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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아이 백일 무렵만 해도 저렇게 앉으셔서 손녀딸과 웃으시며 즐거워 하셨다.
ⓒ 전은화
작년 5월 20일은 아버님 첫 제사였다. 처음 지내는 제사인 만큼 다들 참석하는 게 도리라는 큰집 어른들의 말씀이 있었다.

집안에서 제일 '쫄따구'인 나는 당연히 어른들 말씀에 따라야 옳았고 내 자신도 아버님에 대한 도리는 다 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작년 1월, 구정 쇠는 명목으로 아이들만 데리고 귀국을 했다. 구정을 쇠고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몇 달을 쭈욱 한국에 머물렀다.

중국에 혼자 남은 남편이 걱정 되어 전화를 하면 늘 씩씩하게 걱정 말라고만 했다. 보고 싶은 마음에 "나 그냥 들어갈까?" 하면 남편은 "쫌만 더 있으면 되는데… 그냥 있지? 어머니도 좋아하시잖아"라면서 홀로 되신 어머님을 먼저 헤아렸다.

마누라보다 어머님이 먼저인 남편에게 살짝 '삐짐'이었지만 사실은 나도 한국 가족들과 어우러져 있는 것이 참 좋았다. 그렇게 시댁과 친정을 오가며 지내던 어느날, 친정엄마가 점집에 갈 일이 있다며 "너도 갈래" 하셨다. 아무 생각없이 따라 나섰다.

엄마를 따라 도착한 그곳은 참으로 허름했다. 할아버지 신이 모셔진 곳이라 했다. 기분이 영 으스스 하니 들어가는 게 내키지 않았지만, 이왕 따라온 거 숨 한 번 크게 들이쉬고 조심스레 방안에 들어 앉았다.

엄마는 자신의 생년월일과 생시를 일러주신 후 종이를 꺼내셨고 신들린 아주머니의 말을 열심히 받아 적으셨다. 나는 신기해서 그냥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었다. 한참을 보고 있으니 엄마는 "나 끝났는디 너 뭐 물어 볼 거 없냐? 있으믄 언능 물어봐봐" 하신다.

아무 생각이 안 나서 그냥 나도 내 생년월일과 생시를 일러 주었다. 그리고 나서 남편 것도 일러주려는데 문득 남편의 꿈 얘기가 떠올랐다.

돌아가신 아버님, 건강한 모습으로 남편 꿈에 찾아오다

아버님 돌아가시고 몇 달 되지 않았을 때다. 그날 아침 남편은 꿈이 너무 생생하다며 흥분된 목소리로 꿈 얘기를 늘어놓았다.

10년이나 누워 계실 만큼 아프셨던 아버님이 꿈에서는 조깅을 하실 만큼 건강한 모습이셨다. 막내인 남편과 아침운동을 했고 그러다 갑자기 단팥빵을 찾으셨다. 남편은 얼른 빵집으로 갔는데 하필 단팥빵만 없었다고 한다. 다른 빵집을 찾던 중 내가 깨우는 소리에 잠이 깼다며 안타까워했다.

그후로도 몇 번이나 더 남편 꿈에 찾아오신 아버님은 뭔가를 해달라고 하셨다. 처음엔 무척 좋아했던 남편도 꿈이지만 너무 자주 뵈니 기분이 이상하다고 했다. 한동안 꿈얘기가 잠잠해져 깜빡 잊고 있었다.

신들린 아주머니 앞에서 나는 남편의 꿈 얘기를 조근 조근 풀어놓았다. 한참 얘기를 듣던 아주머니는 "돌아가신 후로 옷 한 번 해드린 적 있어요?" 하고 물었다. 그런 적이 없어서 아니라고 대답했다.

아주머니는 "거 돌아가신 분이 자꾸 산 사람 찾아오는 것은 뭔가를 원하는 겁니다. 시아버지 옷 한 벌 해서 사라(태워)주세요. 비단도 필요 없고 옥양목으로 지어서 해드리면 좋아하실 거예요. 속옷부터 신발까지 정성스레 준비하시고 산소에 가서 사라(태워) 드림서 좋은 곳에 가시라고 한 말씀 해주셔요"라고 했다.

그날 저녁 남편에게 전화해서 그 말을 했더니 준비해 놓으라고 했다. 친정엄마가 잘 아는 옷감집에 가서 옷을 준비하는데 기분이 묘하고 마음까지 숙연했다.

그리고 얼마 후 제사 날이 다가왔다. 제사 날 저녁 사정이 생긴 큰시누이네만 빠지고 다른 가족은 다 모였다. 나름대로 큰 의미를 부여했던 아버님의 첫 제사는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정성스레 잘 치렀고 가족들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돌아가신 아버님께 옥양목 새 옷 해드린 날

▲ 아버님 병환으로 웃을일이 없다시던 어머님도 손녀딸 재롱에 저리도 좋아하셨는데 이제는 아버님의 빈자리가 크신듯 합니다.
ⓒ 전은화
다음날 아침, 음식 몇 가지와 준비해둔 아버님 옷을 챙겨 어머님 모시고 아버님이 계신 산소로 향했다. 전날까지 날이 흐려서 비가 올까 걱정했는데 날씨가 화창했다. 어머님 얼굴에도 화창한 날씨만큼이나 화색이 돌았다.

산소에 도착해 보니 한 평 반 남짓한 아버님 산소 위엔 잔디가 참 실하게 자라 있었다. 어머님은 "나왔어. 여그 막둥이랑 며느리도 왔잖아. 잘있었어?" 하시며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셨다.

준비해간 음식을 가지런히 차려놓고 남편과 같이 절을 올렸다. 음식들을 두루두루 고시래 했다. 그리고 아버님 옷이 든 보자기를 풀었다. 속옷부터 신발까지 주인 앞에 오니 더 새하얗고 고와 보였다.

남편은 조심스레 꺼내어 아버님 산소 위에 하나씩 펼쳤다. 하얀 속옷과 양말, 신발까지 가지런히 놓아드렸다.

옆에서 바라보시던 어머님은 "새옷 입은 게 좋아? 막내가 옷 입히준 게 좋제? 인자 멀리서 막내네 건강허라고 잘 지키주고 자꾸 찾아가서 귀찮게 허지 말고…"라고 하시며 울컥 하는 목소리를 헛기침으로 가다듬으셨다.

어머님 말씀이 끝난 후 나는 산소를 향해 "아버님 옷이 마음에 드세요? 이거 입으시구요, 그동안 못 가보신 곳 다 다니세요 네?"라고 말씀 드렸다.

남편은 펼쳐놓은 옷들을 다시 잘 거두었다. 산소 앞 한쪽 모퉁이에서 살살 태우기 시작했다. 불던 바람까지 조심조심 비켜갔다. 연기가 곧게 하늘로 솟았다. 금세 다 타고 한줌의 재만 남았다.

그걸 보노라니 살아계실 때 죽 한 수저만 떠 넣어 드려도 '고맙다' 하시며 아이처럼 우시던 아버님 얼굴이 필름처럼 스쳤다. 마음이 참으로 벅찼다.

아버님! 좋은 곳에서 늘 평안 하세요

산소를 빠져나와 돌아오는 길에 어머님은 "나도 생각을 못했는디 내가 다 좋다"라고 하셨다. 남편과 나는 어머님을 모시고 미륵산 주위를 드라이브 한 후 유명한 식당에 들러 어머님 좋아하시는 순두부와 메밀묵을 사드렸다. 평소에 술을 잘 안 드시는 어머님이 그날은 동동주를 한 사발 시원하게 들이키셨다. 나도 한 사발 쭈욱 들이켰다.

그 다음날 쓸쓸한 어머님을 뒤로 한 채 한국을 떠나왔다. 그날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일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낯선 곳에서의 일상은 늘 평범하게 시작과 끝을 맺고 있지만 또다시 5월이 되니 봄 새싹 마냥 그날의 기억이 새록새록 고개를 내밀었다.

우연인지 그날은 올해 기념일이 된 부부의 날이었다. 저승과 이승이지만 아버님 산소에서 두 분이 한 자리에 함께 하셨으니 생각만으로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날 이후 신기하다고 해야 하는 건지 아버님은 더 이상 남편 꿈에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다.

"아버님~! 지금도 그 옥양목 저고리 입고 계세요? 좋은 곳 많이 다니셨어요? 늘 평안 하시지요~!"

대답없는 메아리만 돌아올 뿐이지만 나는 믿는다. 믿고 싶다. 우리 아버님 새 옷 입으시고 분명 좋은 곳에서 평안하게 계시리란 것을….

덧붙이는 글 | <특별한 5월, 난 이랬다> 에 응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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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광동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한국에 돌아와 생활하고 있습니다 평범한 삶속에 만나는 여러 상황들과 김정들을 담아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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