6만의 소도시 충북 옥천임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옥천 주민 33명은 작년 8월 15일 '조선일보바로보기 옥천시민모임'(일명 조선바보, 대표 전정표)을 결성한 뒤 조선일보의 친일행각을 집중 고발하는 한편 조선일보를 구독하는 사람들을 맨투맨으로 만나서 절독을 권유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 마을 전경. ⓒ 조주현

이를 위해 이들은 인터넷 홈페이지 물총닷컴(mulchong.com)을 만들었고, 여기에 조선일보의 친일행각과 관련한 모든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한편 효율적인 싸움을 위해 '옥천전투일지'라는 코너를 만들었으며, 자신들이 실천에 옮긴 절독운동 사례를 일일이 실명으로 공개했다.

연속기획
[5. 장호순 순천향대 교수] "'당신들만의 언론자유'는 이제 그만"
[4. 김주언 언개연 사무총장] "그게 사회주의적 발상이라고요?"
[3. 최민희 사무총장] "안티조선 대중화에 집중하겠다"
[2. 김영모 기자협회장] "언론평의회로 자율개혁을"
[1. 진중권] "이제 기자의 이름을 불러줘야"

조선바보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던 데는 이곳의 유일한 지역신문인 <옥천신문>의 역할이 컸다. 작년 8월 15일부터 5단 통광고를 통해 조선일보의 친일기사를 소개하는 한편 독립군 모집에 들어간 것이다.

<한겨레>의 국민주 창간방식을 응용한 군민주 방식으로 89년 9월 30일 창간된 <옥천신문>은 주민 편에서 군청과 의회를 가차없이 비판하고, 지방언론의 촌지 관행을 톱기사로 폭로하고, 보도연맹 학살사건 등 왜곡된 현대사를 발굴하고, 98년 최장집 교수 사건 당시 '조선일보를 해부한다' 시리즈를 3개월에 걸쳐 연재한 전력이 있다.

이렇게 운동을 전개하자, 독립군 가입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현재 회원수는 약 4백명. 흥미로운 것은 독립군 가입자가 진보와 보수를 망라한다는 점이다. 전교조, 농민회, 민예총 등 개혁적 단체는 물론이고 바르게살기운동협의회, 민족중흥동지회, 상이군경회 등 보수적 단체의 대표들까지 독립군이 된 것이다.

특히 도의원 2명 중 1명, 군의원 9명 전원이 독립군에 가입한 것은 조선일보에게 큰 충격을 주었던 모양이다. 옥천으로 기자들을 파견해 군의원을 일일이 만나 회유하려 한 것이 그 반증이다.

그로부터 1년이 흘렀고, 옥천에서 조선일보 부수는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그 과정에서 옥천은 전국적인 언론개혁의 '성지'로 떠올랐다. 그리고 <옥천전투>라는 기록영화의 소재가 되기까지 한 이 운동방식은 현재 영동, 속초, 남해, 대구, 광주, 서귀포, 서울, 대전, 창원, 전주, 청주, 홍성, 원주, 나주, 포항 등 18개 지역으로 확산된 상태다.

▲ⓒ조주현
8월의 마지막 날 오후 <옥천신문> 편집국장이자 '독립군 대원'인 오한흥(44) 씨를 만났다.

기자가 옥천을 방문한 이 날은 마침 <옥천신문>이 발간되는 날이었다. 주간신문인 <옥천신문>은 매주 금요일에 발행된다. 오후 2시경 오 국장이 갓 인쇄된 신문을 가지고 청주에서 돌아왔다. 신문을 펼치자 가장 먼저 세 개의 기사가 시선을 끌었다. 청산면민 체육대회 및 백중씨름대회 기사, 군청의 '뒷북 행정'을 비판하는 기사, 조선일보 전사주 방응모의 장남 방재선 씨 인터뷰 기사가 바로 그것.

- 일개 면(面)의 체육대회를 화보까지 곁들여 한 면을 할애해 전면에 걸쳐 크게 보도한 이유는 무엇인가.
"<옥천신문>의 주인은 옥천 주민이다. 그렇다면 지면에서도 주인다운 대접을 받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기관장이나 유지들의 의례적인 동정보다 주민들이 잠시나마 시름을 잊고 한 자리에 모인 체육대회의 의미가 더 크다고 본다. 조선바보운동이 지역공동체 회복운동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지면배치는 자연스럽다. (화보 사진을 가리키며)여기 봐라. 체육대회에 참여한 80대의 시어머니와 60대의 며느리가 파안대소하는 표정이 아름답지 않은가."

- 방재선 씨 인터뷰는 중앙지들도 싣기 꺼려했는데, 어떻게 게재하게 됐나.
"<미디어오늘>과의 기사교류 협약에 의해 전문을 싣게 됐다. 우리는 98년 조선일보가 최장집 교수에 대한 마녀사냥을 벌일 때도 3개월 동안 '조선일보를 해부한다' 시리즈를 집중적으로 연재한 적이 있다. 반조선일보운동의 성지로 불리는 옥천인데, 이 정도는 당연한 것 아닌가. 사실 <옥천신문>이 이런 행보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창간 초기부터 촌지와 계도지를 거부하는 등 스스로부터 떳떳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실제로 충북의 한 언론사가 조선일보 비리와 관련된 기사를 보도하려다가 도리어 '서울에서 기자 몇 명을 데려와 너희 사주의 뒷조사를 하겠다'는 주재기자의 협박을 받고 중단했다는 제보를 받은 적도 있다. 풀뿌리 언론이 언론개혁을 말하려면 그만큼 도덕성과 책임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반증이다."

- 군청의 뒷북 행정을 비판하는 기사를 실었는데, 공무원들의 항의나 그에 따른 어려움은 없나.
"이런 기사가 나가면 좋아할 공무원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이것도 공무원들의 버릇을 어떻게 들이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기 위해선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만큼 정확하게 기사를 써야 한다. 그리고 어떤 청탁이 들어오더라도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옥천신문>에 작게 보도해 달라고 청탁하면 거꾸로 더 크게 실린다는 이야기가 자꾸 나오면서 이제 기사와 관련된 압력이나 청탁은 사라졌다."

실제로 오후 5시경 이 기사와 관련된 담당 공무원이 신문사를 찾아왔다. 그런데 그는 기사 내용 자체에 대해서는 항의하지 않고 전후 과정과 자신의 입장을 간단하게 해명한 뒤 그대로 돌아갔다. 그에게 "기분 나쁘지 않냐"고 묻자, "<옥천신문>은 공무원이 못 하면 못 한다고, 잘 하면 잘 한다고 보도한다"고 답했다.

<옥천신문>은 풀뿌리 신문의 연대기구인 바른지역언론연대(바지연) 회원사이다. 몇 년 전 발행부수와 판매부수 등 회원사 현황을 조사하던 바지연 실무자는 <옥천신문>이 신고한 발행부수를 보고 깜짝 놀랐다. 다른 신문사에 비해 신고한 수치가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발행부수를 적게는 2∼3배, 많게는 4∼5배 늘려 잡는 것은 중앙일간지를 포함한 언론계의 관행. 구독료보다 광고료에 의존해서 생존해야 하는 언론계 풍토에서는 어쩌면 당연하게 여겨지는 일이다. 그러나 <옥천신문>은 그런 관행을 거부했다.

ⓒ 조주현
- <옥천신문> 발행부수가 정확하게 얼마나 되는지 말해줄 수 있나.
"굳이 숨길 이유가 없다. 오늘 발행부수는 정확하게 3046부다. 우리는 외부에 발행부수를 부풀려서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신문사 직원들은 신문 한 부 한 부에 목숨을 걸다시피 한다. 신문사에 직접 신문을 구하려고 찾아오는 사람들로부터도 반드시 신문값을 받는다."

- 재정상황은 어떤가.
"풍족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양호한 편이다. IMF에도 불구하고 직원 급여 수준은 조금씩 향상됐다. 그러나 여전히 개혁해야 할 부분은 많다. 좋은 신문을 만들기 위한 노력도 더 기울여야 할 것이다. '안 보고는 못 배기는 신문'과 '독자에게 부끄럽지 않은 신문'이 우리의 목표다."

"신문 한 부 구하러 왔는데요."

인터뷰를 하는 동안 몇 번이나 신문사를 문을 두드리며 찾아온 사람들이 한 말이다. 조선바보운동의 유력한 진지 중의 하나인 <옥천신문>이 주민들에게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장면들이었다.

옥천에서 조선일보 추방운동이 성공을 거두게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무엇보다 먼저 기존의 서울 중심의 전통적 운동과 달리 지역에서 먼저 출발한, '아래로부터의 자발적인 주민운동'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덕분에 그들은 지역주민의 정서에 맞는 전술을 채택할 수 있었다.

조선일보의 사회적 해악을 알리되,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친일행각에 초점을 맞춘 것이 바로 그것이다. 조선바보 회원들이 서로를 부를 때 '친일파'의 반대말인 '독립군'으로 부르는 이유도 바로 여기 있다.

- 조선일보의 친일행각에 초점을 맞춘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 처음에는 말이 많았다. 특히 서울에서 활동하는 분들이나 지식인들은 '너무 오래된 과거의 일이 아니냐' '이미 다 알려진 사실을 가지고 왜 그러느냐' '조선일보만 친일을 했던 것도 아니지 않느냐' 등의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막상 활동을 시작하자 현장의 분위기는 달랐다."

- 무엇이 어떻게 달랐다는 말인가.
"우리는 독립군 활동을 시작하며 조선일보 친일행각을 알고 있는 주민이 적어도 2%는 될 거라고 봤다. 그러나 실제로 활동을 하면서 확인해 보니 그 비율은 제로에 가까웠다. 그들에게 조선일보 친일행각을 알려주면 99%가 매우 충격적으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구독을 중지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실제로 군의원들조차 조선일보의 친일행각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와 관련 민종규 군의회 부의장은 기자에게 "나는 독립군에 가입하는 과정에서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게 있었다. 많이 배운 사람들은 조선일보의 친일행각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을 것 아닌가. 왜 알고도 여태까지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알려주지 않았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 그 사람들이 알고도 침묵을 지켰다면 능력이 없거나 역사에 죄를 지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조선일보는 친일문제에 대해 지금까지 침묵으로 일관해 왔다. '무대응의 대응전략'을 펼친 것이다. 대다수 국민이 이 사실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상황에서 논쟁을 확산시켜 봐야 이익을 볼 게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상황은 달라졌다.

- 조선일보가 사외보 3, 4호에서 잇따라 자신들은 친일지가 아니라고 강변했는데….
"권불십년이라 했는데, 역설적으로 나는 언론권력이 무너질 때는 저렇게 형편없이, 그리고 협량하게 무너지는구나 하는 것을 절감할 수 있었다. 선문대의 이연 교수인가 하는 양반이 조선일보의 친일은 10%에 불과하고, 항일은 90%라고 했다는데, 그런 교수 밑에서 배워야 하는 선문대 학생들도 불쌍하고…."

- 제3자를 내세운 조선일보의 항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학문적 객관성을 갖추지 못한 주관적 강변에 불과하거니와, 무엇보다 친일행각을 계량적 수치로 따진다는 것 자체가 해괴한 발상이다. 그런데 우리가 한 발짝 후퇴해서, 조선일보의 친일행각이 10%에 불과하다는 그들의 강변을 수용한다고 쳐도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예컨대, 대도(大盜) 조세형과 신창원도 24시간 내내 범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다. 그들의 범죄행각을 시간으로만 따진다면 하루에 30분∼1시간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지금 스스로 하루에 2시간 24분씩 범죄행각을 벌였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 친일을 10%만 했으니 친일지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인가.
"나는 친일논쟁에 대한 조선일보의 대응방식을 보며, 분노를 떠나 연민의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따지고 보면 범죄는 순간이나 찰나에 벌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거나 감옥에서 지내야 한다. 어디 그뿐인가. 감옥에서 나오고 나서도 전과자라는 낙인이 찍히는 등 평생에 걸쳐 엄청난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따라서 조선일보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친일지가 아니라고 핏대를 세우며 국민에게 대들 것이 아니라 친일행각에 대해 진심으로 참회하고 민족 앞에 사죄하는 일일 것이다."

인터뷰 장소를 오한흥 국장의 자택이 있는 안터마을로 옮겼다.

안터마을 입구에는 '조선일보 없는 아름다운 마을'이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조선일보' 글씨는 붉은색으로, 나머지 글씨는 자주색인 이 현수막의 명의는 '안터마을 자치회'로 되어 있다. 최근 이 마을 사람들은 장편 기록영화 <옥천전투>(감독 황철민 세종대 교수)에 합동으로 출연한 적이 있는데, 현수막은 그 영화 시사회가 있고 나서 내걸린 듯했다.

안터마을은 37가구가 모여 사는 자연부락. 마을 한가운데로 난 구불구불한 고샅길 오르막을 지나면 둔덕 위에 오 국장의 집이 있다. 텃밭에선 방울토마토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고 고추도 빨갛게 익어가고 있었다. 집 주변에는 배나무, 대추나무, 복숭아나무, 백일홍, 나팔꽃, 코스모스 등 나무와 화초가 지천이었다. 집에 들어선 오 국장은 마당 한 구석에 있는 귤나무와 동백나무에 물부터 뿌려주었다.

▲ 오한흥 편집국장의 자택. ⓒ 조주현

"옆 사무실 개소식 때 귤나무 화분이 들어왔는데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는지 죽어갔다. 버리겠다는 것을 내가 가져다가 마당에 심었더니 이렇게 다시 살아났다. 이 작은 동백나무는 <남해신문> 편집국장을 지낸 한관호(현 논설위원) 씨가 선물한 것이고…."

옥천에서 조선일보 추방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추상적 이론보다 구체적 실천을 앞세운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실제로 그들은 주변에서 아이디어를 제공하면 지역적 특성에 맞게 응용하여 곧바로 실천에 옮긴다. 5일과 10일에 열리는 읍내 장날마다 파라솔을 치고 조선일보 절독을 접수받거나 즉석토론을 벌이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 이는 독일 녹색당이 주민들과 일상에서 만나는 방식을 응용한 것이라고 하는데, 독일에서 유학생활을 한 황철민 교수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한다.

오한흥 국장과 기자는 마당 한 구석에 있는 원두막에 올랐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진보와 개혁을 말하는 사람들은 조선일보가 한국 사회의 만악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당장 나부터 사지도 보지도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조선일보가 나쁘다고 백마디 떠들어야 무슨 소용이 있나? 길거리에 쓰레기가 널려 있으면 주워서 쓰레기통에 버려야 하고 마약에 중독된 사람이 있으면 구해야 하는 것처럼 조선일보 절독운동을 벌이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이 할 일이라고 본다."

- 조선바보운동은 결국 소비자운동이라는 말로 들리는데….
"조선바보운동은 이웃사랑 실천운동이다. 상한 음식을 먹는 이웃에게 그 음식은 상한 것이니 먹어서는 안된다고 말해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 조선바보운동은 소비자운동이기도 하다. 그래서 최근 우리모두 청년방에 들어가 재벌이나 기업의 홈페이지 게시판에서 안티조선 사이버 시위를 벌이자고 제안했다. 반민족 신문에다 광고를 실어서야 되겠느냐고 따지자는 것이다. 각 기업의 사이트에 들어가서 조선일보의 친일행각을 알기 쉽게 알린다면 조선일보 사옥 앞에 가서 하는 1인시위보다 더 효과적일 것이다."

- 언론개혁운동은 결국 정간법 개정 등 제도개선으로 귀결돼야 하는 것 아닌가.
"정간법 개정과 언발위 구성 등 제도개선 노력도 필요하고 진중권 씨처럼 조선일보 홈페이지 독자마당에 들어가서 활약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해둬야 할 것이 있다. 조선일보는 실은 언론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언론으로 규정하고 있을 뿐이지 실은 전쟁범죄집단에 불과하다. 조선일보와의 싸움을 선과 악의 싸움으로 봐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정지용 시인의 <향수>에도 '실개천'이라는 시어가 등장하지만,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개혁되려면 실핏줄과 실뿌리가 중요하다. 조선일보라는 나무도 알고 보면 2백만 독자의 실뿌리 덕분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조선일보라는 나무에서 열리는 과일은 반민족, 반통일의 독사과일 뿐이다. 조선일보의 2백만 독자가 그 사실을 깨닫고 살아날 때 이 민족은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 이문열 씨의 홍위병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아무리 지식인이라도 어떤 사안에 대해 비판하려면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공부하는 자세가 전제돼야 한다. 그것이 정당한 비판을 가능케 한다. 이 씨는 결국 시민운동을 홍위병에 비유한 셈인데, 시민운동이라는 '사실'보다 홍위병이라는 '비유'가 더 어려워서야 되겠는가. 결국 레드 콤플렉스에 호소하려는 마음이 앞섰다는 증거다. 이 씨는 시민운동에 대해서 먼저 배우려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이문열 씨가 진정 안티조선을 비판하러면 옥천에 꼭 한번 와서 직접 배우고 느껴야 할 것이다."

8월의 마지막 날 늦은 오후는 시간의 흐름이 멈춰버린 듯했다. 넋을 잃은 채 실개천 지줄대는 산천을 바라보던 오한흥 국장이 다시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밤이 되면 풀벌레 소리의 향연이 대단하다. 그런 소리를 들으며 꿀 같은 잠에 빠진다. 매일 듣는 소리이지만 같은 연주를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자연사든 세상사든 무변한 것이나 무상한 것은 없다. 조선일보라고 별 수 있겠나. 모든 존재는 생로병사의 운명을 겪게 된다. 자연의 이치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는 아무 것도 없다. 조선일보도 이제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바로 이러한 깨달음들이 옥천 사람들이 재미있고 낙관적으로 조선일보 추방운동을 할 수 있는 저력이다."

- 이 운동을 하면서 개인적으로 얻은 것은 뭐냐?
"무진장 많다. 나는 옥천에서 조선일보가 사라질 때까지 술을 끊겠다고 선언했고, 그 약속을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 양조장 사장님껜 미안하지만 술값 안나가서 좋고, 심신이 맑아져서 좋다. 덩달아 가정도 화목해졌다. 전국의 많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게 된 것도 내가 얻은 것 중의 하나다. 지난 1년 동안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옥천을 다녀갔다. 그분들과 만나 대화하는 과정에서 많은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앞으로 내가 이 운동을 하면서 얻을 이익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 이 운동을 지속시켜갈 방법은 무엇인가.
"내가 누리고 있는 이 행복을 함께 나누고 싶다. 나는 이 운동을 통해 나의 주체를 세울 수 있었다."

오후 5시. 우리는 안터마을을 떠났다. 이동하는 차량에서 오 국장이 서울에서 온 전화를 받았다. 안티조선 대학생 문화제에 강사로 참여해 달라는 전화였다.

새마을 모자를 쓰고 21세기에 벽두에 출현한 이 '대머리 독립군'을 보고 싶은 사람들은 9월 21일 오후 6시 연세대에서 모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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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환 기자는 월간 말 취재차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언론, 지역, 에너지, 식량 문제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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